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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번수의 50년의 무언극, 74년의 인생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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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한국현대미술작가 시리즈 <송번수_50년의 무언극>
장 소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기 간 : 2017년 3월 10일 ~ 2017년 6월 18일
글/ 김진녕

송번수 작가에게 듣는 '무언극' 그 전후의 이야기  






□ 떠도는 아이  
내가 1943년 생이다, 공주에서 태어났다. 4살 때이던 1946년에 어머니가 여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셨다. 그때는 2차 대전 끝나고 얼마 안됐던 때라 우리나라 의료가 낙후돼 있었다. 얼마 뒤에 새엄마가 들어왔다.
초등학교는 공주여자사범대(현 공주교육대학) 부속국민학교에 입학(1949년)했다. 그 학교는 분위기가 참 좋았다.
아버지가 양조장 기술자였다. 아버지가 서대전양조장으로 일터를 옮겨 가면서 나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사가면서 4학년 때 대전 대흥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다.
전학 가기 전 학교에선 계속 반장을 했는데, 그게 참 묘한 것이더라. 대전으로 오니까, 내가 앞에서 늘 ‘앞으로 나란히’를 외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 열 속에 있으니까, 이게 아닌 것 같더라.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때부터 성적이 떨어졌다. 학교를 안나갔으니까.
대개 학교 끝나면 집에 가고 싶어하는데 나는 가기 싫었다. 누가 맞아주지도 않고.
집과의 연대감이나 유대감 같은 게 없어지더라. 사랑을 느끼는 게 없어졌다.
그래서 대전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 집에는 학교 간다고 하고, 한 달 간을 서울역에서 놀다가 가기도 했다. 내가 그때 어느 정도 못됐냐하면, 집에서 나와서 동네 골목 담벼락 사이에 틈이 있는데 거기에 책가방을 푹 찔러 넣고 대전역으로 갔다. 당시 대전 역에는 슈사인 보이가 있지 않나, 걔네들이 물 떠오라면 물 떠오고. 그렇게 한 달을 지냈다. 집에 갈때는 다시 가방 꺼내 가고. 그렇다고 주먹세계에 물든 것은 아니었다. 학교 가지 않고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슈샤인보이와는 가까웠지만.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집에 갈 때는 내가 스스로 숙제까지 내서 가니, 집에서는 내가 멀쩡하게 학교 다니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날, 대전역 광장을 사람들이 빗자루로 쓸고 물을 뿌리더라. 물어보니까. 도지사가 여기서 기차를 타고 간다더라. ‘도지사가 오니까 이러네, 그러면 내가 도지사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지사를 하려면 어린 마음에도 ‘여기서 내가 슈사인 보이하고 있으면 안되지’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그 이튿날부터 학교를 다시 나갔다. 그게 5학년 때 일이다.
내가 고집이 센 아이였다. 학교가 나와 영 안맞기도 하고 집도 자주 나오고 그랬다. 아버지는 좀 이해를 했다. ‘어미가 없으니까 그런가 보다’하고 이해를 해주시는 편이었던 듯하다.

□ 화가의 꿈
다시 학교에 다니면서 집에 늦게 들어갈 구실을 찾다 보니 미술반이 제일 유리하더라. 미술반은 남아서 야외 스케치를 하고 그러니까 집에 늦게 가도 됐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동네 기와집을 그렸는데, 주변에서 ‘어린애가 이렇게 그림을 잘그린다’, ‘저놈이 이 기와집을 그렸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그때 내가 그림에 소질이 있나보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돌아보니 그 칭찬이 이 길을 걷게 된 동기였다.
초등학교 시절이 그랬으니 공부가 제대로 됐겠나.
중학교도 대전 한밭중의 야간반에 들어갔다(1955년). 성적이 안 되니까.
고등학교는 대전상고로 갔다. 아버지가 은행원이라도 돼야 밥벌이를 한다고 상고진학을 권했다.

내가 독립심이나 추진력이 있다. 아버지는 미술에 관심도 없고, 환쟁이 짓이라면 반대를 했다. 밥 굶는다고. 내가 갈 길은 내가 헤치고 가야지, 방법이 없으니까. 거기서 미술반을 만들어서 미술 공부를 계속했다.
그렇게 고3이 되고 실기준비를 해야 하지 않나. 그때 미대 입시 과목에는 목탄 데생이 포함돼 있었다. 그때 ‘목탄으로 그린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다. ‘목탄은 숯’이란 생각이 들어서 참숯을 구해다가 쪼개서 그리는데 종이가 찢어지더라.
내게 미술선생이 없으니까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대전상고와 같은 재단에 연관된 학교로 대전동중이 있었다. 거기에는 미술 선생이 있었다. 조영동이란 선생님으로 서울대를 막 졸업하고 내려온 분이었다. 거기에 막무가내로 찾아갔다. 갔더니 목탄이 근사한 게 있더라.
그 선생님한테 데생을 배우기 시작했다. 막무가내로 가르쳐달라고 조른 것이었다. 그러자 조 선생님이 “너 여름방학하면 미술반으로 와라. 거기서 그려야 한다. 줄리앙하고 아그리파가 거기 있다”고 말씀하셔서 그때 처음으로 입시용 미술을 배웠다.
 
