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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록과 재현, 5대의 초상화 -<강세황과 진주강씨 5대 초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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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강세황과 진주강씨 5대 초상
기 간 : 2018.8.7. - 2018.11.18.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서화2실
글/ 조은정

  조선후기 예원의 총수 강세황姜世晃(1713~1791)을 제외하고는 서화를 비롯하여 조선후기 문화사 어느 것 하나 완벽히 논할 수 없다. 더욱이 그를 중심으로 선대와 후손들의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남 등을 살필 수 있으니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정황에 대한 연구대상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러한 집안의 5대 초상화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니! 감상의 즐거움을 넘어서 그동안 세간의 설(說)인 선대의 닮음과 닮지 않음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싶었다. 실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환경의 일부가 된 <충무공동상>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점도 이 5대의 초상화를 통해 어느 정도 일소될 것이라 믿는다. 즉 생전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기될 문제는 아니나 초상화나 동상이 실지 이순신장군과 닮지 않음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생김새의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음에도 장군의 모습에 대한 공동의 이미지를 생산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순신 장군 초상화>나 <충무공 동상>을 만들면서 초상을 맡은 작가들이 생김새의 출처로 삼은 것은 서애 유성룡의 『서애집』, 이순신 장군 당신이 남긴 『난중일기』 그리고 이순신 장군 집안 후손의 골상 등이었다. 특히나 무관이면서 문관 같은 요소를 지닌 인물이라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후손의 생김새라는 구체적인 형태의 제시는 설득력이 높게 받아들여졌다. 

  결국 강세황 집안의 초상화를 본다는 것은 지난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가까운 미술작품에 대한 이야기이고, 실재했던 인간 형상을 구체화할 때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열쇠이기도 한 것이다. 선대와 닮고 닮지 않음을 이렇게 한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집안이 또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한 가정 아래 생각해보니 역대 어진(御眞)의 소실이 다시 한 번 참으로 안타까운 맘이 든다. 직계와 방계 그 같음과 다름을 논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진주 강씨 집안은 강백년(姜栢年, 1603~1681), 강현(姜鋧, 1650~1733) 그리고 강세황姜世晃(1713~1791)에 이르는 조손 3대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해서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라고 불리었다. 그런데 그러한 집안도 후대로 가면 과거에 들지 못하는 과정을 보며 가세 또한 세월을 비켜가지 못함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초상화를 남기는 것은 당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그 가세의 대단함이 유지되는 과정도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에 비춘 집안의 부침 이외에도 초상화의 제작 목적이 변화하는 과정도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이는 감상자의 시각이기도 한데, 가장 먼저 제작되었으며 가장 어르신부터 초상화를 보아가노라면 그 시대의 요구사항을 또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5대 초상화라고는 하지만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로 이르는 5대가 아니라 같은 집안의 5대 초상화 전시이다. 어쨌거나 석지 채용신과 그의 아들이 그린 홍씨 부자 초상화 이래로 흥미로운 ‘대를 이은 초상화’라는 점에서도 개인적으로 흥미를 끈 전시였다. 물론 5대가 쪼란히 5대조부터인 순서가 아닌 남아 있는 강씨 집안 초상화인 탓에 ‘삼세기영’의 초상화를 완성할 수도 없고, 5대조의 모습을 확연히 비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전란 속에서 각종 진영들이 제대로 남아 있지 못한 현재, 한 집안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다. 게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한 집안의 다섯 초상화가 각기 콜렉션된 사연은 전설이 될 가능성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2017년에 강세황의 아들인 <강인 초상화>를 구입하였는데, 그 해에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해외 옥션에 나온 강세황의 손주 <강노 초상화>를 구입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5대의 초상화가 모이게 되었다고 하니, 한가족이 모이듯 초상화도 한 집안을 이루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에 전시된 초상화들은 다음과 같다.

초상화명 작가 재료 크기(cm) 기타
강민첨(963-1021) 초상 박춘빈 종이에 엷은 색 80.0×61.3 보물588호
강현(1650-1733) 초상  작가미상 비단에 색 165.8×96.0 기탁917
강세황(1713-1791) 자화상 강세황 비단에 색 88.7×51.0 기탁918
강세황(   〃    ) 초상 전 이명기 비단에 색 145.5×94.0 기탁918
강세황(   〃    ) 초상 작가미상 종이에 색 50.9×31.5 덕수3069
강세황(   〃    ) 초상  작가미상 비단에 색 21.3×20.2 신수2923
강인(1729-1791) 초상 작가미상 비단에 색 58.5×87.0 구10094
강이오(1788-1857) 초상 이재관 비단에 색 63.9×40.3 덕수3070
강노(1809-1886) 초상 작가미상 종이에 색 60.7×47.0  신수51748

