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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중섭의 스승, 쓰다 세이슈의 유화 <조선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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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가 김병기의 회고 '한세기를 그리다'

한겨레신문에 연재되는 화가 김병기의 '한 세기를 그리다'라는 글이 대단한 화제이다. 그는 한국 근대 화단의 중심인물인 이중섭과 가장 가까이 지냈던 동갑내기 친구이다. 이중섭과는 평양 종로보통학교 같은 반이었으며, 후에 도쿄의 문화학원을 함께 다닌 막역한 친구였다. 김병기 역시 화가이지만 이론에도 밝아 비평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어 비평이 부재하던 시절 많은 좋은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1916년생이니 현재 한국식 나이로 103세이다. 놀라운 것은 아직도 현역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지팡이 없이 걷는 건강을 유지하고, 여전히 젊은이 못지않게 기억이 정확하고, 아직도 매일 그림을 그리는 노익장을 과시한다. 

필자는 김병기 선생과 나름대로 몇 가지 인연이 있다. 2015년 일본에서 '조선에서 그리다'라는 전시에 참여하며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내가 주선하여 백영수 선생과 만나기를 권유한 적이 있었다. 2년 후 백영수 선생 개인전에서 두 분이 만나실 때 중간에서 두 분의 의사소통을 도왔던 것도 돌이켜보면 즐거운 일이었다. 또한 파티를 좋아하는 백영수 선생 댁의 행사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제법 오랫동안 나눈 인연은 미술학도인 나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그를 만나며 놀라운 것은 그분의 지적인 능력과 출중한 기억력이다. 당시 자료가 많지 않았던 시절에 학습한 미술에 대한 지식의 깊이와 넓이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다. 또한 100세가 훌쩍 넘은 연세임에도 기억력이 기록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어 그의 술회는 당장 미술사의 참고자료로 써도 좋은 정도의 일차 자료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김병기의 쓰다 세이슈에 대한 기억

김병기의 회고에 따라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면 이러한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 문화학원 시절 이중섭, 문학수, 김병기는 삼총사로 어울렸다고 한다. 이중섭은 소를 즐겨 그리고, 문학수는 말을 주로 그렸다. 이들 둘은 모두 오산학교 출신이다. 오산학교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서 살았다. 같은 기숙사에서 지내며 민족정신을 배우는 특이한 교풍의 학교였다. 이중섭의 '소'와 문학수의 '말'은 식민지 치하에서의 독특한 상징성을 보인다. 이중섭의 소는 일본 섬에서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중섭의 소는 토종 한국소이다. 한국소의 상징성, 이는 민족의식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은 스스로의 노력과 스승들로부터 받은 영향에서 나온 것이다. 

문화학원 시절 이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준 화가를 든다면, 바로 쓰다 세이슈(津田正周, 1907-1952) 였다고 한다. 김병기·이중섭·문학수 세 사람은 모두 프랑스 유학파로 자유미술가협회 창립 회원이자 한국인과 유대가 깊었던 쓰다 세이슈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관계임에도 그동안 한국근대미술사에서는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쓰다 세이슈에 연구가 진행되지 못했고, 그에 따라 참고할 정보도 거의 접하지 못했다. 단지 이중섭을 연구할 때 이중섭이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언급이 될 때에만 이름이 등장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베일에  쌓인 쓰다 세이슈에 대한 제자 김병기의 기억은 매우 귀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그에 따르면 쓰다 세이슈와의 첫 만남은 다음과 같다.
                     