□ 대학시절
1961년에 홍익대 공예학과에 입학했다.
한 학기 등록금과 입학금으로 6800원을 내고 들어갔다. 그때는 1000원이 굉장한 돈이었다.
1962년에 에칭프레스가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됐다.
차관으로 들여온 것이었다. 하나는 홍대에, 하나는 이대에 설치됐다. 그걸 들여놓는 날 지도교수 유강렬 선생이 좋아하시던 표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때는 판화과가 따로 없었고 공예과에서 판화를 가르쳤다. 나는 졸업작품전에 에칭을 냈다.
그때 홍대 미대 학장이던 김환기 선생은 1963년 학장직을 그만두고 뉴욕으로 갔다. 수화에 이어 학장을 한 이가 이마동 선생이다.
입학 동기들 중 지금까지 작업하는 이는 없다. 공예가 출신들이 대개 졸업 뒤에 작업을 이어가지 못했던 것 같다.
공예과에서는 도자기와 염색, 금속, 목칠 이렇게 네 가지 전공이 있었다. 나는 염색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3학년 때는 도자기를 배워서 국전(12회)에 출품한 <작품C>로 입선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도자는 청자 백자 본 차이나 가릴 것 없이 다 배웠다. 그때 배운 것으로 교수가 된 뒤 도자기하는 제자도 가르쳤다.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나와서 작업을 하는데, 그 1년 동안 배운 도자기 기법이 아주 유용하게 쓰이더라. 도자기 제조법 중 일본말로 ‘이꼬미(鋳込み)’라는 게 있다. 일종의 주물 기법이다. 도자기를 손으로만 빚는 게 아니다. 틀을 만들어서 흙물을 부어서 5분 정도 나뒀다가 흙물을 쏟아내면 그게 굳어서 그대로 컵이 된다. 그걸 이꼬미 기법이라고 하는데 그런 기법이 세상에 나와 보니까 큰 힘이 되더라. 그 기법을 응용해서 내 작업을 하는데 아주 유용하게 썼다. 내 작업에 그 기법이 응용되는 데가 많았다.
염색도 작업에 큰 도움이 됐다. 타피스트리에서는 염색을 몰라서는 안 된다. 표현하려는 색으로 실을 염색해야 짤 수 있으니까.

공예과에는 공업디자인이라는 과목도 있었다. 일종의 설계과로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미대 교수들이 일본서 ‘조금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 제대로 공부하고 온 교수도 있었지만 대개는 다 만석꾼의 자식으로 ‘일본에 유학갔다’는 경력이 있는 정도였다. 그때는 졸업장이 제대로 없어도 ‘유학’을 다녀오면 교수로 임용되는 분위기도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나상기씨라고, 미국서 공부하고 온 교수가 있었다. 그때는 컴퓨터도 없고 T자와 삼각자만 있던 시절이다. 이 분은 미국에서 인치로 공부하고 온 분이라 수업 시간에 ‘투앤하프 인치’이런 식으로 가르치던 게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그때 공업디자인 설계수업은 한 학기 동안 재떨이하고 큰 접시 같은 것 그리고 끝났다.

(송번수는 1965년 2월 홍익대 공예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군입대를 해 포병으로 복무했고 1967년 제대했다. 포병 경험은 그의 판화 ‘화집점’ 시리즈의 소재로 활용됐고 1969년 한국판화가협회가 주최한 제1회 한국판화전에서 <화집점L/A 304>로 대상을 수상했다. 그는 “포병으로서 군대 경험이 강렬했다”고 말했다. 1972년에는 제2회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 <판토마임> 연작으로 대상을 수상하고 1973년엔 제12회 상파울로비엔날레에 <공습경보>로 참여했다.)
 
