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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집] 20세기에 가장 성공한 퍼포먼스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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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뉴욕 MoMA 회고전 이후 업데이트 버전
-≪더 클리너the Cleaner≫ 피렌체 팔라초 스트로치 미술관. ~2019.1.20

글/ 김진녕

피렌체의 팔라초 스트로치 미술관에서 20세기 행위예술의 대명사로 꼽히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1946년 생, 세르비아 출신)의 회고전 ≪더 클리너the Cleaner≫(~2019.1.20)가 열리고 있다. 1970년대 후반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선보였다가 경찰의 제지로 중단된 누드 퍼포먼스부터 2010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전시까지 그가 선보였던 거의 모든 퍼포먼스가 선보이고 그 중 일부, <필링 시리즈the Freeing series>(1975), <측정할 수 없는 것Imponderabilia>(1977), <클리닝 더 미러CLEANING THE MIRROR>(1995), <작가는 참석중Artist is Present>(2010), <쌀알 세기Counting the Rice>(2015)는 현장에서 재공연되거나 관객참여형으로 진행하고 있다.






<측정할 수 없는 것Imponderabilia>(1977)


그의 작품 중 최근에 자주 호명되는 작품은 2010년 MoMA에서의 <작가 참석 중(Artist Is Present)>이다. 3개월여의 회고전 기간 동안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미술관에 출석해 736시간 30분 동안 관객과 눈을 맞췄다. 이 퍼포먼스에 줄을 서서 보거나 참여한 관객은 75만명이 넘었다. 뉴요커와 미술동네 SNS는 이 퍼포먼스로 뒤덮였다. 거의 현상이었다. 60대 퍼포먼스 아티스트가 미술관을 찾는 사람을 넘어서 미술관 밖 일반 대중에게 SNS를 통해 부활한 것.


<작가는 참석중Artist is Present>


이 퍼포먼스에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를 <측정할 수 없는 것Imponderablilia>(1977)을 통해 동유럽의 ‘자해 퍼포먼스’ 아티스트에서 동시대 서유럽 작가로 각인시킨 울레이 울레이(독일 출신, Ulay, 본명 Uwe Laysiepen)도 참여해 화제성을 증폭시켰다. 아브라모비치가 1976년 암스텔담으로 이주하면서 예술적으로도, 사생활에서도 파트너가 된 두 사람은 1988년 울레이는 고비사막에서 출발하고, 아브라모비치는 황해에서 출발해 만리장성에서 만나는 퍼포먼스 <연인들the Lovers>을 끝으로 헤어진다. <측정할 수 없는 것Imponderablilia>(1977)으로 센세이셔널한 서유럽 이주 신고식을 한 이 커플은 헤어짐도 퍼포먼스로 세상 만방에 고한 것. 물론 그 이유는 다른 모든 헤어지는 연인들의 사례처럼 고상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리고 2010년 울레이가 아브라모비치의 회고전이 열리는 MoMA를 ‘우연히’ 찾았다가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에 동참하게 된다. 말없이 3분간 작가와 관객이 서로를 응시하는 이 퍼포먼스는 울레이의 등장에 룰이 깨진다. 말없이 바라보던 두 사람이 각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고 아브라모비치가 손을 내밀어 두 사람이 손을 맞잡았다. 20대 초반에 만나서 40대 초반에 헤어진 뒤 20여 년만에 만난 옛 연인이자 작업 동료에게서 아브라모비치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런 배경과 근경, 현장의 화면이 더해지면서 이 퍼포먼스는 큰 화제가 됐다. 지금도 유투브에 당시 두 사람의 퍼포먼스가 담긴 영상이 떠돌고 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이번 전시에 울레이와 만난 초기에 함께 살았던 시트로엥 자동차를 미술관 입구에 세워놓았다. 일종의 회고전 시그니처. 울레이와 함께 한 시절에 대한 존중으로 보인다.




<클리닝 더 미러>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작품 중 가장 최근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지난해 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몸으로 쓰다>전에서다. 이 전시에 그의 작품 <발칸연애서사시>(2005년)가 소개됐다. 화려한 민속 의상을 갖춰입은 발칸 반도 거주자들이 남자는 성기를 드러내고 여자는 가슴을 드러내고 기우제나 풍어제를 지내는듯한 간절한 몸동작을 취하는 영상은 19금이기는 하지만 코믹함이 먼저 다가온다. 20대 시절 몸을 캔버스 삼아 칼로 죽죽 그어내리던 아브라모비치가 이런 ‘달관’의 경지까지 오는데 40여 년이 걸렸다. 물론 이 작품도 팔라초 스트로치의 회고전에 걸렸다.


이 작품과 나란히 걸린 게 1997년 그에게 베니스비엔날레 대상을 안겨준 <발칸 바로크>. 전시장에 소뼈 1500개를 쌓아놓고 작가가 매일 6시간씩 소뼈를 닦아내는 퍼포먼스였다. 이 작품의 근경에는 1990년대 초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대학살이 있다. 독재자이자 2차 대전 뒤 제3세계 비동맹 운동의 지도자를 자임한 티토가 죽고나자 그가 억지로 그러모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동유럽 붕괴 흐름을 타고 산산 조각이 났다. 과거 유고슬라비아의 영토였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일어난 학살과 인종청소는 2차대전 중 일어난 유태인 학살을 능가하는 비극이었다.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계가 갈등을 일으킨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비극은 결국 세르비아에 대한 엄청난 국제적 비난이 쏟아지면서 수습됐다. 유고 시절 공산당 엘리트의 딸로 태어났고 아직도 자신의 나라를 ‘유고슬라비아’로 부르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비극에 유럽의 관심이 쏠려있을 때 나름의 센세이셔널한 방식으로 진혼곡을 부른 셈이다.


<발칸 바로크>


이렇게 기민하게 시대의 흐름과 이슈를 파악하고 퍼포먼스에 옮겼기에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계속 미디어의 총애를 받았을 것이다. 1977년 볼로냐 현대미술관 입구에서 울레이와 함께 나체로 문을 지키며 관객이 그 문을 통과해야만 입장할 수 있었던  <측정할 수 없는 것Imponderablilia>(1977)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휘발성이 큰 이벤트다. 지금 한국에서 이를 실행한다면 풍기문란을 이유로 40년 전 볼로냐처럼 단속 대상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재미있는 점은 그의 작업이 인생 후반기로 가면서 자극과 놀람보다는 내면의 성찰과 자기 수행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1988년의 2500km를 각자 이동해 만나서 헤어지는 <연인들>이후 1997년의 <발칸 바로크>와 2005년의 <발칸 에로틱 서사시>, 2010년의 <작가는 참석 중>까지의 여정을 보면 점차 작가가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전시장 말미에 설치된 <쌀알 세기>는 검은 쌀과 흰 쌀을 섞어서 잔뜩 쌓아놓고 자원한 관객이 이를 하나 하나 분류하고 있다. 반복적으로 쌀알을 나누고 세는 행위에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매순간 염불하듯 기도하듯 자신의 내부를 빈공간으로 만드는 것일까.


<쌀알 세기>


1970년대부터 퍼포먼스를 통해 작업을 통해 대중에게 말을 거는데 성공한 아브라모비치의 좌표는 지금 거기다.



글/ 김진녕 관리자
업데이트 2018.12.1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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