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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지타 쓰구하루의 삶과 한국과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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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치타 쓰구하루의 다난한 인생

후지타 쓰구하루(藤田嗣治, 1886-1968)는 일본 태생으로 가장 높은 세계적 명성을 얻은 화가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며 '에콜 드 파리(École de Paris)'라 불리는 그룹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명이다. 일본화의 기법을 유화에 도입한 개성적인 작품을 발표하여 서양 화단의 극찬을 받았다. 특히 고양이와 여체를 잘 그렸으며, 매끄러운 화면에 세필로 그린 감각적인 필치로 유명하였다. 한 때 일본에 돌아와 서구의 선진 미술을 일본 화단에 유입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 전쟁화를 그린 문제로 전범으로 몰려 일본 화단과 등지는 어려움을 겪고 프랑스로 귀화하는 다난한 인생을 산다.


후지타 쓰구하루는 1886년 도쿄 신주쿠에서 의사의 집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육군 군의관으로 대만이나 한국 등 외지에 나가 위생 행정을 맡았으며, 육군 군의총감까지 승진한 최상위 인물이었다. 후지타 쓰구하루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을 좋아하여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다. 도쿄 고등사범학교 부속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화가가 되어 프랑스에 유학하고 싶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1905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한다. 그는 전통적인 미술보다는 새로운 미술사조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당시 일본 화단은 프랑스 유학에서 귀국한 구로다 세이키(黒田清輝) 등의 그룹에 의해 개혁이 한창이었으며, 이들이 추구하는 인상파와 빛이 넘치는 사실주의가 주를 이루었다. 후지타는 서구 미술사조의 표면적인 기술만 익히려는 수업에 실망하여 미술 이외의 부분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미술관 관람이나 여행을 자주 하였으며, 동급생들과 수업에서 빠져나와 유곽 등을 전전하는 일탈을 일삼았다. 

1910년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정력적으로 전시회 등에 출품했지만, 당시 구로다 세이키 등의 세력이 지배적이었던 문부성전람회 등에서 모두 낙선한다. 1912년 그동안 2년 정도 연애 중이던 여학교 미술교사 토키타 토미코(鴇田登美子)와 결혼한다. 당시 신혼여행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경성과 개성, 평양 등을 여행한다. 그는 귀국하여 도쿄 신주쿠에 아틀리에를 두고 열심히 작업하나 현실의 희망없는 모습에 절망을 느끼고 6월에 프랑스로 그림 유학을 떠난다. 그런데 이때 후지타 쓰구하루는 아내를 두고 혼자 파리로 떠난다. 이렇게 해서 그의 첫 번째 결혼은 일년여 만에 파탄을 맞이한다.

1913년에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의 몽파르나스에 자리를 잡는다. 당시의 몽파르나스 주변은 변두리의 신흥 지역에 불과해 집의 임대료가 싸서 예술가, 특히 화가가 많이 살고 있었다. 후지타 옆방에 살아 후에 '친구'라 부르게 되는 모딜리아니와 수틴 등과 알게 된다. 또한 그들을 통해 나중에 에콜 드 파리의 중심이 되는 파스킨, 파블로 피카소, 앙리 루소, 키슬링 등과 친분을 맺고 가까이 지낸다. 이들은 대부분 조국을 떠난 외국인들이었는데, 에꼴드 파리 그룹의 근저에 짙게 깔려 있는 애수와 표현주의적 경향은 이러한 성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들은 파리에서 가난하고 비참하게 생활하면서도 각자의 민족적 자질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특징을 보이기도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그의 이름을 '후지타 쓰구지'라고 했다. 이렇게 부른 것은 '쓰구하루(嗣治)' 라는 이름이 유럽 사람들이 읽기 어려워 프랑스에서 발음하기 쉽게 바꾼 것이다 당시 파리에는 많은 일본인 화가들이 와 있었는데 카와시마 리이치로(川島理一郎)와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 사츠마 지로하치(薩摩治郎八), 가네코 미츠하루(金子光晴) 등과 자주 교류하였다. 특히 프랑스 사교계에서 '동양의 귀공자' 불리던 사츠마 지로하치와의 교류는 후지타 쓰구하루의 경제적 지원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파리 화단은 이미 큐비즘과 초현실주의, 미래파 등 새로운 20세기 회화가 등장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구로다 세이키 류의 인상파 수법의 그림만 서양화라고 배워왔던 후지타 쓰구하루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이러한 그림의 자유로움과 분방함에 매료되어 지금까지 자신이 그려왔던 그림을 모두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훗날 자신의 저서에서 "집에 돌아가 먼저 구로다 세이키 선생님이 지정해 준 물감 박스를 던져버렸다."고 말한다.