□ 취직과 유학
1970년에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이 열렸고 그 해 대상은 김환기 선생(상금 100만원)이 받았고, 나는 판화 분과 최고상인 우수상(상금 50만원)을 받았다.
그해에 첫 직장에 들어갔다. 지금 공릉에 과학기술대라고 있다. 그 학교의 전신이 국립 경기공업전문대인데 예전에는 아현동에 있었다. 1970년에 그 학교의 전임강사로 임용됐다. 거기서 전임으로 일하면서 대학원 과정을 밟았다.
내가 2회 동아 국제판화비엔날레(1972년)에서 대상을 탔는데 그것도 미국 심사위원이 와서 대상 탔지, 그렇지 않았으면 못 탔을 것이다. 그 사람이 내 작품에 상 주자고 해서 된 것으로 들었다. 그 작품은 스테인리스 위에다 실크 스크린으로 찍은 것이었다. 그 때는 국내에선 판화는 종이에만 찍는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1982년 전시 포스터

조교수가 된 뒤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유학을 갔다. 그때가 1977년이었다.
그때는 그야말로, ‘유학발’이란 게 큰 효과를 내던 때였다. 유학파가 거의 없었던 시기라 파리에 가서 몇 달만 놀고 와도, ‘파리에 다녀왔다’는 인증만으로도 수지맞는 일이었다.
문제는 해외로 나가는 여권 발급이 힘들었다는 점이다. 단수여권인데도 한번 발급받으려면 스무 가지 서류가 필요했다. 이거 다 만들어서 제출하고도 외국 나가기 전에 태릉에 있던 중앙정보부에 가서 8시간 동안 사상교육을 받아야 해외에 나갈 수 있는 여권을 받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여권을 받았을 때, 참 감동적이었다.
당시에는 와이프와 어려서 잃은 큰 아들, 딸 아이가 있었지만 가족을 놔두고 나혼자만 나갔다. 다녀오면 좋은 직장이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 교수직 사표까지 내고 나간다고 하니 나보고 다 미친 놈이라고 했다. 그때 내 월급이 5만원 정도였고 그 정도면 나쁘지는 않았다. 우리 GNP가 그때 600달러 정도였다. 그런데도 나는 꼭 나가고 싶었다.
 
전임이 돼서 첫 직장에 출근했더니 수업이 끝나면 교수라고 불리는 동료들이 당구장에 가서 당구치고, 굴레방다리 가서 술 한 잔씩 하고 가더라. 우선 나는 그게 싫었다. ‘대학 사회가 이런 것이라면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집에 가서 작업도 해야 하는데 사회가 어디 그런가, 나만 외톨이로 맨날 빠질 수도 없고. (당구장에)가면 나는 당구도 못치고, 카운터 담당이지 뭐, 맨날….
내가 판화를 무지 무지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날 미로의 석판화를 봤다. ‘와, 어떻게 이런 이 자유분방한 터치가 판화에!’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이걸 해야지, 저이들과 같이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직장 동료들은 ‘선생이 인생의 목표였구나’란 생각이 들고 내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되겠구나란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석판화 배우러 갈 결심을 굳혔다.

그런데 돈이 있어야지. 프랑스 갈 때 내 판화 수 십 점을 갖고 갔다. 딴에는 이걸 팔아서 학비를 보충할 생각이었다. 그걸 들고 현지 화랑에 갔더니 내가 교과서에서 본 작품만 턱턱 걸려 있더라. 그 네임 밸류가…. 내 판화는 크지도 않게 만든 것이고. 도저히 못 내놓겠더라.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때 파리에서 활동하던 김창렬 선생이 ‘내가 조수가 필요한데, 월화수만 와서 일하고. 아르바이트하면서 다녀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때는 유학생은 노동허가증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할 때였다. 그래서 김 화백 화실에 가서 일하고 월 300달러를 받았다.
그걸 프랑으로 바꾸면 1500프랑이었다. 그 중 750프랑을 7층 다락방 월세로 내고 버텼다.
그렇게 일 년 동안 지내다 보니 내가 집에 가서 한 500만원만 가져오면 내가 파리에서 오래 버티면서 공부하고 작업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돈을 융통해서 다시 갈 생각에 들어와 보니까 애들 둘을 데리고 마누라가 살겠다고, 이 여자도 배운 게 없으니까 김치장사를 하고 있었다. 대학 시절 친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 장인이 동부이촌동에서 슈퍼마켓을 하는데, 거기 반찬 코너서 김치를 팔았다. 김치가 좀 무겁나. 집에서 담가 매일 가져가더라. 그 친구 나름으로는 배려를 한 것이다.
그걸 눈으로 보고, 170만 원짜리 전셋집에 살고 있었는데 500만원을 어떻게 가져가나. 그래서 여권 찢어버리고 눌러앉았다. 파리에서 서울 올 때 거기 짐은 다싸서 정상화씨 방에 맡겨놓고, ‘잠깐 다녀온다’고 맡기고 그러고 왔는데….
정상화씨가 참 좋은 분이었다. 그 분과 스토리가 참 많았다.
 