 
  회화2실은 오롯이 이 다섯 초상화를 위한 공간이었다. 집안의 시조를 모신 공간에는 향로를 두어서 이들 초상화의 기능을 상징하였다. 강민첨(姜民瞻, 963-1021) 초상화 좌측에 향로를 배치한 것은 그가 바로 진주 강씨 은열공파(殷烈公派) 시조인 때문이며 5대의 초상화에 들지 않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박춘빈 <강민첨 초상>


  강민첨은 고려시대인 1018년 거란족의 침입 때 혁혁한 공을 세워 고려 문종 때 공신각에 초상화가 걸린 인물이다. 관복 차림에 좌우로 길게 날개가 튀어나온 각이 진 복두를 쓰고 오른손을 위로 들어 홀을 쥐고 있다. 박물관의 작품 설명문에는 “이 초상은 경상우병사 이연필(?~1803)이 진주에 있던 원본을 1788년 화원 박춘빈에게 옮겨 그리게 하여 강원도 회양 관아로 보낸 것이다. 당시 강세황은 회양부사로 부임한 아들 강인(1729~1791)과 함께 지내고 있었으므로 이 작품의 모사에 후손인 강세황이 관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되어 있다. 이 초상화는 고려시대 공신의 의복을 착용하고 양손에 홀을 받들었지만 얼굴과 손이 짙은 분홍색을 띠고 있어서 무신도를 연상시킨다. 귀가 크고 양눈이 위로 치켜져 이러한 느낌이 더욱 강하게 든다. 상반신만 그려진 초상화인지라 의자 윗부분이 드러나는데, 의자 좌우의 운두문은 이모하면서 생긴 결과로 가구의 결구가 나타나지 못한 채 외부 형태만 모사한 것이다. 검고 각진 복두와 관복의 분홍색 둥근 깃이 조화로우면서도 대조적이다. 양손의 안쪽으로 도포와 저고리 등의 의습이 반복적인 직선으로 표현되어 장식적으로 보인다.


미상 <강현 초상>


  강현은 강세황의 아버지이다. 도승지, 예조참판, 판의금부사를 지낸 인물답게 호피를 덮은 의자에 앉았는데 화면 좌측에는 호랑이 발톱이 표현되었다. 붉은 기가 도는 코, 입가부터 뺨의 광대 아래에 이르는 미세한 세로의 주름들이 자연스레 표현되어 있어서 사실적인 인상을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관복의 흉배는 학이 두 마리가 있어 당상관임을 알 수 있으며 관복에 수놓인 흉배를 표현하였는데, 우측의 해와 흉배를 가로질러 건너가는 감싼 서대의 금속부분은 금박으로 처리하였다. 또한 어두운 전시실에서 눈에 띄지는 않지만 족좌의 상회장 낙영 부분에 금으로 제문을 적은 것이 희미하게나마 나타나 있다. 


작자 미상 <강세황 초상> 덕수3069


≪칠분전신첩七分傳神帖≫ 중 강세황 초상


  강현의 아들이자 이름난 문화 인사인 강세황의 초상화는 스스로 그린 자화상과 이명기가 그렸다는 초상화, 정면상의 정2품 당상관 차림의 초상화, 임희수의 초상화 초본을 모은 화첩인 《칠분전신첩七分傳神帖》에 실린 강세황의 초상화 등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70세 때인 1782년에 그린 자화상은 선비의 평상복에 사모를 쓰고 있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수염과 눈썹이 하얗구나. 오사모를 쓰고 야복을 걸쳤으니 마음은 산림에 있으면서 조정에 이름이 올랐음을 알겠도다. 가슴에는 만 권의 서적을 간직하였고 필력은 오악을 흔드니 세상 사람이야 어찌 알리. 나 혼자 즐기노라. 옹의 나이는 70이요, 호는 노죽이라. 화상을 스스로 그리고, 화찬을 스스로 쓰네. 임인년”이란 자찬이 적힌 초상화는 한 인물의 이상과 현실을 은유한 초상화라는 점에서 주목되어 왔다. 