파리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지 불과 1년 밖에 지나지 않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일본에서 송금이 끊어져 생활은 빈곤하게 되었다. 전시하에서 파리에서 그림은 팔리지 않고, 식사도 곤란하였고 추위를 이길 수 없어 그림을 태워 몸을 덥힌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생활이 2년 정도 이어졌다. 전쟁이 종국을 향하기 시작한 1917년 3월에 카페에서 만난 프랑스인 모델 페르난드 바레이(Fernande Barrey)와 두 번째 결혼을 한다. 이 무렵에 처음으로 후지타의 그림이 팔렸다. 최초의 수입은 불과 7프랑이었지만 이후 조금씩 그림이 판매되기 시작하여 3개월 만에 첫 개인전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세론 화랑에서 개최 된 첫 번째 개인전에서는 저명한 미술 평론가였던 앙드레 살몬(André Salmon)이 서문을 쓰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바로 그림도 고가에 팔리게 되었다. 이듬해 1918년에 종전을 맞이하고 전후 호황에 따라 파리에 모여 있는 많은 후원자들은 후지타에게 순풍이 되었다. 후지타는 여느 서양화가들과는 다른 화풍을 가지려 노력하였다. 일본화를 그리는 세필로 선묘를 살린 그의 독자적인 기법의 비치는 듯한 특유의 화풍이 이즈음 확립된다. 이후 그의 그림은 인기가 늘어 살롱에 낼 때마다 전시장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이러한 활동으로 살롱 도톤느의 심사 위원으로도 추천되며 빠르게 명성이 높아졌다.

점차 후지타는 당시 몽파르나스에서 경제적인 면에서도 성공을 거둔 몇 안 되는 화가가 되었다. 그만큼 성공한 동료 화가는 드물었다. 그는 뜨거운 물이 나오는 화려한 욕조가 있는 방에서 많은 모델들과 함께 사치를 즐겼다. 그 중에는 유명한 사진가 만 레이의 애인이었던 '기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후지타를 위해 누드 모델이 되어주었다. 그 중에서도 <침실의 나부>라는 제목의 작품은 1922년 살롱 도톤느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8천 프랑 이상으로 팔리는 기록을 남겼다. 이 때, 후지타는 프랑스어 철자 이름 'Foujita'에서 프랑스어로 '경박한 사람'이란 뜻의 'FouFou'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모르는 것은 없을 정도의 인기를 얻었다. 1925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벨기에에서는 레오폴드 훈장을 받았다. 두 번째 아내인 페르난도는 급격한 환경 변화에 따른 불륜 관계 끝에 이혼하였다. 얼마 후 프랑스인 여성인 뤼시 바두와 세번째 결혼을 한다. 뤼시는 교양 있는 아름다운 여성이었지만 술버릇이 나쁜 시인 로버트 데스노스와 애인 관계에 있었다. 얼마 후 이들은 이혼한다. 1931년에 새로운 애인인 마들렌을 데리고 개인전을 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개인전은 큰 성공을 이루었다. 이어 열린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전시는 6만명이 관람했을 정도로 대 성황을 이루었다. 