파리로 유학가기 전에는 작업에 사회에서 일어난 부조리 고발에 상당히 주안점을 뒀다.
그때 사람들이 나를 장미 작가로 불렀다. 목판할 때. 그때 장미 그 자체가 한국 민주주의의 심볼이었다. 그때가 박정희 시대라 잘못하면 얻어맞으니까, 은유법으로 시대를 기록하고 고발한 것이다.
사실 꽃그림을 많이 한 것은 아니다. 박정희 시대가 끝난 뒤에는 꽃그림에 머물 수도 없었다.
그래도 내가 목판화로 장미 작업을 해서 현대화랑에서 전시(1978년)하고 박명자(현대화랑 회장)가 500만원 만들어줘서 집 사는 데 보태줬다. 고맙지. 그때 생각하면.
그때 750만원 주고 부암동 백사실의, 지금 서울미술관 건너편쪽에 국민주택을 샀다. 거기가 그때만 해도 소풍코스였다. 조용하고.
(그 무렵부터 그는 장미에서 꽃을 떼내고 가시라는 주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송번수는 파리에서 파리국립미술학교의 석판화 수업과 파리 그라픽아트 기술학교에서 실크 스크린 기법을 수학했다.)
 
□ 홍익대 교수
파리에서 딱 돌아오니까, 세상이 또 무섭다고 느껴졌다. 이젠 내가 경계 대상이 되더라.
‘저 놈이 돌아오면 내가 불리해진다’는 식의 방어, ‘쟤는 파리에서 돌아온 유학자’라며 가까이 하는 척하면서 밀어내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그들이 나를 홍익공전으로 밀어붙이더라.(1978년 홍익공전 부교수 임용)
그래서 홍익공전으로 갔는데, 그러자마자 박정희 시해사건이 일어났다.(1979년 10월26일)
학교에서는 애들이 매일 데모하고 난리가 났다.
은사인 유강렬 선생이 내가 파리로 가기 전 해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는데 그때가 은사가 돌아가고 삼 년이 지났는데도 홍익대에 전임 교수를 뽑지 않고 있었다. 내가 돌아오고 난 뒤에도 공석이었고 그때 그때 강사를 써서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학생들이 나를 원했다. 학생들이 이와 관련해 데모도 하고 그랬다. 내가 그래서 홍익공전에서 홍익대로 입성하게 된다.(1980년)
그때는 염직과 교수로 임용됐다. 판화과는 내가 들어가서 조금 있다가 생겼다.
유강렬 선생님도 제자가 꽤 많았지만 내가 재학시절부터 여기저기 상을 많이 타면서 두각을 나타냈었다. 판화로 신인예술상(1964년 문화공보부 주최 제3회 신인예술상 수석상)도 타고, 수상 경력이 많았다. 유 선생님이 살아계셨더라도 내가 임용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홍익대 교수가 되면서 80년대 초 섬유미술의 붐을 일으켰다. 내가 제자 31명을 교수로 만들었다. 대부분 섬유예술과 교수다. 아마 기록일 것이다. 그때 섬유예술과는 서울대에 없었을 때다.
내가 2008년에 정년 퇴직을 했는데 재직기간 동안 매해 한 명 이상씩 교수를 만든 셈이다. 그 부분에 대해선 내가 전적으로 뛰었다. 그래서 가능했다. 어디에서 임용 준비를 한다는 얘기가 나오면 내가 직접 가서 그 학교 학장과 학과장을 만나서 직접 얘기했다.
경기도에 S대학이 생길 때 얘기다. 그 학교에 임용 공고가 나오고 추천서 써달라는 제자가 3명이었다. 그래서 일단 세 사람을 다 써주고 내가 직접 그 학교를 갔다.
학교에 갔더니 아직 개강 전이라 올라가는 길이 포장이 안 돼있고 땅이 곤죽이었다. 그길을 걸어올라가니 진흙이 들러붙어 구두가 머리보다 커졌다. 화장실에 가서 적당히 흙을 닦아내고 학장실을 노크했다.
그 학교 학장이 정 아무개씨로 법을 공부한 분이었다. 내가 홍대 교수라고 소개하고 ‘내 제자 3명이 이 대학에 원서를 냈는데 그 중에 이 친구가 제일 낫다. 다른 대학에서도 지원자가 많이 왔겠지만 선택을 잘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렇게 추천한 제자가 임용이 됐고 이어 그 제자가 동문을 또 추천해 홍대 출신이 그 학교에 3명이나 임용이 됐다.
그 학교에 동시에 지원서를 냈던 다른 두 명도 모두 다른 학교에 임용이 되도록 도왔다. 그렇게 31명의 교수를 만들었다. 그 중 나보다 먼저 간 놈도 벌써 5명이나 된다.
 