“매월 기노쿠니야 화랑에서 ‘신시대 전’이 개최될 무렵이었다. 우리는 쓰다 세이슈를 거기 전시장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쓰다 세이슈는 교토 출신으로 오랫동안 프랑스 유학을 다녀왔다. 한번은 신시대 전에서 재미있는 작품을 보았다. 액자 없는 캔버스 그림이었다. 쓰다 세이슈는 직사각형의 캔버스 작품을 압정으로 그냥 붙여놓았다. 액자 없는 작품 발표 형식이 기분을 좋게 했다. 그 그림은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을 그린 것이었다. 특이한 것은 그림 속에 하늘과 땅의 경계선 구별이 없었다. 그러니까 지평선이 없는 공간이었다. 그는 수묵화의 일필휘지 기법처럼 단필로 내리긋는 선을 좋아했다. 그런 표현방법이 내게는 상당히 좋게 보였다. 내가 지금도 긋는 필선에서 쓰다 세이슈의 영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보다 문학수가 더 쓰다 세이슈의 영향을 받았다. 문학수는 쓰다 세이슈를 얼마나 존경했는가. 문학수는 쓰다 세이슈의 집 앞을 지나갈 때면 무조건 180도로 허리 굽혀 절을 했다. 말할 수 없는 존경심의 표현이었다. 이중섭은 ‘아집’이 강해 남의 영향을 받지 않는 편이었다. 문학수는 들라크루아를 좋아한다 했지만 그의 그림은 앙리 루소와 더 연결되었다. 소박한 낭만주의를 선호했다. 문학수는 프랑스 문학을 좋아해 스탕달 같은 문학은 원어로 읽을 정도였다. 분단 이후 문학수는 평양에 남았고, 이중섭은 월남했다.

해방 이전 어느 날, 쓰다 세이슈가 서울에서 전람회를 열었다. 그는 서울 반도호텔에 투숙했는데, 그림 팔아 호텔비를 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림이 팔리지 않아 호텔에 잡혀 진퇴양난에 빠졌다. 1941년 무렵이다. 할 수 없이 내가 2천달러 가까운 호텔 투숙비를 내주었다. 그리고 쓰다 세이슈 그림 4점을 받아 평양에 가서 삼촌(김건영)한테 팔기도 했다. 그때 쓰다 세이슈 부부, 문학수와 함께 종로를 걸었다. 쓰다의 부인 아리스는 벨기에 출신 모델이었다. 그는 하얀 투피스를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당시 선글라스는 ‘스파이’만 끼는 것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들은 종로 파출소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아리스가 쓰다의 부인으로 확인되어 가까스로 풀려났다. 쓰다는 아버지(김찬영) 소장의 추사 글씨를 보고, 손끝에 신경이 가 있다면서 극찬했다. 그는 전쟁 말기에 하얼빈으로 갔고, 거기서 대구 출신 화가 정점식의 보호를 받았다고 전해 들었다.”

이상의 회고는 비록 실제 작품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쓰다 세이슈가 한국 유학생들과 어떤 관계에 있었고, 한국에서도 전시회를 열었음을 알려주는 귀한 자료이다. 이를 통해 문화학원 유학생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선생은 쓰다 세이슈였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3. 쓰다 세이슈의 하얼빈에서의 정점식과의 만남

김병기의 회고대로 쓰다 세이슈는 대구 출신의 서양화가 정점식과도 인연이 있다. 정점식이 20세 초반이었던 겨울 1941년이었다. 정점식은 이후 1946년 5월 귀국할 때까지 6년간 하얼빈에서 머물게 된다. 현지에 사는 삼촌의 소개로 한 초등학교의 교사 자리를 얻어 생활하며, 틈틈이 북만주 일대의 풍경을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유화로 옮기곤 하였다. 그는 하얼빈 생활에서 비로소 새로운 예술에 대해 눈뜨고 스스로 자신만의 예술에 대한 기초를 확립한다. 특히 1944년 전쟁의 광포를 피해 그곳에 와 머물고 있던 저명한 일본인 화가와의 만남이 큰 전기가 됐다. 그가 바로 도쿄 문화학원 교수로 한국 유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쓰다 세이슈였다.

