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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0세에 선보이는 초상화의 세계, 윤석남의 벗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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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윤석남-벗들의 초상을 그리다
장 소 : OCI 미술관
기 간 : 2019.11.7-12.21
인터뷰 및 글/ 김진녕

-윤두서와 박두진, 20세기 말의 한국 페미니즘이 초상화로 만나는 풍경  


1939년생 화가 윤석남의 개인전 <벗들의 초상을 그리다>(~12.21)이 열리고 있다. 
그의 벗 22명의 초상화와 자화상 수십점이 걸렸다. 한지에 붓으로 그린 그림이다. 
서양화로 시작해서 한지에 전통 붓으로 한국화에서 사용하는 전통 안료로 그린 초상화다. 작가는’채색화’, ‘한국화’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했다. 앞으로도 일제강점기 여성 독립운동가 백인의 초상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팔십 넘은 나이에 전통 초상화의 세계에 진입한 작가의 얘기를 들어봤다. 

- 초상화를 그리게 된 계기는. 
십여년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초상화전이 있었다. 거기서 공재 윤두서의 초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끝나기 전까지 몇번을 갔다. 그 앞에서 기도하듯 봤다. 그림을 보면서 이사람과 눈을 마주치면서 대화를 하게 된 게, 나 혼자만의 상상인지, 그림이 주는힘인지 구분이 안되지만, 나는 그걸 느꼈다. 이게 한국 초상화가 주는 힘이 아닐까. 이게 대체 뭐지, 공부를 하고 싶었다. 
어떻게 이런 걸 모르고 살아왔을까. 헛살았다. 이런 걸 모르고, 그림을 그린답시고 삼십여년을 살았나. 다시 공부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태호 선생(전 명지대 교수)께 전화를 했다. 아는 분이 그 분 밖에 없었고, 용기를 내서 전화를 했다. 소개를 해달라고. 그때 이태호 선생의 전화기 옆에 김현자(경기무형문화재 제28호 이수자, 불화전공) 선생이 바로 옆에 있었다고 한다. 그 분에게서 붓사는 법, 먹가는 법, 채색에 대해 배웠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오늘날 이렇게 전시까지 이어졌다.


앞으로도 설치작업을 하겠지만, 채색 재료도 사실 재료는 일본에서 오는 것이다. 물감이 한국에서 되는 게 많지 않다. 다 일본에서 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건 한국화지 않나. 
힘이 닿는한, 한국화쪽으로 더 열심히 하고 싶다. 
그림이라는 게, 새로움을 창출하고 발견하는 것이다. 그림을 통해서 새로운 정신을 개발하고 찾아내고 자기 나름으로 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화는 뒤로가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나는 뒤로가도 괜찮아. 더 늙기 전에 그리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다. 
약간, 그림을 봤을 때 이게 한국화인지, 서양화인지 헛갈릴 것이다.  
이게 먹으로 하고, 라인을 그리고, 한국화는 붓-라인인 것 같다. 내가 잘모르는 것일수도 있지만 한국화는 붓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나는 작업할 때 전부 한국 붓을 쓴다. 서양식의 넓적한 붓은 안쓴다. 나이가 먹어서 너무 애국자가 되는지, 내가 애국자란 말을 싫어하는데.. 점점 더 그렇게, 자기 것을 찾아가게 되더라. 

- 전통 붓과의 인연은.  
내가 그림하기 전 서예를 4년 동안 했다. 그리고 서양화 하는 2년을 빼고 전부 전통 붓으로 그렸다. 붓쓰는 것만 자신있다. 
36세에 붓글씨를 배우기 시작해서 마흔살까지 시인 박두진 선생에게서 한자 서예를 배웠다. 일주일에 한번씩 숙제를 해가는데, 내가 100장씩 해가고 그랬다. 

박 선생의 초서가 일품이었다. (선생의 글씨를 따라쓰는)임서만 했다. 서예를 죽을 때까지 하려고 했다. 내가 너무 숙제를 많이 해가니까, 박 선생이 이렇게 많이 안가져와도 되요,라고 하시더라. 
너무 임서만 하니까 지겨워지던 어느날 ‘선생님 저는 언제 제 글씨를 쓸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박 선생님이 ‘20년만 기다리면 돼’라고 하셨다. 
선생님에게 감히 뭐라고는 못했지만, 여기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시인(박두진)은 거짓말 못하시는 애기 같은 분이었다. 임서 20년이 끝나야 자기 글씨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선생을 아무리 존경하지만 임서로 끝낼 수가 없지 않나.
그 다음부터 죄송합니다,라고 하고 안나갔다. 20년은 못기다리겠더라. 얼마안돼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림을 시작했다. 
 