□ 정년 퇴직과 후반전
마무리도 참 중요하다. 60세부터는 빨리 정년 퇴직하고 싶었다. 경제적으로도 쪼들리는 것도 없이 안정적인 상태가 되니까 내 마음대로 내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근데 ‘유종의 미’를 거두라고 선배들이 말을 했다. 그래서 정년을 꾸역꾸역 챙긴 뒤 ‘제대’했다.
정년 퇴직 후에 작품을 많이 했다. 대작도 많이 하고. 2008년 이후에도 대작을 많이 제작했다.
 
□ 미술행정가의 경험
정년 퇴임을 한 뒤 2009년 대전시립미술관장으로 1년 정도 일했다.
그쪽에서 여러번 찾아왔다. ‘안 간다’고 했는데, '시장님에게도 다 보고했다'고 새벽에도 찾아왔다. 내가 대전으로 내려가면 여기 차려놓은 미술관(마가미술관)은 누가 돌보나. 그래서 와이프에게 여기를 맡기고 혼자 내려갔다. 아침 밥 끓여먹고 와이셔츠 빨아입고 다니는 게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공무원 생활을 해봤나. 시의회 같은 데서 봄가을로 당하는 수모감도 크고. 내가 말하려고 일어서면 국장이 말리고, ‘이러시면 안된다’고. 그들이 하도 무식한 말을 해서…. ‘내가 여기에 뭐하러 있나’라는 생각만 들었다.
내려가서 미술관을 보는 순간 면사무소 느낌이 들었다. 복도에 걸린 팻말이 호적등본 떼러 간 느낌이었다. 게다가 전시장에 갔더니 반듯해야 할 전시벽면에 5미터에 하나씩 화재발생시 불끄는 설비가 툭툭 튀어나와 있었다. 시설팀에 물어보니 법규에 나온 것이라 절대 손댈 수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서울시립미술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봤냐. 거기도 벽면에 이런 게 나와있느냐’고 물었지만 손댈 수 없다는 말만 하더라. 그걸 바꾸는 방법은 이 미술관에 불이 나던지 전체 리노베이션을 해야했다. 그게 비용만 20억원이 들었다.
그래서 그 비용을 올렸더니 0이 돼서 내려왔다.

그때 대전상고 출신 후배가 시의회 의원이 있었다. 시바스 리걸 21년산을 하나 들고 중국집으로 그 후배를 불렀다, ‘내가 관장으로 일하는데 이걸 하려고 예산을 올렸는데 빵으로 내려왔다. 도모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랬더니 이걸 10억 원으로 만들어주더라. 시의원이 대단하긴 하더라. 너무 고마웠다. 미술관 개보수 예산이 0원에서 10억원으로 바뀌니까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나머지 10억 원은 추경으로 해결하고, 그렇게 20억원을 만들어놓고 퇴직했다.
내가 직접 그 돈으로 미술관 개보수 작업을 완성했어야 했는데, 나는 마가미술관으로 얼른 돌아오고 싶어서 아내가 아프다고 사정사정해서 사표가 수리됐다. 1년 3개월만이었다. 나중에 가보니 그 튀어나온 부분은 그래도 고쳤더라.

