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메뉴타이틀
  • 한국미술 전시리뷰
  • 공예 전시리뷰
  • 한국미술 도서리뷰
  • 미술계 이야기
  • On View
  • 학술논문 브리핑
타이틀
  • 어느 미술 컬렉터의 귀거래사
  • 1060      

전시명 : 하정웅 COLLECTION 『장순옥 작가 초대展: 엄마, 뭐해?』
장 소 : 수림아트센터
기 간 : 2018. 4. 2.-2018. 6. 29.

-국내 공립 미술관에 12000점을 기증한 하정웅
-80의 문턱에 부르는 귀거래사, ‘마음이 먼저다’


하정웅(河正雄).

1939년 일본 오사카 출생. 빈농 출신의 아버지 하헌식은 전남 영암에서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자로 일했고, 어머니 김윤금은 1938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림을 잘그리는 소년이었지만 그가 자란 아키타의 추운 겨울처럼 ‘혹독하게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해 사회에 나가 가난과 자이니치(재일본인)라는 이중고를 뚫고 나갔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전후해 일본에 가전 교체 붐이 일면서 전자제품 대리점을 운영하던 그는 기회를 잡았다. 큰 돈을 벌고 못다한 미술가의 꿈 대신 사업가로 성공한 돈으로 재일동포 화가의 그림을 한 점 한 점 사면서 컬렉터가 됐다.

24살 되던 1973년 하정웅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처음 한국 땅을, 처음 ‘고향 땅’을 밟았다. 고향에 땅 백마지기만 사서 귀향하겠다는 아버지의 부탁을 들어드리려 했으나 이듬해 아버지는 세상을 버렸다.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던 그와 ‘고향’의 인연은 1982년 그가 재일교포 작가인 ‘전화황 화업 50년 전’을 기획해 도쿄와 교토, 서울-대구-광주에서 순회전을 하면서 이어졌고 1993년 껍데기만 있고 내용물이 없어서 고민하던 광주시립미술관이 그에게 작품 기증 요청을 하면서 굳게 이어졌다.

이후 그는 국내 10여 개 공립미술관에 미술작품 1만2000여 점을 기부했다. 광주시립미술관은 그에게 ‘명예관장’이란 직함을 부여해 고마움을 표시했고, 부친의 고향인 영암에선 그가 기증한 작품으로 영암하정웅미술관을 열었다. 지난 2012년에는 그해 타계한 재일교포 김희수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의 후임으로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직에 올랐다. 그는 올 초 이사장직을 내려놓았다. 오는 6월 초에는 이사직마저 사임할 예정이다.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는 이유에서이다.

평생 모은 작품을 ‘고향’ 한국의 공공 미술관에 씨앗처럼 뿌리고 나이 80에 들어서자 직을 내려놓으며 주변을 정리하고 있는 그에게 ‘귀거래사’를 청했다.


그는 수림재단 이사직 사임에 대한 얘기부터 했다.

“이사직도 오는 6월11일까지만 하고 그만두기로 했다. 나이도 먹었고 체력도 문제다. 이 일은 병을 갖고 있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젊은 분들이 나서서 지도 편달을 해야 한다. 나같은 구식 사람은 떠나야 한다. 문화 육성을 하기 위해선 새로운 바람, 새로운 힘이 필요하다. 내가 지금까지 해왔지만 내가 모자라는 게 많아 반성도 많이 했다.“

-여러 가지 일을 참 많이 했다.

체력이나 건강에 대해서는 관심도 안갖고 앞만 보고 살아왔다.


작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일본계 작가 이시구로가 인터뷰에서 ‘나는 62살인데 인생이 이렇게 짧았던 것을 이제야 배웠다’는 요지의 말을 하더라. 그 이야기를 듣고 인생이 짧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만 하고 살아서 80이 돼서야 인생이 짧다는 것을 느끼고 남은 시간이 별로 없네,하고 느꼈다. 내가 그보다 20년 늦게 깨달았다. 나도 62살 때 그걸 알았더라면 몸도 더 건강해지고 여러 가지로 좋았을 것 같아서 반성을 하고 있다. 그런데 후회는 없다.(웃음)

나는 다른 사람보다 열 배 이상 일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열 배 이상 잘살았다고 생각한다. 행복하게 살았다. 두 배 세 배 가 아닌 열배 이상 일했다는 것은 고생이 아니라 하늘에서 준 행복이다. 고맙게 생각한다.


