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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년만의 봉인 해제, 박계희 20주년 기념전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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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힐미술관 설립자 박계희 전 관장(1935~1997)이 남긴 타임캡슐
지난 11월29일부터 12월5일까지 서울 워커힐호텔 아트홀에서 <박계희 여사 타계 20주년 기념전-기억>전이 열렸다. 
우란(友蘭) 박계희(1935~1997) 여사는 SK그룹 2대 회장인 최종현 회장의 아내이자 현 최태원 회장의 어머니로 1984년 워커힐미술관을 설립(초대관장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해 1980~90년대 한국 현대미술계의 후원자로 활동했다. 


1997년 암 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간 최종현 회장을 간호하던 박 여사는 그해 6월18일 최 회장의 폐암 수술 경과가 좋다는 소식을 듣고, 급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 다음해인 1998년 8월 최종현 회장도 세상을 떴다. 워커힐미술관 관장 자리는 박 여사의 큰 며느리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최태원 회장 부인)이 물려받았지만 노 관장은 2000년 12월 서울 서린동 SK본사 사옥 4층에 아트센터 나비의 문을 열고 나비 관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워커힐미술관이나 박계희 관장이 주도했던 1000여 점으로 추산되는 박계희 컬렉션은 잊혀진 존재가 됐다. 
그러다 '기억(Memory)'이라고 이름 붙인 박계희 추모 20주년 전시를 통해 90여 점의 작품이 다시 세상에 등장했다. 20년 전에 봉인됐던 한국 현대미술 컬렉터의 타임캡슐을 다시 연 것이다. 
전시는 '1980년을 만나다', '1990년을 만나다', '우란 박계희 여사, 동양정신을 만나다', '박계희 여사를 그리다' 등 4가지 섹션으로 구성됐다. 
이 때 ‘80년을 만나다’와 ‘90년을 만나다’란 표현은 그때 창작된 작품이란 게 아니라 80년대에 컬렉션한, 90년대에 컬렉션한 작품이란 뜻이다. 한국 미술계의 80년대와 90년대의 취향과 관심사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사후 20년 동안 흩어지지 않은 80,90년대의 컬렉션 90여 점 선보여

미술품 컬렉션은 부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서양이 그랬고 일본도 그랬다. 
국내에 현대적 산업자본이 축적되던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재벌가의 컬렉션은 고미술품 위주였다. 현대미술에 대한 본격적인 컬렉션은 1970년대 이후의 일이다. 
상업화랑이 등장하고 이를 통해 이중섭이나 박수근, 김환기 등 한국 현대회화 블루칩 3대장이 미디어에 오르내리게 된 것도 70년대 이후의 일이다. 
한국 현대미술을 다루는 워커힐미술관이 1984년에 문을 열었다는 것은 현대미술계나 한국 재벌사에 여러모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일이다. 


1997년 박계희 관장의 사망 직전까지 14년 동안 총 138회의 전시를 연 워커힐미술관은 개관전으로 전후(戰後) 한국현대미술의 실험정신을 되돌아 본 ‘60년대 한국 현대미술-엥포르멜(Informel)과 그 주변’을 열었다. 이미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서양 인상파 순회전 또는 박수근이나 김환기 같은 대중의 주목도가 높던 작가 대신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한국 현대미술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시작해 이어 9월에 한국 최초로 미국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개인전, 10월에 현대판화 런던-뉴욕전 등을 열었고 85년에는 일본 현대미술전, 프랑스 현대미술전, 동구의 현대판화전을, 1988년에는 독일로 가는 한국화의 새흐름전, 12월에 데니스 오펜하임전 등 동시대 현대미술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회화 장르에만 매몰되지 않고 판화와 타피스트리, 사진, 비디오 아트 등 현대미술의 넓어진 영역을 과감하게 소개했다. 

이런 프로그래밍은 관장을 맡기도 했던 박계희 관장의 취향과 식견이기도 하고 그와 교류했던 한국 현대미술계의 역량이기도 하다. 
고 박계희 관장은 박경식 전 해운공사 이사장의 넷째딸로 1953년 경기여고를 졸업한 뒤, 미국 뉴욕 베네트칼리지를 거쳐, 칼라마주대학을 졸업했다. 1959년 박 여사가 다니던 시카고 아트스쿨 기숙사인 인터내셔널 하우스의 축제행사 때 처음 만나 1년 만에 현지에서 결혼했다. 최종현 회장과 만났을 때는 시카고 미술대학에서 응용미술을 공부하던 중이었다. 당시 최종현 회장은 시카고대학 경제학과 석사과정을 다니고 있었다. 
이런 이력에서 보듯 박 전 관장은 현대 미술을 전공한 미술계 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한국 미술계와 교류한 접점으로 현대미술관회라는 모임도 한국 재벌사와 국내 미술 시장의 성장에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다. 