□ 30~40대 후배에게
내가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예체능계는 금메달만 조명을 받는다. 은메달도 대접 못받는다. 정경화 하나 보고 오스트리아가서 수 억 원 버리고 오는데, 그건 나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우리 때는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아야 팔자를 고쳤다. 대학교수도 되고, 시스템에 편입된다. 그러면 이후엔 제 마음대로 해도 되고.
지금은 해외유학 다녀왔다고 해도 시간 강사 자리도 어렵다. 유학 갔다와서 좋은 시절 누린 것은 우리 때가 최고였다. 80년대 초반까지는 유학 경력이 먹혔지만. 이후는 유학 다녀와도 천덕꾸러기다. 시선을 못받았다.
ooo 선생도 파리에 3개월 다녀온 이후 구라가 얼마나 셌나. 내가 실제 가보니 다 거짓말이더라.(웃음) 이 구라쟁이.
미대 나와서 전업 작가를 한다고 해도 밥먹을 수 있는 환경이 되야 전업작가도 하는 것이지, 그게 해결이 안되면 전업작가가 될 수 있나. 외국에 나간다해도 더 나을 것은 없다. 더 힘들지. 거기 간다고 이튿날부터 아티스트로 부각되고 그림이 팔리나.
해외에서 활동하던 작가가 다시 들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왜 다시 왔겠나. 그 분들도 거기서도 힘들었을 것이다.
미술대학 졸업한 사람 중 내 나이되도록 작업하는 사람이 누가 있나. 공예과 나온 이들 중 교단에 섰던 이를 포함해 내 또래에 작업 계속하는 이가 없다. 선생하던 사람도 선생 끝나니까 노인네가 되버린다. 정년을 하면 뭔가 손을 놔야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내가 정년 퇴직할 무렵에도 미술계에 동기가 없었다. 나는 선생이 되기 위해서 공부한 것도 아니고 선생이 인생 최고의 목표도 아니었다.
나는 작가라는 의식이 교수보다 더 컸다. 그래서 경기공전 교수 그만두고 유학 간 것이다.
비웃음을 받으면서 간 것이다.
 
□ 작업 단상-타피스트리
타피스트리를 처음 시작할 때는 그라데이션 기법이 어려워서 못 한다. 그래서 맨날 면 구성으로 한다. 쉬우니까, (마가미술관에 걸린 초기작을 예로 들며)검은색으로 죽 짜올라가다가 빨간실로 짜는 식이다.
그라데이션 기법이 손이 많이 간다. 실 자체로 그라데이션을 만들어 씨줄 날줄로 엮은 것이다. 연사라는 게 실을 섞어서 만드는 것이다. 검정실 하나에 흰실 9개. 검정실 두 개에 흰실 8개 … 이런 식으로 하면 명도가 달라지고 그렇게 그라데이션을 만든다. 그래서 타피스트리가 힘든 것이다. 가르쳐줘도 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다 핸드메이드다.
이젠 노안도 생기고 몸도 힘들어서 타피스트리 작업을 하기 힘들다.


상대성원리


<나의 광기>(1986년) 같은 작품은 보라색과 청색 등 보색 관계를 일부러 썼다. 내 아들 죽고 만든 것이라 나의 심란한 마음을 반영한 것이다.(송 작가의 큰 아들은 1981년 9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 이듬해 그는 둘째 아들을 얻었다.)
이후 그라데이션 기법을 터득하면서 2001년에 ‘헝가리 개국 천년기념 국제타피스트리 공모전’에 가시를 표현한 타피스트리 작업 <절망과 가능성>(1998)과 <논리와 이성>(1998) 두 점을 출품해 그랑프리를 탔다.
상을 타러 헝가리에 갔는데 시상식이 헝가리 대통령과 만찬 자리로 이어졌다.
그때 밥먹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그 건물 대들보에 ‘ARS LONGA VITA BREVIS’라는 글귀가 보였다. 알아보니 그 뜻이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란 말이었다.
그말이 가슴에 남았다. 그래서 돌아가면 저걸로 작업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돌아와서 타피스트리로 가시를 접시 위에 올린 ‘예술가의 만찬’ 시리즈(2001~2002)를 작업했다. 예술가가 씹어먹어야 하는 만찬이, 나는 가시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문구는 마가미술관 현관 벽에도 새겼다.


마가미술관 현관



미완의 면류관


내가 다니는 능평성당에 타피스트리 작품 <미완의 면류관>(2002년)을 제대에 봉헌하기도 했다. 나는 매주 가서 본다. 3년에 한 번 정도는 내가 먼지를 털기도 한다. 이건 천이니까 빨 수도 있지만, 먼지만 털어준다.
내가 그 무렵에 타피스트리 작업을 많이 했지만 내 작업의 본류가 타피스트리나 판화 어느 한 쪽이라고 말하기 애매하다. 다만 작품이 던지는 에너지가 타피스트리가 강한 것은 사실이다. 대형이라서 더 그런 듯 하다. 대형이라는 점 때문에 타피스트리 작업을 개인이 사간 것은 석 점 정도 밖에 안된다. 한전이나 안양시에 간 것은 공공프로젝트로 진행한 것이고 부산시립미술관이나 대전시립미술관, 인천지방검찰청은 다 공공기관에 들어간 것이니까.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 초입에 걸린 <조국의 여명>(2016년)은 최근작이다.
작년 말부터 박근혜 탄핵으로 어수선하지 않았나. 우리 역사를 보면 우리에게 태평성세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우리한테도 여명이 왔으면 좋겠다는 나의 기도를 담았다. 기도!
 
