미술칼럼 > 서양

[아트딜러, 미술사를 바꾸다] 전속작가 시스템의 현대화, 레오 카스텔리

레전드라고도 할 만큼 유명한 화상 레오 카스텔리(1907-1999). 현대적인 갤러리 시스템의 기반을 구축했고, 리히텐슈타인, 프랭크 스텔라, 재스퍼 존스 등의 미국 팝 및 추상 작가들을 발굴해 그들의 첫 전시를 열어주었으며 가고시안 같은 거대 갤러리가 뿌리내리도록 도와준 것도 그이다. 아직도 자신들의 작가를 열심히 프로모션하고 있는 갤러리로 이어지고 있다. 


로버트 매플소프(Robert Mapplethorpe, 1946-1989) <레오 카스텔리>, 1982, Gelatin silver print, 48.9×38.8 cm © Robert Mapplethorpe Foundation



그는 이탈리아계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아버지는 헝가리 출생의 유태인 어니스트 크라우스로,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지역인 트리에스테에서 부유한 이탈리아 집안 딸 비앙카 카스텔리와 결혼을 했고, 무솔리니 정부가 이름을 이탈리아식으로 바꾸도록 해 성을 카스텔리로 완전히 바꾼 것이다. 아들 레오는 밀라노 대학 법대를 졸업하고 은행 중역이었던 아버지가 보험회사에 취직시켰다. 문학에 열정을 가졌던 청년 레오는 회사를 그만두고 비교문학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으나, 아버지는 루마니아의 보험회사 지점에서 일 년간 일하고 나면 기꺼이 지원하겠다고 제안, 1932년 부쿠레슈티로 가 보험회사를 다닌다. 

그는 이 당시 회사일은 지루했지만 삶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고 회상했다. 루마니아 사업가 딸인 일리나 샤피라Ileana Schapira(나중에 유명 딜러 일리나 소나벤트가 된다)를 만나 결혼하게 되고, 둘이 함께 문학과 앤티크 수집의 취미를 공유했다. 루마니아 교외를 다니며 미술품을 찾아다니기 시작하면서 미술의 커리어를 시작한다.  

부자였던 장인 덕에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고 아파트도 꾸미고 앤티크도 사 모으고 하다가, 장인의 도움으로 이탈리아 은행 파리 지점으로 자리를 옮긴다. 부쿠레슈티보다 더 재미있는 도시였던 파리에서 부부는 여러 사람들을 사귀게 되는데 그중 젊은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르네 드루앵René Drouin과 의기투합하게 되고, 그가 디자인한 가구나 오브제 회화 작품 같은 것들을 모아 전시하는 갤러리를 열게 된다. 

역시 일리나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파리 리츠 호텔 뒷마당을 끼고 있는 멋진 장소에서 용감히 갤러리를 창업하고, 은행을 그만두고 풀타임으로 갤러리 운영에 뛰어들었다. 당시 레오 카스텔리는 동시대미술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였고, 그나마 어릴 때부터 미술관을 다니던 일리나가 조금 더 나았다. 파시스트 시대의 파리였지만 중요한 서적을 잘 갖추고 있던  서점에서 구한 『세잔에서 클라이브 벨까지』라는 책으로 첫 현대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파리 갤러리 시절
트리에스테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레오노르 피니를 통해 파리 초현실주의 그룹과 친해지게 됐다. 그로부터 파리 갤러리의 방향이 초현실주의 쪽으로 가자 드루앵의 아르데코 가구는 초현실주의 환상적 작품들에 가려져 드루앵에게는 고통이 됐다. 첫 전시는 1939년 파벨 첼리체프의 <현상Phenomena>을 소개한 것이었다. 


파벨 첼리체프의 <현상Phenomena>



모든 것이 잘 될 것처럼 보였지만 전쟁이라는 비극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드루앵이 입대했고, 레오 카스텔리 부부는 독일 점령지역이 아니었던 남프랑스 칸에 있는 장인의 별장으로 가 준비를 하고 알제리, 모로코, 스페인을 거쳐 1941년 뉴욕에 도착했다. 

뉴욕에서
뉴욕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유럽의 초현실주의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증언한다. 줄리안 레비와 페기 구겐하임 등의 딜러나 컬렉터들이 레오 카스텔리의 갤러리와 초현실주의를 주의깊게 보고 있다고 하기도 했다. 뉴욕에서 지내다 1943년 입대, 루마니아로 가서 통역병으로 일하고 1946년에 제대했다.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 파리에 들렀을 때 놀랍게도 갤러리가 계속 운영되고 있었는데, 초현실주의 대신 칸딘스키, 뒤뷔페, 드 스틸 등의 흥미로운 화가들을 다루고 있었다. 갤러리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지만 그것은 파리가 아닌 뉴욕에서여야 했다. 드루앵이 회화 작품들을 포장해 파일럿 친구에게 부탁해 항공편으로 뉴욕으로 부치면 카스텔리가 공항에서 받는 가내수공업적 방식으로 작품을 공급받았다. 