-몸이 많이 아픈가.

심장 쪽이 좀 불편하다. 잘못하면 터지니까. 집에서 가족이나 옆에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으면 괜찮은데 이렇게 밖에서 활동할 때는 다른 이에게 부담을 지우고 폐를 끼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안하고 싶다. 될 수 있으면 내 몸은 내가 지키고, 될 수 있으면 내 힘으로 마지막까지 마무리하고 싶다.


-지금까지 몇 점 정도 기증했나.

1만2천점 정도다. 광주시가 1993년도에 훌륭하게 미술관 시설을 만들었는데 작품이 없었다. 그때 강영기 광주시장과 차종갑 미술관장이 ‘안에 내용을 채울 수 있도록 해달라’라며 하정웅 컬렉션을 기증해 달라고 했다. ‘키워주시고, 도와주시고, 사랑해주시라’는 세가지 부탁을 받자 ‘나같은 사람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키워주는 능력이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내게 기대를 하는 사람도 있구나, 그래서 자긍심도 생기고, 그런 인간이 되고 싶었다.


-돈을 번 뒤 왜 미술품을 모았나.

미술품을 모으면 돈을 번다고 요즘 사람들은 얘기하는데 내가 먼저 시작한 것은 재일교포 작품들을 모으는 일이었다. 재일교포 작품을 일본 사회에서는 낮춰봤다. 그런 작품을 모았다.

그러는 사이 1960년대부터 일본 사회에 컬렉션 붐이 일었다. 주로 회화 작품 수집 붐이었다. 그때 나를 일본 사회에서는 ‘쓰레기 같은 것 모았다’고 바보라고 조롱했다. 그런데 회화 붐이 일자 동포 사회에서 ‘못사는 재일교포의 그림을 싸게 샀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생겼다. 한때는 미친놈이라고 하더니... 나는, 그림을 돈을 벌기 위해서 모은 적은 한번도 없다.


내가 어릴 때 그림을 잘 그렸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늘 그림을 그리면 칭찬을 받고 상을 받았다.

내가 고교를 졸업했을 때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 차별이 제일 심했던 때라 취직을 못했다. 아키타 공고 졸업생 중 나 혼자만 취직을 못했다. 할 수 없어서 그림을 그려볼까 생각해 봤는데 부모님이 ‘그림 그려서는 못산다’며 그림을 못그리게 했다. 고등학교도 어머니가 장사해서 간신히 졸업했으니 돈이 없어서 대학도 못갔다.

다행히 도쿄 올림픽 전에 가전 대리점을 열었는데 그때 칼러TV나 세탁기 같은 게 잘팔려 사업이 잘되면서 돈도 많이 벌었다. 그때 든 생각이 재일교포 사회에서서 그림 그리는 사람이 못사니까 내가 이분들을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집이 시작됐다. 이게 제일 큰 동기다.

두 번째 동기는 내 고향 아키타에 한국 사람이 징용으로 많이 와서 댐 건설이나 광산에서 일했다. 아키타에 그들의 무연고 묘가 많았다. 소학교 시절, 내가 살고 있는 집 뒤에 산소가 있었다. 문을 열면 전부 산소다. 그 중 하나가 징용자 무덤이라는 것을 어머니가 아시고는 소학교 4학년 때부터 집에서 명절 때 음식을 만들면 꼭 그 산소에 갖다 드리라고 내게 시켰다. 어머니는 무서워서 못가고 내게 시켰다. 나는 그런게 안무서우니까. 갈 때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이름도 없는 무덤에...’ 그런 생각이 들고 이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징용자 무덤이었다. 아키타에는 그런 무명 무덤이 많았다.

그걸 내가 발굴을 했다. 강제 징용된 희생자 명단도 찾고. 아키타의 절에 탑도 세우고, 위령제는 지금도 하고 있다. 20년 넘게 하고 있다.