쓰다 세이슈와의 인연 속에 정점식은 자신의 예술 속에 움트고 있던 새로운 사조들 즉 표현주의와 상징주의, 초현실주의와도 맥락이 닿는 정서들을 깨닫고 논리적으로 심화시키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는 일본의 패망 소식을 듣고 그 망명지를 떠나기 전 그곳 풍물들을 스케치에 담아왔는데, 급격히 변화해가는 그의 조형적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그림들에서 느낄 수 있는 현저한 특징은 전반적인 생략과 부분적인 디테일의 강조와 같은 점에 있다. 전형적인 20세기 초 모더니즘의 양식 감각이 적용되었는데, 과거 자연을 소재로 그리던 낭만주의적 경향의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려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쓰다 세이슈와의 만남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결과일 것이다.

4. 쓰다 세이슈의 작품 <조선 풍경>의 발견

쓰다 세이슈가 문화학원에서 한국 유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는 하나 그의 작품이 전하는 것이 적어 회화적으로 영향관계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보통 회화적인 면보다는 정신적인 면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이해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도제형식이 일반화 되었던 일본의 화단 실정 상 스승의 회화 세계의 영향이 없기는 불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쓰다 세이슈의 작품에 대한 갈증은 일본 미술사뿐만 아니라 한국미술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동안은 단편적으로 전하는 작은 도판 한 두 점이 참고가 되어, 겨우 그의 작품이 품격이 높은 단정한 그림이었음을 알 수 있는 정도였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쓰다 세이슈가 그린 작품의 존재를 추적하여 왔다. 그러나 인터넷이나 잡지 또는 일본 근대미술 도록을 통해 그의 흔적을 찾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가 1941년에 한국에 와 경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문화학원 교수로 있으며 미술 활동을 안 한 것도 아닌데, 지나치게 과작인 탓에 작품의 존재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도쿄의 간다에 있는 서점을 가도 찾을 수 없고, 각 미술관을 다녀도 인터넷에 있는 조그만 사진 이상은 찾을 수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구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아 찾는 것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쓰다 세이슈의 <조선풍경>


쓰다 세이슈에 대한 관심을 미루고 한 동안 다른 분야에 관심을 두며 자료 조사를 하였다. 다른 분야라 하지만 같은 시대라 결국 그들끼리 연결되어 전체를 종합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한국 유학생들을 연구하다보니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쓰다 세이슈가 나타나곤 하였다. 그만치 그는 한국 미술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다시 그를 추적하려 책과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컴퓨터에 한동안 관심을 끊었던 '쓰다 세이슈'란 이름을 치자 첫 화면에 전에 보지 못하던 작품 한 점이 눈에 보였다. 바로 몇 달 전에 소개되었던 작품인데  쓰다 세이슈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잽싸게 주소지에 연락하여 작품을 볼 수 있느냐 물었더니 이미 개인 소장가에게 팔렸다고 한다. 색감이나 필치가 품격이 높아 보이는 작품인데, 한국 풍경을 그린 것으로 보였다. 작품을 소개한 이의 설명을 보니 제목은 <조선풍경>이고 내용은 태백산맥의 한 부분의 장면을 그린 것이라 하였다. 개인적으로 물으니 작가의 이름과 제목은 뒷면에 쓰여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1941년 한국을 방문하여 전시회를 할 당시에 그린 작품으로 추정할 만한 것이었다.

