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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열린 간송대전 《보화각 1938 : 간송미술관 재개관전》

-1920년대 조선 서화계에서 수집의 대상으로 여겼던 그림과 글씨

전시명 : 보화각葆華閣 1938 - 간송미술관 재개관전
장 소 : 보화각 간송미술관
기 간 : 2024.5.1~6.16
글/ 김진녕

간송미술관의 재개관 특별전 <보화각 1938 : 간송미술관 재개관전>(5.1-6.16>이 열리고 있다. 지난 2022년 4월 수장고 완공 기념 전시인 <보화수보>전이 열리고 난 뒤 2년 만에 처음으로 여는 전시이자 2014년 10월 <추사정화>전 이후 성북동 보화각에서 ‘정기 기획전시’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첫 전시이다.

간송미술관 보화각은 2019년 12월 국가등록문화재가 됐다. 이후 정부의 재정지원으로 수장고가 지어졌고 이를 기념해 <보화수보>전이 열렸다. 그때 간송미술관쪽에선 <보화수보>전이 끝난 뒤 해마다 봄, 여름에 열리던 간송대전의 전시관으로 쓰이는 보화각의 보수공사에 들어간다고 밝혔었다. 이번 <보화각 1938>은 보화각 보수 공사가 끝났음을 알리는 전시인 것이다.


보수공사로 달라진 점이 있다면 건물입구 반대쪽에 철골지지대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점을 꼽을 수 있다. 이 시설도 1938년에 완공된 보화각 본체의 설계변경 없이, 외부에서 부착된 부속시설 개념으로 시공했다. 이 승강기를 설치함에 따라 휠체어 이용자도 보화각 전시를 즐길 수 있게 됐다. 2층에 둥글게 돌출된 썬룸도 간송 전형필 생전의 모습으로 복원됐다고 한다. 승강기를 설치했지만 내부 전시면적을 건드리지 않는 방법으로 해결했고 나머지는 최대한 원형에 가까운 ‘복원’을 고수한 것으로 보인다. 창틀도 기존의 것을 그대로 고수했다.

전시 내용은 제목에 나와있듯 보화각이 완공된 시점을 전후해 간송컬렉션의 진행 상황과 발굴된 보화각 건설 도면 등 1936-38년의 일제강점기 시절의 서화계 분위기와 컬렉션의 흐름 등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으로 꾸며졌다.


출품작은 47건, 102점으로 대부분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1층에는 보화각 건물의 설계자인 박길룡이 맡아 완성시킨 보화각을 포함한 ‘북단장’ 건물 전체의 설계도가 전시장을 채우고 있다. 보화각 전시에 처음으로 인터랙티브 디스플레이어가 북단장의 정문 설계도부터 차고와 창고, 보화각 등 북단장의 모든 시설물을 보여준다.

북단장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보화각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선잠단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다. 1934년 29세의 전형필은 성북동 선잠단 북쪽, 동남향으로 얕게 솟은 땅에 자리잡고 있던 프랑스 출신 석유상 폴 앙투안 플레장이 지은 프랑스식 양관 건물과 인근 땅을 사들였다. 이 건물은 지금도 ‘플레장 양관’으로 불리고 있다. 전형필은 여기에 수장하고 있던 서화를 위해 보화각을 짓기 위해 한국의 1세대 건축가인 박길룡에게 설계 감독 업무를 맡겼다. 그때 설계 감독 대금으로 전형필이 지불한 돈은 1500원이라고 한다. 기와집 한 채에 1000원 하던 시절이다.

전시장에는 박길룡의 설계도면과 진열장 스케치, 건물에 시공된 대리석 샘플 등 보화각이라는 하드웨어를 완공하기 위한 전형필의 모든 노력이 전시됐다. 아울러 전형필 컬렉션의 가이드 노릇을 했던 서화가 오세창(1864-1953)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보화각’과 ‘북단장’의 전서 현액이 걸려있다. 북단장과 보화각은 오세창의 작명 솜씨라고 한다. 오세창은 8대에 걸쳐 역관 노릇을 한 중인 출신이다. 중인 출신의 재력가들은 18-19세기 조선 후기 서화계에서 후원자이자 소비자로 문화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세창의 아버지인 오경석도 추사 김정희의 문인 출신이었고, 오경석의 컬렉션이 오세창에게 이어져 일제강점기에 오세창은 서예가이자, 감식가, 컬렉터로 이름을 얻었고 간송컬렉션은 오세창의 ‘감식안’이 투영돼 있다.

전시장에는 오세창과 동세대 인물이자 중인 출신으로 그 시절 서화가로 이름을 날린 이한복과 김태석이 쓴 ‘북단장’ 글씨도 걸려있다.