□ 작업단상-판화
일본의 판화가 상당히 진지하다. 내용이나 제작과정이나 기법, 작가의 스피릿이 진지하다. 에디션을 남발하지도 않고 판화가 굉장히 존중받는다.
우리는 판화의 위상이 땅에 떨어졌다.
유명 작가가 어디에 맡겨서 인쇄한 것에 사인해서 팔기도 하고 유가족이 나서서 사후 에디션을 만들기도 하고. 너무 그렇게 하다 보니까 판화의 격이 떨어져 버리는 부작용이 생겼다.
이번 전시장 끄트머리에 내가 일부러 내 얼굴이 없어지는 과정을 담은 자화상 판화 넉 점을 걸었다. 그게 ‘캔슬레이션 프루프’라는 것이다.

 
폐쇄증명


요즘은 ‘폐쇄 증명(cancelation proof)’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사실 목판이든 석판이든 이게 다 있어야 하는 것이다. 100/100으로 끝나면 캔슬레이션 프루프 장면이 꼭 있어야 한다.
판화에는 이게 꼭 있어야 한다. 내가 교육용으로 일부러 거기에 건 것이다.
나는 원판이 폐쇄되는 과정을 네 개의 판화로 담았는데 그 중 하나만 있으면 된다. 원판에 줄그은 것. 요즘은 반칙이 너무 많아졌다. 이런 게 더 비싸기도 하다. 이건 한 장만 찍으니까 더 비싸게 팔릴 때도 있다.
  
□ 작업 단상-상대성원리와 별
1991년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미국에서 1년 생활할 기회를 얻었다.
그때 로체스터 공과대학(RIT)에서 1년을 보냈다. 로체스터는 나이아가라 폭포 바로 옆이었고 거기서 좀 더 가면 토론토다. 그때 토론토에 놀러갔더니 우주 박물관이 있더라.
거기 갔더니 그야말로 내가 보고 싶었던 것들이 쫙 있더라. 별자리 연구를 진짜 많이 해놨더라. 우주박물관말고 다른 데는 안 가고 며칠 동안 거기만 다녔다.
내가 어릴 때부터 우주의 운행에 대해서 늘 관심을 갖고 의문을 갖고 있었다. 인생이나 우주나 중요한 것은 밸런스다. 인생도 그렇고. 그게 깨질 때 다 깨진다.
내 인생에서 밸런스가 깨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뭐, 내가 노력한 댓가는 내가 취한 것 같다.
파국으로 끝난 적도 별로 없다. 정확하게는 파국으로 끝나도록 내가 기획을 안 한다. 매사.
<GS에너지>(GS타워 설치작품, 1999), <생의 오케스트라>(삼성서울병원 설치작품, 1994) 같은 대형 설치 프로젝트는 누가 줘도 아무나 못한다. 저기에 적용된 수학이나 구조 이런 것 때문에 줘도 못한다. 섬세하고 주도면밀한 디자인이 적용된 것이다.

<GS에너지>는 상대성원리 시리즈의 세계관과 비슷하다. 5개의 구체로 이뤄진 매스. 옆에 돌아가는 것이 있고, 하나의 작은 우주다.
 
□ 마가미술관
(송번수 작가는 1986년 한국전력 사회복지관의 무대막 제작공간 마련을 위해서 용인 모현면 동림리에 스튜디오를 세웠다. 이 프로젝트는 1984년부터 시작돼 2년 간의 우여곡절 끝에 세워진 곳이다. 이 스튜디오를 세운 뒤에는 그는 이곳에서 살면서 정년 퇴직하기까지 서울로 출퇴근을 하며 작업했다.)
 
한전에 보낼 무대막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걸 세워놓고 작업할 만한 대형 공간이 필요했다. 작업실은 지어야 하겠고, 고교 동창 중에 여기(용인)를 아는 친구가 있었다. 1984년에 그 친구 소개로 여기 땅을 샀다. 이 동네에서 이제 30년을 살았으니 내가 여기 터주대감이 됐지만 처음에는 연고가 전혀 없었다.
그때는 여기가 다 비포장도로였고 포은 정몽주의 후손들이 이 동네에 땅을 많이 갖고 있었다.
사고나서 보니 정씨 문중 땅이고, 절대농지와 상대농지가 물려있는 땅이었다. 그때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몰랐다. (관계법령에 걸려서)스튜디오를 짓다가 뜯었고 다시 허가를 받고 86년에 지었다.
근방이 다 비포장도로라 미술관 부지까지 건축자재를 실은 트럭이 들어오지도 못했다. H빔을 1킬로미터 떨어진 개천가 왕복 2차선 도로 옆에 부리고 가버려서 그걸 헬기로 옮기는 등 지을 때 애를 많이 먹었다.
삼성서울병원에 <생의 오케스트라>(1994) 작업을 해주고 그 돈으로 스튜디오에 살림집을 덧붙여 완공했다. 그때 그게 9억원짜리 프로젝트였다. 대학원생 20명과 함께 작업에만 5개월이 걸렸다. 작업을 도운 대학원생들에게 등록금 주고, 내 손에 6억 원 정도 남았다. 그걸로 건물을 완공했다.