5. 쓰다 세이슈 <조선 풍경>의 내용

<조선 풍경>은 극소품으로 송판에 유채로 그린 것이다. 뒤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 너댓 봉우리가 있고, 앞 쪽으로 초가집 여섯 동이 있는 전형적인 한국 산골 마을을 그린 것이다. 갈색과 회색, 검정색 등 유사한 계열의 빛깔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그윽한 품격을 보여주는 격조 있는 작품이다. 쓰다 세이슈는 구상과 추상 작품 가리지 않고 작업을 하였는데, 화가로서의 열정을 분출하는 스타일이 아닌 마음을 지성으로 다스리며 품격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업 하는 작가였다. 제자로 가까이에서 지켜 본 김병기의 증언대로 그는 일필로 빠르게 붓을 사용하여 그리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사실 이러한 방식은 일본 서양화가들의 상당수가 사용하는 수법이다. 이는 일본인들의 전통을 중시하는 의식에서 연유한 것으로 일본 문인화의 전통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일본 근대 초기 화가들이 주로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돌아오지만 유럽의 미술 사조와는 어딘가 다른 형식의 그림을 그리는 것은 모두 이러한 전통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쓰다 세이슈 또한 이런 문인화의 정신이 내재된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풍경>은 송판에 유채로 그린 유화이다. 크기는 세로가 15.5cm, 가로 22.5cm의 소품이다. 주로 진한 갈색을 주조로 사용하여 한국의 산야를 표현하였다. 이 그림은 유화 물감을 사용하여 송판에 그렸으니 서양화라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기법으로 보자면 동양화 중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원근법에 크게 개의치 않고 뒤쪽에 배경처럼 산을 배치하고 그 앞으로 초가 몇 채를 앉힌 것이 영락없는 동양화의 산수화이다. 붓놀림도 부드러운 속필이고, 면을 칠하는 분위기는 동양화의 번짐을 보는 듯하다. 하늘 위로 산산이 흩어지는 구름의 표현이 참으로 감각적이다. 산에 비해 유난히 큰 초가나 초가집 사이에 우뚝 솟아 자리 잡은 커다란 검은 빛의 한 그루 나무는 마치 문인화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이러한 모습은 일본 근대 양화가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모습이다. 일본 근대 양화가들은 유럽에서 서양화를 배우지만 일방적인 학습에 그치지 않고 일본의 전통적인 회화와 접목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였다. 그래서 서양화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들도 일본화 형식의 그림을 겸해서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쓰다 세이슈 또한 이러한 경향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린 듯하다. 그는 매우 예민한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이 그림 속에 그의 성격이 투영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맑은 느낌을 준다. 비록 어두운 계열의 색감을 썼지만 질감이 부드럽고, 색조 또한 예민한 느낌이 든다. 

6. 쓰다 세이슈와 이중섭 작업의 연관성

쓰다 세이슈가 그린 <조선풍경> 한 점을 바탕으로 쓰다 세이슈와 이중섭의 회화적 연관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태도를 보면 일정 부분 연관성을 찾을 수도 있다. 쓰다 세이슈는 프랑스 파리에서 당시 표현주의나 미래파 등 최첨단의 미술 사조를 배웠지만, 남아 있는 그의 몇 작품을 보면 그의 미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간결한 이미지 구축과 감각적인 색채 감각이다. 이러한 의식은 일본의 전통적인 문인화의 영향 아래 구축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이중섭의 경우에도 나타난다. 그가 일본에서 배워 추구한 것은 루오와 같은 표현주의적 요소가 강한 미술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 돌아와 그린 것은 서구적 느낌이 강한 서양화가 아니라 선묘를 중시하여 인물을 그리고, 산과 나무를 중심으로 풍경화를 그린다.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인상파 형식의 풍경이 아닌 한국 전통의 문인화에서 보이는 산수화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한국적인 이미지를 단순화하여 황소나 한국적인 생명체를 그렸고, 한국인의 의식이 투영된 장면들을 포착하여 그렸다. 이러한 면에서 쓰다 세이슈와 이중섭은 닮은 면이 있다. 쓰다 세이슈의 남아있는 작품이 매우 적어 이 둘의 관계를 단정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전해지는 이야기와 남아 있는 작품의 편린만 비교해 보더라도 이 두 사람은 각각 조국의 전통을 중시하고 작품의 격조를 중시한다는 면에서 서로 닮은 점이 있다 할 것이다.



글/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18.07.19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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