1933년 귀국하여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의 주임교수를 맞는다. 2년 후 1935년에는 25살 연하의 키미요(君代, 1911-2009)를 만나 첫눈에 반해 이듬해 5번째 결혼을 하여 일생 부부가 된다. 1938년부터 1년간 고이소 료헤이 등과 함께 종군 화가로 중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다 1939년에 귀국한다. 그 후 파리로 돌아왔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이듬해 독일에 점령되기 직전 파리를 떠나 다시 일본으로 귀국한다. 일본에 돌아와서는 육군미술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하게 되어 전쟁화 제작에 전념한다. 일본 정부가 국민을 격려하기 위해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도록 한 것이다. <할하 강변의 전투>나 <애투 섬 옥쇄> 등의 작품을 그린다. 큰 캔버스에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는데, 대개 100호, 200호 크기의 대작으로 전장의 잔혹함과 처참한 전쟁의 모습을 세부까지 농밀하게 그려 내고 있으며, 일반적인 전쟁화의 규모와는 다른 대작들이었다. 전쟁의 참혹함과 함께 기독교의 사상을 전쟁화 화면에 표현하려고 애를 썼다. 작품으로서는 완성도가 높은 것이었으나 종전 후에 전쟁에 협력하여 부역하였다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 그는 1949년, 전쟁 협력에 대한 비판이 점점 심해져 일본 화단의 화가들과 대립이 심해지자 염증을 느끼고 일본을 떠난다. 

후지타는 도불(渡佛) 허가를 얻으며 "화가는 그림만 그려주세요. 동료들끼리 싸움을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제 일본 화단은 국제 수준에 도달해 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파리로 이주하여 평생 일본에 돌아오지 않는다. 이후 파리에서 후지타는 "내가 일본을 버린 것은 아니다. 일본에 버려진 것이다"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그 후에도 "나라를 위해 싸우는 한 군인과 같은 심경으로 그린​​ 것인데 왜 비난받아야 하는가?"라고 수기 중에서도 한탄하고 있다. 혹자는 후지타가 육군 관련자가 많은 집안이어서 군 관계자 중에 아는 사람이 많았으며, 전후 점령군으로 온 연합군 최고사령부에서 미술 일을 담당한 미국인 담당자와도 친구였고, 또한 전후에 전쟁 협력자의 목록을 만들 때에 후지타가 앞장을 섰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상심한 후지타가 프랑스에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많은 '친구' 화가들이 세상을 떠났거나 망명하거나 이미 언론에서도 다루지 않을 정도의 취급을 당하는 좋지 않은 형편이었다. 그런 속에서 재회한 피카소와의 교제는 만년까지 계속되었다. 1955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후 일본 국적을 말소시켰다. 1957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장을 수여받고 1959년에 가톨릭 세례를 받고 '레오나르 후지타(Léonard Foujita)'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제 더 이상 좋은 작품을 남기기 힘든 상황이 된 그는 스위스 취리히로 거처를 옮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그는 1968년 1월 29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암으로 사망한다. 시신은 파리의 교외, 빌리에 르 바크르에 묻힌다. 

2. 후지타 쓰구하루의 작품 <조선 풍경>

후지타 쓰구하루가 한국을 찾은 것은 1912년과 1913년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진다. 후지타 쓰구하루는 여학교 미술교사인 토키타 토미코(鴇田登美子)와 만나 2년 정도 연애한 후 1912년 결혼한다. 당시 신혼여행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경성과 개성, 평양 등을 여행한다. 당시 후지타 쓰구하루의 아버지 후지타 쓰구아키는 육군 군의총감이라는 높은 자리에 있어 부모와 가족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 온 것으로 보인다. 이 때에도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렸다고 하나 현재 확인되는 것은 없다. 훗날 후지타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전쟁화를 그리게 되는 것도 이때의 경험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후지타 쓰구하루 <조선 풍경>