2층 전시장에는 본격적인 서화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장 들머리에는 1936-38년 전형필이 작성한 ‘일기대장’이 놓여있다. 언제 얼마를 들여 서화를 샀는지 적어놓은 것이다. 전형필은 후원하던 한남서림의 대표 백두용이 1935년 사망하자 1936년 2월 한남서림을 사들였다. 한남서림은 전형필의 수장품 매입창구로 활용됐다. 이 시기의 작품 구입기록이 전시된 것이고 이는 이번 전시의 도록인 <간송문화> 94호에 상세히 실려있다.



이번 전시에서 크기가 제일 큰 작품은 <축수서화 12폭 병풍>이다. 1922년 5월 71세 생일을 맞은 당시 친일파의 거두 민영휘(1852-1935)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면서 김용진, 윤용구, 지운영, 김돈희, 이도영, 정대유, 심인섭, 오세창, 민형식(閔衡植 1875-1947, 민영휘의 양자) 등 12명의 문인이 축하 용도의 글씨와 그림을 한 폭씩 제작한 작품이다.


김용진 외 <축수서화 12폭 병풍>


애초 이 작품은 병풍이 아닌 낱폭으로 보관돼 있었고 각 폭마다 일련 번호가 붙어있어서 원래의 형태인 병풍 한 틀로 다시 꾸몄다고 한다. 민영휘는 천하가 다 아는 친일파였고, 김돈희는 1910년 한일병탄조약문을 썼고 1922년에는 제4대 서회협회장에 취임한 당대 최고의 서예 실력자였다. 열두 폭의 맨마지막을 장식한 민형식은 양부의 친일행각에 죄책감을 느끼고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인물로 판명이 났다. 하지만 102년 전인 1922년 민영휘는 당대 식민지 조선 최고의 재벌이자 일본 황실에서 자작 작위를 받은 관계의 실력자였다. 여기에 참여한 11명의 서화가가 1920년대 조선 최고의 서화가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전형필도 기꺼이 이 유물을 수집하지 않았을까.

1915년 서화미술회에서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그림을 배우고 1920년 창덕궁 벽화제작에 참여하는 등 조선 화원의 맥에 닿아있던 심산 노수현(1899∼1978)은 1920년대 이후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였다.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실물이 공개된 <추협고촌秋峽孤村>은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으로 물기를 머금은 붓질과 안개를 강조한 구도 등 당시 일본풍 회화의 유행을 느낄 수 있다. 김경원(1901-1967)의 꽃과 새그림 두 점도 윤곽선을 쓰지 않는 채색 몰골법을 활용하는 등 1920-30년대에 국내에 유입됐던 일본풍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노수현 <추협고촌> 1930년, 지본수묵, 168.5x88.7cm


이외에 1887년 주미공사수행원으로, 화가로는 처음 미국에 건너가 현지 풍경을 그린 구한말 대한제국주미공사관원 강진희(1851-1919)의 산수화 ‘화차분별도’는 기차가 처음으로 등장한 국내 그림이다. 이 작품이 실려있는 ‘미사묵연 화초청운잡화합벽첩’에는 강진희와 교분을 나눈 청나라 주미공사관원 팽광예의 작품이 실려있고, 이번 전시 8면 모두 공개하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 나비 그림의 대가로 꼽히던 남계우(1811-1888)이 나비그림과 그의 제자 고진승(1822- ?)의 나비 그림이 나란히 전시되고 있다. 기록만 전해지던 고진승의 나비 그림을 처음으로 실견할 수 있는 전시이기도 하다.


고진승의 나비 그림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귀히 여겼거나 인기를 끌던 글씨와 그림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당대의 수집품으로 풀어낸 전시인 <보화각 1938>전이 6월에 끝나면 가을에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품의 전용 쇼룸인 대구 간송미술관이 문을 연다.

간송미술관의 운영주체인 간송미술문화재단은 대구의 쇼룸 개관 이후에도 보화각에서 여는 봄 가을 정기 전시를 지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간송미술관은 간송의 3세가 운영 전반에 등장하기 시작한 2000년대 이후 미술관 등록을 통해 정부 지원 수용, 대구 간송미술관 개관, 소장품 일부 매각 등 큰 변화가 있었고 이 와중에 한국 미술계의 루틴으로 자리잡았던 봄 가을 정기 ‘간송대전’이 한동안 사라졌다. 보화각의 ‘간송 대전’이 다시 루틴으로 자리잡을지 주목할 일이다.
업데이트 2024.05.08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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