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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근한 인상, 그러나 잔인한 권력자의 얼굴 <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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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세조(世祖)
장 소 :국립고궁박물관
기 간 : 2018.10.22-2019.1.13

1935년. 화가 김은호(1892-1979)는 일제강점기 황실 업무를 담당하던 기관 이왕직(李王職)으로부터 세조 어진의 모사 작업을 주문받게 된다. 김은호가 보고 그린 것은 1735년(영조11년)에 제작된 모사본. 김은호는 이를 본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다시 채색화 정본을 완성했다. 조수 장운봉과 함께 작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35년 창덕궁 신선원전에서 이당 김은호 화백이 당시 궁에 보존되어 오던 세조의 어진을 새로 그려내는 모습


그러나 세조의 어진은 원본은 물론 영조 때 제작된 모사본도,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김은호의 재모사본(채색된 정본)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전쟁으로 부산의 국악원에 피신해 있던 황실의 유물 4000여 점이 1954년 12월의 용두산 일대 동광동 대화재로 피해를 입을 때 대부분의 어진들이 소실됐기 때문이다.


명종 때인 1548년(명종 3년)까지만 해도 보관되고 있는 태조 영정이 무려 26점에 달할 정도로 많은 어진이 그려졌지만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많은 손상을 입었고, 때로 영정모사도감을 설치해서 모사본을 제작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창덕궁에 보관되고 있던 조선 어진은 총 48점이었다. 한국전쟁의 포화는 피했지만, 결국 허무하게 겨울철의 불씨 하나로 수백년의 귀중한 유물이 하루 아침에 날아가버렸다.

그러다가 2016년 11월 한 국내 경매에 김은호의 그림과 초본들이 대규모로 출품됐다. 초본들은 김은호 선생이 보관해오던 것들. 그중 가장 주목받은 것은 완성본이 남아 있지 않은 세조 어진의 초본이었다. 당시 이 초본의 추정가는 1천만~5천만 원으로 책정되었으나 7,200만원에 낙찰되었다. 낙찰기관은 국립고궁박물관.


2016년 11월 서울옥션에 출품될 당시의 세조 어진 초본


 옥션에 함께 출품되었던 김은호의 초본들


이 초본이 수리를 거쳐 2년 만에 처음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지하에 전시되고 있는 이 초본은 세조의 모습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가 됐다.

전시되고 있는 세조 어진 초본


재작년 초본이 공개됐던 당시에도 그림에서의 세조의 얼굴이 날카롭고 영욕과 권력에 도취된 그간의 이미지와 영판 다른 인상이어서 놀라움을 주기도 했다. 우리가 상상했던 수양대군의 난폭한 이미지와 전혀 겹쳐지지 않는 얼굴이다. (영화 '관상'에서 생성된 이정재의 이미지가 너무 강력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세조의 실제 모습과 어느 정도 비슷할까. 이 얼굴로 친동생과 조카를 죽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세조 때 그려진 원본은 실물과 유사성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두 번의 모사본 제작에서는 어땠을까.


영조 대의 세조어진 모사에 대한 기록 『영정모사도감의궤』를 보면 다음과 같은 일정으로 일이 일사천리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 1735년 7월 28일 세조 영정이 오랫동안 상한 채 물에 젖고 형상을 분간할 수 없게 된 것을 보고 신하들과 의논하여 모사하기로 결정.
 - 8월 29일 초본 모사 시작.
 - 9월1일 정본 상초 모사 시작.
 - 9월10일 완성.
 - 9월 16일 장황.
 - 9월 17일 장축, 봉안.

새로 제작된 어진의 세조 모습에 이견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 영정모사도감에 조영석을 감조관으로 오라 명했으나 거부하여 의금부에 끌려갔다는 기록도 있고, 윤덕희도 불렀으나 안 왔다고 한다. 주관화사는 이치, 동참화사는 장득만, 김익주, 수종화사는 양희맹, 양기성으로 기록돼 있다.


초기의 어진 제작 관련 의궤는 한 건도 남아 있지 않아서 그 이전의 일은 알 수 없다. 단지 1669-70년 세조 어진의 수보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당 김은호 화백은 이왕직의 요청으로 순종과 세조, 원종의 어진을 모사한 적 있는 유일한 어진화가로서 1969년 당시 세종대왕의 동상에 수염이 너무 많다는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다. 자신이 본 바 세종의 아들인 세조도 수염이 없었고, 태종도 없었다는 것. 수염이 많은 것은 영조와 고종 뿐이라고 한다.


어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곤룡포의 문양은 자세하고 진하게 표현되어 있으나 상대적으로 얼굴 부분은 흐리고 덜 정교하게 묘사된 상태로 남아 있다. 


어진초본의 복제품과 초본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실


국립고궁박물관의 전시는 세조 ‘어진’에 중심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세조’에 중심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진 및 모사본의 제작과 복원 과정이나 초상화 양식 등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고, 세조에 대한 자료와 역사적 맥락에 대한 관련자료 30여 점으로 전시를 구성하고 있다. 

전시관에서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형님인 문종의 지시로 육지에서 전투의 진을 짜는 방법을 모아 편찬한 진법, 세조 10년에 불교서적 '선종영가집'을 번역해 펴낸 '선종영가집언해', 조선시대 세조 어진에 대한 보수와 모사 작업을 기록한 등록 등을 볼 수 있다.


세조 어진은 한양이 아니라 그가 묻힌 남양주 광릉 전각에 모신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양란에도 살아남았다. 또 두 번의 모사로 재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소실되었지만, 김은호가 모사작업을 할 수 있었고 초본이나마 전해지는 끈질긴 운명을 타고 났다. 그가 왕위 찬탈을 위해 동생 안평대군과 조카 단종을 죽이고, 단종 복위를 시도한 이들 또한 잔혹하게 처형하고, 권력 유지를 위해 많은 업적을 세우고 세세한 부분까지 자신이 참견하며 노력했던 그 지독함이 그런 운명을 만들어냈을까.


초상화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둥글둥글 인자해 보이는 얼굴과 알아보기 힘든 눈빛 때문에, 초기 왕권 강화와 권력쟁취를 위해 사사로운 정은 모두 끊고 잔인하게 살았던 독한 권력자의 모습도, 말년에 그것으로 인해 괴로웠던 한 인간의 고독한 모습도 발견하기 어렵다. 보는 이가 아직 세상을 덜 살아서 그런가보다.

SmartK C. 관리자
업데이트 2018.12.15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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