20세기라는 전쟁의 시기에 일본 땅에서 돌아가신 선조들을 위로해야겠다는 생각에 ‘기도를 올리는 절같은 미술관을 만들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재일교포 작품부터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기도의 미술관’을 만들기 위해서 땅도 사고, 설계도 하고, 그쪽 관청에 협의도 끝내고 했는데 한일 국교 정상화 협정문 속에 들어간 징용자나 위안부 문제는 전부 처리했다,는 문구 때문에 결국 아키타시쪽에서 난색을 표하고 무산됐다. 이게 80년부터 92년까지 벌어진 일이다.


-그게 1993년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된 것인가.

1992년도에 광주시립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그런데 작품이 없다고 기증을 부탁하더라.

희생당하신 분들을 위한 기도를 꼭 아키타에서만 기도를 올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반도에서 남북 전쟁으로 200만 명 이상 죽었으니 그 기도를 올려도 좋고 광주항쟁 때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해도 좋고, 20세기에 일본 때문에 동남아에서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를 올려도 좋다.

20세기라는 전쟁 시기에 희생당한 이들을 위한 또는 세계 인류를 위한 기도를 하는 미술관을 광주에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광주시립미술관이 하정웅 미술관이자 기도의 미술관인 것이다. 이후 각 지방마다 미술관이 생길 때마다 기증해 달라, 같이 사랑해 달라는 요청이 와서 열군데 정도의 공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처음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에서도 기증해달라고 집으로 찾아왔다. 국현과 서울시립은 잘먹고 잘살고 예산도 있고, 내가 안도와줘도 여러분들 힘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나는 광주부터 시작해서 지방도시를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키워주고 싶다는 생각에 거절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걸 보고 ‘하정웅이는 바보다. 서울이나 국현에 기증하면 지금보다 이름도 더 나오고, 대단한 컬렉션으로 세계적으로 이름도 알리는데, 지방 도시에 해버려서 컬렉션이 가치도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나는 그런 말에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내 이름을 올리려고 기증을 하는 게 아니다. 기증을 통해 지방을 키우는 것이다. 내가 뿌린 씨가 꽃을 피우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게 내 역할이고 내 긍지다.


-‘하정웅 미술관’은 영암에 먼저 생겼다.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한 뒤 7~8년쯤 지난 뒤에 영암군수가 나를 찾아와서, “다른 지역은 다 기증하면서 부모 고향에는 기증안하냐”면서 기증하면 미술관도 만들고, 하정웅 컬렉션을 지켜가겠다고 말하더라. 나는 ‘지금까지 내가 그 요청을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작품은 없어서 미안하지만, 남은 작품 3500점,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내가 기증해야만 생기는 미술관을 바라는 게 아니다. 지자체 스스로 미술관의 필요성을 알아채고 마음을 내는 곳에만 작품을 도와준 것 뿐이다. 내가 ‘내 기증품을 받아주세요’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 그들이 자체적으로 미술관을 만들겠다는 운동을 해야 기증했다.

광주시립미술관은 내가 아는 노하우를 전달해주고 같이 키워왔다. 나는 광주시립이 지금 한국에서 제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하고 싶어서 했기에 그런 미술관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잘가꿔놓은 뒤 그들이 ‘명예관장’이라는 명예를 내게 줬다. 내가 요구한 것도 아니지만, 그들이 내게 돌려준 것이다. 그들이 잘했기 때문에 내명예가 꽃피는 것이니 내가 기증한 것에 대해 그들 방식으로 아주 잘갚아 준 것이다.


-수림문화재단의 김희수 창립자와는 어떤 인연인가.

40년 전에 재일교포 문화인이 모여 재일한국인 예술협회를 만들었다. 김희수 이사장이 그 모임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면서 알게 됐다. 내가 재일한국인 예술협회 3대 회장을 맡을 때 김희수 이사장을 몇 번 만났고, 내가 개인적으로도 도움을 받기도 했다. 김 이사장이 일본 땅에 세운 외국인학교의 이사를 맡기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그 분이 중앙대를 매각한 뒤 세운 수림문화재단에 나를 이사로 영입했다. 김희수 이사장은 중앙대를 매각한 자금 1300억 원 중 1000억 원은 수림문화재단에, 300억 원은 아들이 맡아서 하는 장학재단에 썼다. 수림문화재단은 결국 사회에 환원한 것으로 봐야 한다.