강세황 자화상


傳 이명기 <강세황 초상>

  한편 「계추기사」를 통해 초상화의 제작비용까지 자세히 알려진 <강세황 초상화>는 당대 화사 이명기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툭 트인 흉금, 고상한 운치, 소탈한 자취는 자연을 벗하네. 붓을 휘둘러 수만 장 글씨를 궁중의 병풍과 시전지에 썼네. 경대부의 벼슬이 끊이지 않아 당나라 정건(鄭虔)의 삼절을 본받았네. 중국에 사신으로 가니 서루에서 앞 다투어 찾아오네. 인재를 얻기 어려운 생각에 거친 술이나마 내리노라. 조윤형이 삼가쓰다 [曹允亨謹書]”라는 정조의 제문이 적힌 초상화는 관복을 갖추어 입은 정복본이다. 이 초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얼굴과 손에서 두드러지게 음영이 나타나는 점이다. 무릎을 짚고 드러나는 오른손도 부드러운 그림자처럼 음영이 표현되어 있다. 흉배는 두 마리 학이 마주보고 있으며 대대의 중앙 부분을 금박으로 도드라지게 찍어 입체감이 나타난다. 호랑이 가죽은 발을 딛는 대 중앙에 코와 얼굴을 비죽이 내밀고 있고 반지르르한 호랑이 가죽도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화문석 위 좌측에는 인물의 그림자가 져 있어 관복의 주름과 음영을 나타내려 한 의도를 정확히 드러낸다. 

  <강이첨 초상화>가 고려시대 그의 영웅성을 나타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이명기가 그린 <강세황 초상화>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보는 방법, 서양화법 혹은 음영의 표현에 대해 연구한 흔적을 파악할 수 있다. 진실을 그린다는 것, 그것이 초상화의 목적에 닿아 있기 때문에 화가가 알고 있던 음영법과 원근법 등을 초상화에서 적용하는 것이 그 어느 영역보다 자유로웠을 것이다. 


<강인 초상>


  강인은 강세황의 장남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던 인물로서 그림에서는 단학 흉배를 하고 있어서 당하관이었던 시기에 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약간 옆으로 비켜앉아 4분의 3면관을 한 얼굴은 나오고 들어간 곳 등이 표현되었고 관복에서도 음영을 볼 수 있다. 그림 상단 우측에 “종호강공오십오세진(從好姜公五十五歲眞)”이라고 해서 이명기가 강세황의 초상화를 그릴 때 그의 아들 초상화도 함께 그렸다는 「계추기사」의 기록으로 미루어 이명기가 그린 50세 때 강인의 모습으로 추측되고 있다. 8점이나 초상화를 남긴 강세황 덕에 아들 강인은 초상화의 비교를 통해 부자간의 닮음과 그렇지 않음을 살피는 데 주요한 자료가 되고도 있다. 인상적으로 이들은 닮았다라고 평가되는데 도드라진 광대뼈가 작은 눈, 튀어나온 입 등에서 그러하다고 말해진다.   


이재관 <강이오 초상>


  강세황의 다섯째 아들 강신(1767-1821)의 아들인 강이오의 초상화는 단아함이란 단어를 상기시킨다. 분홍색 비복을 입고 정면을 향한 인물은 앉아서 접혀진 의습으로 인해 배가 튀어나와 보이고, 굴곡진 옷주름은 몸 전체에 음영을 주어서 입체감을 북돋운다. 가지런한 수염과 부드러운 눈매와 잘 다물려진 입술 등 정제된 인물의 얼굴을 틍해 성격을 드러낸 강이오 초상화는 전통과 당대 새로운 시각을 조화시킨 초상화로 손꼽을 만하다. 화사 이재관이 할동하던 당대 초상화의 전형성을 파악할 수 있다.  


<강노 초상>


  이번에 해외에서 구입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이관함으로써 국내에 소개된 <강노 초상화>는 강세황의 아들 강빈의 아들인 강이구의 아들을 그린 것이다. 분홍색 비복을 입고 사모를 쓴 모습으로 호피가 깔린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화면 상단 오른쪽에 “강 판부사 정은, 기사년 생, 71세 기묘년 9월 진영(姜判府事貞隱, 己巳生七十一歲, 己卯九月眞像)”이라고 적혀 있다. 1879년에 그린 초상화로서 당대 사실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즉 두 개의 산으로 구성된 눈썹, 코에서 인중으로 이어지는 제법 커다란 얽은 자국과 눈 밑의 교차하는 주름까지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대상의 인물적 특징을 잡아내고 있는 것이다. 



  강세황의 얼굴이 길쭉하고 눈이 작은 편이고 인중이 튀어나온 것은 아마도 우리가 그의 노년의 모습을 보아서 그럴 것이다. 사람의 일생을 통하여도 변하고 또 변하는 것이 얼굴이라는 생각이 든다. 젊어서와 나이 먹어서 또 병약할 때와 자신만만할 때 얼굴은 결코 같지 않다. 한 인간의 생애에서도 그리 다른 얼굴이 대를 이어 같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모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를 꼭 닮은 어느 집 손주를 만났을 때의 기분을 5대의 초상화 앞에서 느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스스로 돌아보건대 초상화를 건너가며 들여다보는 사이에 외형의 닮고 닮지 않음보다는 한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 그가 집안에서 어떤 존재였을까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보니,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은 결코 외형이 아님을 알겠다. 초상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결국 인간 모습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삶을 반추하게 하는 장치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8.09.23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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