당시의 고객 중 힐다 르베이 남작부인이 친구 구겐하임의 컬렉션을 위해 회화 작품을 다수 구입했다. 레오 카스텔리의 회고록에 따르면 컬렉터로서 카스텔리 자신도 파울 클레의 유화 두 점과 몬드리안 한 점을 한 점당 2,000달러씩 주고 구입했다가 몇 년 후에는 석 점에 11,000달러에 팔았고 이 작품들은 1999년에 각각 200만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 됐다.  

레오 카스텔리는 딜러를 시작하면서도 장인의 회사에서 일해야 했으나 마음은 온통 미술에 가 있었고, 이때 그의 공부 욕심을 채워준 것은 MoMA의 수많은 컬렉션들이었다. 그는 유럽의 어떤 미술관에서도 배울 수 없었던 현대미술에 대한 눈을 떴고, 알프레드 바 관장을 스승으로 삼아 그가 선택하고 분석하고 우리 시대의 대표 예술로 꼽는 것들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개인 딜러로서 카스텔리의 첫 활동은 1947년 드루앵의 부인이 위탁한 수백 점의 칸딘스키 회화였다. 드루앵에게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하에 1949년 파리와는 관계를 끊고 뉴욕에서 폴록, 클라인, 로스코, 드쿠닝, 스틸 등 새로운 혁명적인 화가들 그룹에 빠져들었다. 이들을 지지하는 두 명의 비평가 해롤드 로젠버그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영향도 컸다. 

1951년에 큐레이터로서의 첫 전시라고 할 수 있는 <9번가 전시>를 열었는데 이는 추상표현주의 출현에서 중요한 사건이 된다. 이때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적인 초기 지지자인 시드니 재니스와 인연을 맺었다. 

레오 카스텔리는 위인을 숭배하듯 작가들을 존경하고 숭배했다. 유럽에서 막스 에른스트와 달리를 존경했다면 뉴욕에서 가장 그의 눈을 빛나게 해 준 영웅은 폴록과 드쿠닝이다. 50년대 초반, 이스트햄튼의 집으로 드쿠닝을 초대, 여름 동안 일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윌렘과 그와 아내 엘레인이 함께 와 지내게 됐고, 그들 덕에 프란츠 클라인, 폴록 등 많은 예술가들이 집으로 모여들었다. 드쿠닝과 폴록은 좋은 친구 사이였지만 서로를 가차없이 놀려 싸움 직전에 이르기도 했다. 

뉴욕스쿨 프로모션
1957년 2월 1일 카스텔리 갤러리를 오픈, 이스트 77번가 아파트에서 소박하게 시작했다. 첫 번째 전시는 미국 아티스트의 중요성을 선언하기 위한 의도였고, 뒤뷔페, 레제, 피카비아, 몬드리안 등 유럽 화가들 옆에 드쿠닝, 폴록, 데이빗 스미스를 배치했다. 카스텔리의 이러한 배치는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위상을 높이는 효과를 보여줬고,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화됐다. 

“예술의 진화 과정에서는 분명히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어떤 모순이 생겨나는 이때 딜러는 이러한 순간을 정확히 파악하고 어떤 아티스트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현하는지 알아챌 수 있어야 한다. 갤러리를 열었을 때 나는 그 때가 그런 순간이라고 느꼈고, 재스퍼 존스, 라우셴버그, 사이 톰블리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새로운 단계로의 도약(Quantum leap)을 하는 대표주자라 느꼈다.” 

1957년 3월, 샤피로(Meyer Shapiro)가 라우셴버그를 포함, 한 세대 젊은 작가들의 추상표현주의 전시를 열게 되는데(Jewish Museum) 그 전시를 본 레오 카스텔리는 재스퍼 존스의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재스퍼 존스의 발견
“집에 돌아가도 계속 생각나서 마음속에서 그 작품을 지울 수 없었다. 얼마 후 라우셴버그의 작업실로 갔을 때 재스퍼 존스의 이름이 떠올랐고, 내가 본 그의 녹색 작품에 대해 밥(로버트 라우셴버그)에게 말했더니 ‘그의 작업실이 바로 내 작업실 아래에 있다’고 했다.”

카스텔리는 재스퍼 존스의 작업실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고 알파벳, 숫자, 국기, 과녁 등 놀라운 이미지들을 얹은, 27세의 청년이 만든 작품이라고 믿을 수 없는 성숙한 작업에 매료됐다. 1958년 재스퍼 존스의 첫 전시를 열어주고 그는 그 전시가 화상으로서의 자신의 경력에서도, 미술사에서도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여겼다. 전시를 본 알프레드 바도 작품 몇 점을 사고 싶어했고 이것 저것을 고르면서 누가 자금을 댈는지 중얼거리며 몇 시간을 보냈다고 회상했다. 