-6년 동안의 이사장 일은 어땠나.

책임이 무겁고 어려운 일이었다. 나에게도 중요한 노년의 시간을 써서 다른 이의 흔적을 기리는 일을 한 이유는 김희수씨가 중앙대에서 20여 년 동안 학교를 정상화시켰지만 중앙대에 흔적이 하나도 없다. 자료실도 기념실도 없다. 중앙대에 일생을 받쳤던 분인데 그런 대우 밖에 못받나 싶었다. 중앙대에 총장을 세 번이나 만나러 갔다. 명예를 지켜달라고.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오늘날까지 아무 것도 안하고 있다.

나는 광주에서 명예도 받고 내 인생이 잘됐다고 생각한다. 광주시립미술관이 신미술관을 열 때 김희수 이사장이 왔다. 그때 그가 “하정웅씨는 광주에서 영웅이 되고 사랑을 받고 미술관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이 내게는 고독하게 들렸다. 그때 그가 중앙대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듬해 김 이사장이 돌아가셨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분의 흔적을 회복시켜야겠다. 내가 재일교포 2세로서, 재일교포 1세의 명예를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44년 전(1975년)에 돌아가셨다. 부모 제사를 50년 동안 모시면 인간으로서 최고의 효자다.라는 말이 있다고 하더라. 내가 50번째 제사를 모실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올해까지 44번 모셨다. 식민지 시대에 돌아가신 선조들 위령제를 20년 이상 계속하고 있는 것처럼. 김희수씨도 내가 그렇게 모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까지 무사히 바보스러운 이사장 노릇을 했다. 나를 받아주는 사회, 인격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일했다. 여러분이 햇볕을 주기 때문에 그 햇볕을 받아 여러분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사회에는 ‘햇볕’을 주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닌데.

다른 이보다 열 배 열심히 사는 동안 고생도 많았고 나쁜 말도 많이 들었다. 일본에서도 마음을 다치고, 한국에서도 마음을 다쳤다. 좋은 일을 하더라도 마음을 다친다.

그런데 좋은 사람이 있다. 중학교 졸업반 때 담임을 맡은 마쓰모토 선생과 나카지마 선생. 이 두 분이 나를 인정해줬다.


내가 중학교 졸업할 때쯤 고교 진학이 불가능 했다. 담임 선생도 아닌 나카지마 선생이 나를 교무실로 부르더니 “왜 진학서류를 왜 안내냐”고 물었다. ‘내가 집안이 어려워서 못간다. 아버지와 짐마차 일을 하기로 했다’니까 선생이 눈물을 흘리며 ‘교육이 중요하다, 교육을 받아야 사회에 나갈 수 있다’고 말씀을 하셨다. 집에 가서 부모님께 학교 보내줄 수 없냐고 얘기해서 못갈 것을 억지로 고교에 진학했다. 그 선생님이 일생동안 나를 사랑해 주셨다.

나카지마 선생이 은퇴하고 병에 걸려서 따뜻한 요코하마쪽으로 이사를 오셨다. 이번엔 내가 노년의 사회 활동, 봉사 활동에 대한 아이디어를 드렸다. 내가 제안한 봉사방법이 반응이 좋아서 그가 뉴스에도 나오는 지역 사회의 유명인사가 됐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를 죽이겠다는 사람이 생겼다. 처음에는 도와주겠다고 하던 봉사 활동 멤버들이 이름이 알려지고 나니까, 시기심이 생겨가지고 저녁에 잠을 못잘 정도로 괴롭힌다’는 것이다. 내가 선생님께, “내가 그림을 사모은 뒤 기증을 많이 했음에도 비난받아서 인격을 다친다. 그럼에도 나는 후퇴는 안했다. 선생님도 학생(하정웅)에게 배우시라‘고 얘기했다.

나도 명예도 받고, TV에도 나오고, 상찬도 받고 그랬지만 그 와중에 욕도 듣고 마음을 다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미술관을 지키고, 맹인복지회관도 만들고, 교육기관도 만들었다. 내가 모자란 사람일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 그때부터 선생님이 나를 ‘하정웅군’이라고 부르지 않고 하정웅 선생이라고 부르더라.(웃음)


-한국과 일본의 활동 비중은 어떻게 나누나.