실상 마가미술관은 타피스트리 작업을 보여주는 일종의 쇼룸에서 출발했다. 타피스트리를 누가 와서 보여달라고 하면 그 때마다 어떻게 펴서 보여주나. 그래서 쇼룸으로 만든 것이다. 그렇게 스튜디오 겸 쇼룸으로 준비했는데 그때 계명대 교수로 있던 제자가 ‘그럴 게 아니라 이걸 미술관으로 합시다. 전람회하면 경력으로도 들어간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문광부에 미술관 신청을 하니 최만린 선생이 국립현대미술관장 할 때인데 미술관에 내 작품 밖에 없다고 해서 허가가 안났다. 그 이듬해 오광수 관장이 ‘미술관에서 살아있는 사람 작품 전시도 가능하다’고 해서 허가가 떨어졌고 문을 열었다.(1998년 9월)


지금 내가 미술관 관장이지만 실상은 관리인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이 없다.
(그는 잔디깎이부터 비료 살포,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 정리, 안전 펜스 설치, 미술관 내 각종 표지판 설치까지 모든 작업을 그의 손으로 했다.)
새벽부터 자기 전까지 일하는데 안 건강할 수 있나. 오늘도 많은 일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집이 유지가 안 된다.
개인 미술관 운영은 소모전이다. 전기세도 안 나온다. 개인미술관 하는 사람들이 다 ‘이걸 누구에게 넘겨주나’로 고민한다. 자식들이 전부 안 한다고 한다. 여기서 무슨 수입이 창출되는 것도 아니고. 작가가 살아있을 때는 내 일이고 즐거움이니까 한다지만 자식은 그게 아니니까. 그래서 다들 그런 고민을 갖고 있다.
  


□ 남아있는 날들
재작년에 가슴을 열고 심장 수술을 했다. 정년 퇴직 10년 전에 한 정기신체검사에서 심장이 의심스럽다고 했었다. 퇴직 뒤에도 매해 서울대 분당병원에서 정기검진을 받았는데 의사가 재작년에 사진을 보더니 이제 더 이상 나빠지기 전에 손을 대자고 하더라. 스텐트 박는 줄 알았더니 심장판막을 교체했다. 다섯 시간 동안 수술을 받았다. 문제가 터지기 전에 진단 결과만 가지고 미리 수선을 한 것이다. 의사가 ‘앞으로 한 십년은 더 버틴다’고 하더라.
수술하고 1주일만에 퇴원했다. 내가 건강 체질이다. 음식은 채식 위주로 먹고 담배는 91년에 미국가서 끊었다, 술은 없으면 안 되지 않나. 와인이야 한 병씩 한다. 의사에게 물었더니 ‘한 두 잔 정도 괜찮다’고 하는데, 한 병 따면 다음날 먹기도 그런데 다 마셔야지.(웃음). 요즘은 하루 4~5시간 정도 작업한다. 일이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듯하다. 당신 오기 전에 산에 있는 개집도 치우고.
금년에 내가 국현에서 회고전을 한다는 게, 내 나이를 감안하고 일생을 정리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행운이다.
6월18일 국현 전시 끝난 뒤 정리하고 다시 작업을 할 것을 준비 중이다. 생각이 많이 정리됐고, 할 게 많이 쌓여 있다. 프린트할 것도 있고, 스테인리스에 실크 스크린 프린트할 것도 있다. 타피스트리는 이제 힘들다. 눈도 아프고, 연사같은 게 힘들다.
 
내가 43년 1월10일 생이고 음력으로 말띠다. 그래서 마가미술관이란 말에는 (성경에 나오는)마가의 다락방같이 작은 집이란 뜻도 있지만 ‘말의 집’이란 뜻도 있다. 이거 다 털어놓네.
내가 보기엔 사는 건 85~86세 까지가 이상적인 것 같더라. 그때 가는 게 가장 좋은 것 같다. 가장 좋은 도강 시기다.(웃음)
글/ 김진녕 관리자
업데이트 2017.12.12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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