재스퍼 존스, Flag, 1954–55, Encaustic, oil and collage on fabric mounted on plywood, Museum of Modern Art



알프레드 바는 필립 존슨(MoMA 이사)에게 전화를 걸어 문제가 됐던 국기 모독 이슈가 해결될 때까지 작품을 사라고 하고 미술관에 걸어두자고 했다. 존슨은 900달러에 그림을 구매했고, 국기 이미지 문제가 해결되어 바가 존슨을 찾아가서 ‘내 깃발’을 달라고 하자 “당신의 깃발? 이제는 내 깃발이오. 작품이 이제는 너무 마음에 들어. 가지고 있고 싶소.”라고 대답했다고. 결국은 알프레드 바에게 경의를 표하며 MoMA에 기증하게 된다. 

재스퍼 존스 전시 한 달 후 라우셴버그 첫 전시회를 열었다. 수탉, 넥타이, 신발 등 물건을 붙인 유명한 컴바인 페인팅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카스텔리는 자신의 컬렉션으로 페인트가 뿌려진 진짜 베개와 이불로 강간이나 살인 같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유명한 작품 <침대>를 구입했다. 팔린 작품은 그것 외에 딱 하나 더 있었는데 “붉은 콜라주”로, 소장자가 배달원 같은 사람들이 올 때마다 웃어가지고 어쩔 수 없이 벽장에 넣어뒀었다며 되돌아왔다. 


Robert Rauschenberg, Bed, 1955, Oil and pencil on pillow, quilt, and sheet on wood supports, 191.1 x 80 x 20.3 cm



Robert Rauschenberg, Untitled (Red Painting), c1953, Oil, fabric, and newspaper on canvas, with wood, 200.7 x 84.1 cm, Guggenheim Museum



재스퍼의 빠른 성공에 비해 라우셴버그의 전시는 그저 그랬다. 초기 라우셴버그를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라우셴버그에게는 대중 뿐만 아니라 알프레드 바도 긍정적인 반응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워홀에 대한 실수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프랭크 스텔라, 로이 리히텐슈타인, 싸이 톰블리, 에드 루샤, 리처드 세라, 브루스 나우먼 등이 카스텔리에 합류했다. 존스, 스텔라, 리히텐슈타인에게 첫 개인전을 열어준 화랑이다.

그는 워홀에 대해 실수를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워홀은 친한 작가들이 많은 내 갤러리에 합류하길 원했지만 나는 그의 작품이 리히텐슈타인과 너무 비슷하다고 생각해 거절했다. 워홀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스테이블 갤러리로 갔고 1년 후 내가 본 워홀의 전시는 환상적이었다. 브릴로 상자, 마릴린, 엘비스 그림 등을 보고 나는 내가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구멍가게에서 수퍼마켓으로
카스텔리는 작품 판매여부와 상관없이 화가들에게 급여를 지급했기 때문에 화가들은 웬만해서는 카스텔리를 떠나지 않았다. 1967년 리처드 세라를 처음 만났을 때 철판 작품들이 팔릴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음에도 3년간 월세를 보장해주겠다고 했다. 또, 그는 재능 있는 미국의 신진 화가들을 유럽에 적극적으로 소개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 덕에 1964년 라우셴버그는 베니스 비엔날레 회화 부분에서 대상을 차지한 첫 미국인이 되기도 했다. 

1971년 웨스트 브로드웨이 420번지에 소호 지점을 열었는데 2층이 카스텔리, 3층에는 소나벤드 갤러리(이혼한 일리나의 갤러리)였고 에머리히가 꼭대기층에 있었다.

*레오와 일리나는 1959년에 이혼했다. 두 번째 부인 앙투아네트 프레이섹스 뒤 보스트Antoinette Fraissex du Bost이 1987년 사망하고 나서 1995년 세 번째 결혼한 사람은 미술사가이자 큐레이터인 바바라 베르토치 카스텔리 Barbara Bertozzi인데, 최근(2022년) 카스텔리 갤러리 디렉터로 올해 프리즈 서울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많은 화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에 카스텔리를 담았다. 엘레인 드쿠닝과 리처드 아트슈바거는 초상화를 그렸고, 워홀은 재킷과 넥타이 차림의 그를 실크스크린으로 만들었다. 프랭크 스텔라는 그의 이름을 따 작품 제목을 붙였고, Klaus Guingand는 그의 그림자를 그린 작품으로 유명세를 탔다. 


Klaus Guingand, Léo Castelli's shadow, 1991, Acrylic on canvas, 200x150 cm


레오 카스텔리는 존스 작품을 퐁피두 센터에 기증해 프랑스 명예 훈장을 받기도 했다. 미술관 기증에 세금 공제가 없던 1988년 라우셴버그의 침대(1955)를 MoMA에 기증했다. 1999년 그의 사망 이후 2007년 카스텔리의 사망 후 부인 바바라와 두 자녀들은 갤러리 아카이브를 스미소니언의 미국미술아카이브에 기증했다고 발표했다. 



업데이트 2023.11.08 21:27

  

최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