대략 반반이다. 일본에서 부동산 임대사업이나 작품 수집도 계속하지만 수림문화재단의 일도 남아있고 광주나 영암, 부산의 하정웅 컬렉션 일도 계속 진행하고 있다.

수림문화재단은 아직 미술관 등록이 안돼있고 하정웅 컬렉션의 기증 작업이 진행 중이다.


-80의 문턱에서도 끝없이 일을 한다.

내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은 후퇴를 안하고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는 것이다. 하루에 한걸음만 먼저 가면 일 년에 365걸음, 10년이면 3650걸음을 남보다 먼저가게 된다. 내일을 생각하면 나는 언제든지 행복이다.


-노년의 삶은 어떤가.

나이가 오는 게 보인다. 수술도 받고 80 가까이 돼서야 인생이 짧은 것도 알고.

내가 가족에게 애정을 표시하지 못했다, 그건 반성한다. 남은 시간을 나를 위해서, 나와 가까운 사람을 위해서 살고 싶다. 각시나 아이들, 손자와 친구와 나누고 싶다. 나를 사랑해줬던 분과 나누고 싶다. 인생 가치를 공유했던 분과 남은 시간을 나누고 싶다.

후배를 키우는 역할이나 그런 것은 시간을 줄이고 있다. 그래서 이사 일도 그만두려는 것이다. 그런 건 이제 후배들에게 맡긴다.


-좋아하는 작품은 어떤 것인가.

행복과 평화, 평안한 인간관계, 인정, 애정있는 세상. 그런 의도를 담아낸 작품을 좋아한다.

그런 취지를 담은 작품을 모으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다. 나와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작가를 찾아내고 그런 마음을 후대에게 가르쳐주고 싶다. 나는 대학에 못갔지만 사회라는 대학에 갔다. 인간이 사는 길, 평화를 찾는 길을 다 사회에서 배웠다. 마지막도 사회에서 맞을 것이다.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고등학교 못보낸다’고 말했던 것을 미안해하셨다. 나를 대학에 보내 교육시켰다면 지금 활동 이상으로 큰 역할을 했을 텐데,라며 회환을 토로하셨다.

전화황 작가의 반가사유상 그림을 옆에 두고 보면서 초심을 다진다. 같이 잠을 자고 대화를 하고 기도도 올린다. 매일 내가 태어난 임무를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가 나쁜 말을 하더라도. 거기에 물러나지 않고 나의 길을 간다. 내 경험상 안듣고 싶은 말은 흘려 버리면 된다. 눈도 안보면 된다. 돌을 누군가 던지려고 하면 20미터 밖으로 멀어지면 다치지 않는다. 내게 침뱉는 사람에겐 내가 좀 떨어져 있으면 된다. 그럼 무서운 것이 없어지게 된다. 내가 가는 길에 대해서, 이런 원칙을 세우면 내가 하는 일에 하나도 지장이 없다. 나는 다른 이의 눈치를 안본다.


-작품 기증 대신 본인 이름의 재단을 만든 생각은 없나.

미술관 말고 내 이름을 딴 사업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럴 일을 받을 마음도, 시킬 마음도 없다.


내가 살아온 흔적은 그림도 있고, 자료도 있다. 이렇게 글도 써주고(인터뷰). 필요하다면 연구해주면 좋겠지만 그건 후학에게 맡긴다.

그는 김희수 기념 수림아트센터 하정웅 아트갤러리에서 하정웅 컬렉션의 이름으로 장순옥 작가 초대전 <엄마, 뭐해?>(~6월29일)를 주최했다. 토우 작업을 오랫동안 해온 장순옥 작가의 작업에 대해 하정웅 명예 관장은 개막식에서 “좋은 마음이 들게 하는 작업”이라며 하정웅 컬렉션에 포함시켰다. 장순옥 작가는 박병희 작가와 부부 사이다.
김진녕 관리자
업데이트 2018.12.15 06:39

  

SNS 댓글

최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