현대미술관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한국 현대미술계 지원 

국립현대미술관의 후원 조직으로 1978년 8월 출범한 현대미술관회(초대 회장 민병도)는 1979년 7월 7월 현대미술관회 미술교양강좌를 열었고 1980년 10월부터는 1년 간의 장기 프로그램으로 실기강습회를 개최했다. 이종상 작가가 맡은 문인화 반(10.4~11.24), 권창륜 작가의 서예(11.6~12.18) 등. 현대미술관회는 1980년 12월8일 사단법인으로 전환해 회장에 민병도, 부회장에 설원식 김수근, 상임이사 김윤순, 이사진에 이경성 장한 박주환 김세중 이종상 이세득 권태선 손석주 윤탁 홍라희 정희자 등을 선임했다. 
면면에서 보듯 현대미술관회에 참여한 인물들이 국내 재벌미술관 붐을 이끌고 한국 현대미술의 후원자로 등장하게 된다. 
현대미술관회의 상임이사로 일했던 김윤순 한국미술관 관장은 자서전을 통해 박계희 전 관장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현대미술관회의 상임이사로 있을 때인 1980년 재계의 부인과는 거리가 먼 학구파에 가까운 인상의 그를 처음 만났다. 더운 날이었으나 땀을 전혀 흘리지 않는, 나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정숙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미술관회 영구회원으로 가입한 그의 비서가 제출한 서류에 1945년생으로 기록되어 있어 금방 착오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챙겨보니 1935년 생이었다. 
우리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배우는 것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는 현대미술관회에서 처음 시도했던 문인화 공부를 특히 좋아했다. 
이종상 선생을 모시고 동양화론에 실기까지 공부했고, 이어 83년부터 10년간 여초 김응현 선생을 모시고 서예를 배웠다. 호암미술관의 홍라희 관장도 함께 했다. 
한국미술관회는 또 단소교실을 개설했는데, 한 사람 두 사람 그만두기 시작하더니 박계희 관장과 나, 이렇게 두 사람만 남았다. 그래도 우리는 즐겁게 단소를 불었다. 다만 언제나 그가 나보다 앞서 있어 샘이 났다. 단전 호흡을 하고 있던 그는 내 호흡의 두 배나 되는 긴 호흡을 갖고 있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고 또 예습 복습도 착실히 했다. 덤벙거리는 나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한번은 단소를 가르친 선생님 앞에서 그와 내 실력차이가 벌어져 심통을 부렸더니 그저 인자하게 웃기만 했다. 그때 우린 영산회상 중광곡 중 상령산을 공부했다.  
나는 재벌 부인인 그를 부러워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의 지식과 학구열은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기억>전에 80년대, 90년대의 컬렉션과 함께 '우란 박계희 여사, 동양정신을 만나다'란 섹션이 있고 여기에 붓과 벼루와 글씨가 걸린 까닭도 이런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전시장의 80년대 컬렉션 코너에는 이응노와 곽덕준, 권영우, 김구림, 남관, 송수남, 문신 등의 작품이 나왔고, 90년대 컬렉션에는 김근중, 김원숙, 박철, 신성희, 우제길, 유선태, 이규철, 전준, 홍정희, 황규태 등의 작품이 나왔다. 
외국 작가의 작품으로는 주로 판화로 펭크. 호크니, 리히텐슈타인, 솔 르윗, 크리스토, 필립 거스톤 등의 작품이 등장했다.   
박계희 컬렉션을 그의 사후 20년 후에도 흩어지지않게 하고 그대로 타임캡슐처럼 봉인해 보관해왔던 박 전 관장의 아들은 여전히 한국 실물 경제의 3대 플레이어 중 한명이다. 때문에 이 컬렉션이 향후 어떻게 보존되고 세상과 만날지 주목된다. 

글/ 김진녕 관리자
업데이트 2018.12.14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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