후지따 쓰구하루가 두 번째 한국을 방문한 것은 그 이듬해인 1913년 초이다. 그는 두 달 동안 머무른다. 그는 그해 6월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기로 했는데, 아버지를 만나 인사도 드리고 도불 비용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두 달 동안 한국에 머물며 많은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당시 그를 본 사람의 기억에 따르면 응접실 하나 가득 그림을 그려 놓았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일본 관리들의 도움으로 궁궐에 들어가 순종의 어진을 그리는 행사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동안 후지타 쓰구하루가 한국에 와 있을 때 그린 그림 중 전하는 것은 없어 당시 그의 그림 세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2015년 일본에서 열린 <조선을 그리다>라는 전시에 1913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작품 한 점이 출품되어 단편적으로 그의 작품 세계의 편린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조선 풍경>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작품은 지금 시모노세키 시립미술관 소장품으로 캔버스에  유채로  세로 78.1cm이고, 가로는 114.7cm 크기 60호 가량의 대폭이다. 작품 내용은 한국의 농촌 풍경인데 빛의 표현을 중시한 사실주의 기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평범한 풍경화이다. 당시 일본인들이 주로 그렸던 한국 풍경과 한국인의 생활상을 표현한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작풍이다. 강가에 인접한 농가에 한복을 입은 노인과 어린 여아가 한가롭게 있다. 당시 일제 강점이라는 암울한 시대상과는아무 연관이 없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후대 후지타를 유명하게 만든 모던한 색채는 아니나 안정된 구도에 빠른 필선으로 그린 솜씨는 타고난 화재가 있음을 인지케 한다. 특히 밝게 빛나는 광선의 처리는 당시 도교미술학교를 다니며 구로다 세이키 등 유럽에서 자연주의나 인상파 미술을 습득한 스승들의 영향이 지대함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강가의 가파를 산등성이의 성벽 같은 표현, 재빠른 붓질로 그린 좁은 길, 감각적으로 툭툭 치듯 속필로 그려 분위기를 낸 화면의 매끄러운 느낌 등은 후지타 쓰구하루가 비록 서양화를 전공하였으나 일본인 특유의 문인화적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동안 이 작품은 1912년 후지타 쓰구하루가 신혼 여행으로 아내와 경성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왔을 때 그린 것으로 전해왔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다음 해인 1913년에  두달 간 한국에 와서 많은 그림을 그렸을 때 그린 것이다. 후지타 쓰구하루가 전 해에 신혼 여행으로 왔을 때에는 그림을 그릴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았으며, 더욱이 이런 대폭의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추론이다. 오히려 다음 해 두 달간 머물렀을 때에는 많은 그림을 그렸고 큰 그림도 여러 점 그렸다고 한 기록을 보면 이 그림은 당연히 1913년 한국 방문 때 그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3. 마무리

후지타 쓰구하루의 작품 <조선 풍경>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는데 의미가 있다. 또한 그의 초기 작품의 화풍을 보여주는 중요한 그림이기도 하다. 그는 도쿄미술학교를 다니며 구로다 세이키 등으로부터 서구의 자연주의, 인상주의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는 서구의 이식문화에 불과한 이러한 사조의 매너리즘에 실망하고 직접 파리로 건너가 새로운 화풍을 수립하여 아시아 최초의 에콜드 파리의 한 멤버가 되어 파리의 화단의 중심에 선다. 

이 작품은 훗날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는 후지타 쓰구하루의 내재적 재능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그가 훗날 동양 세필로 정교한 화면의 서양화를 그려 출세한 것은 이미 학생 시절에 예민한 성격과 감각적인 촉각으로 서양화이나 동양적 색채의 화면을 자연스럽게 구성하였던 이러한 작품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후지타 쓰구하루의 학습기의 노력을 이해할 수 있는 미술사적 의미가 강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글/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18.11.14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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