- 붓글씨는 계속 했나. 
그림 작업을 하면서 부터는 글씨를 못썼다. 성격상 두 가지를 동시에 못하기에 글씨는 버렸다. 
그때는, 솔직히 말하면 한국화는 그림이 아닌줄 알았다. 너무 이상하고 우습고 치졸해 보였다. 
내가 (한국화를)모르니까. 그림이라고 하면 서양화라고 생각했다. 곰브리치의 책을 외우다시피 읽고. 지금 젊은 친구들이 서양문물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나도 그랬으니까. 이게 다 학교 교육 때문이다. 
20여년 전엔 한국화는 반복적이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서양화는 그렇지 않고.
그 때 내눈엔 서양화는 화려한 입체감, 묵직함, 시간을 많이 들여서 붙이고, 칠하고 또 칠한 묵직함이 있어 보였지만 한국화는 붓으로 몇번 휙 돌리고 점찍고 끝 낸 것이었다. 내가 그걸 그 나이에 어떻게 이해했겠나. (웃음) 지금은 ‘몇 번 휙하고, 점찍는 게’ 어렵다는 걸 안다.  

- 서예로 시작했으면 한국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었는데.   
그게 테크닉만 배운 것이다. 박선생도 ‘늙은 여자들’에게 서예사를 가르킬 생각도 의욕도 없으셨던 것 같다. 내 생각엔 그저 취미생활이나 하라고 가르친 듯하다. 
선생님이 들으시면 화내실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생각엔 그랬다. 하지만 나는 뭐든 시작하면 목숨거는 스타일이었고. 그때 안하길 잘한 것 같다. 

- 초상화는 종이에 그렸나.
장지다. 아교 안 먹인 종이는 아직 못써봤다. 다음부터는 아교 안 먹인 종이에 그려보려고 종이를 사 놨다. 한국 종이만 쓴다. 

- 붓이나 전통 안료로 도구가 바뀌면서, 묘사 대상도 바뀌나.
바뀔 수 밖에 없다. 윤두서 초상을 보고 충격을 받고 초상화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 전에도 서양화 할 때도, 유화할 때도 한국 붓으로 그렸다. 나무를 칠할 때도 모두 전통 한국 붓으로 썼다. 전통 붓 쓰는 것은 좀 자신이 있다. 그래서 욕심을 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종이 위에 하는 작업이, 캔버스보다 너무 느낌이 좋다. 
뭐라고 할까. 따뜻하다고 할까. 표현하기 힘든데, 나한테 잘맞는다. 나는 그렇다. 종이가 잘 맞는다.
하다못해 눈을 표현할 때도, 라인 하나만 잘 그려도 눈의 느낌이 확 산다.
유화는 덧칠하고 덧칠하고 끊임없이 묘사를 해야 한다. 내가 경험한 한국화는 묘사가 아니라, 획이다. 정신의 집중체 같은 느낌이다. 묘사가 아니다. 붓질 한번에 생명력을 딱 불어넣어 준다고 할까. 이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데 나무에 눈과 코와 입만 그려도, 나와 대화하는 느낌이 딱 든다. 
나만 이런 느낌을 받는 게 아닌 것 같다. 한국화 하시는 분은 다 이런 느낌이 있지 않을까 싶다.  

- 이제 한국화가라고 불러야 하나?
한국화가? 조선화가?(웃음) 나는 뭐라고 함부로 정하지 못하겠다. 한국화,라고 얘기한다. 한국이란 말이 조선보다는 내 생애에 더 가까우니까.  
동양화라고 하는 것은 내가 좀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게 동양화일까?
채색화라고 얘기하는 것은 좋다. 

- 이번 벗의 초상이 22점이다. 
여지껏 그린 게 22점 뿐이다. 
22명은 분명한 뜻이 있다. 그냥 친구가 아니라, 내가 그림을 시작한 이후, 내 그림에 관계한, 정신적으로 내 그림에 연필 하나라도 놓아 준 그런 친구만 그린 것이다. 친구가 많지만 그런 차원에서 골라 그린 것이다.


- 여자만 그렸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이태호 선생만 빼고는 모두 여자에게 도움을 받았다. 작업 시작 이래 남자도 좀 해보려고 했는데, 남편도 있고 그래서 해봤는데 남자 그리기는 잘 안 된다. 남편은 오분 정도만 작업실에 있다가 가는 사람이고.(웃음) 몇 년 동안 와보지도 않고.  
붓질을 가르쳐 줬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서적으로 연대가 있고 음으로 양으로 내 그림 작업과 관련이 있는 분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가정주부로서의 일을 완벽히 할 수 없게 되니까 일주일에 두 번 씩 청소만 해주는 분이 있다. 벌써 15년 됐다. 그 분은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가정 일을 도와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내가 초상화로 초대했다. 그랬더니 그 분도 좋다고 응해서 그렸다. 
 
(이번 초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미술사가, 큐레이터, 동료 화가, 가수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 남자 그림은 왜 안 되나?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10년이고, 5년이고 (계속 그린)상대는 나였고, 모델도 전부 여성들이었다. 남성 모델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건 습관인 것 같다. 남편도 있고 남성 화가도 많이 알고 지내지만. 
남성 모델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게 표현이 안 될 것 같다. 아무튼 안 그려봐서 모르겠다. 그리고 아무래도 내가 여성의 삶에 관심이 집중돼어 있으니까. 
윤두서 초상화에 강렬함에 매료됐을 때 대여섯 권의 책을 사서 전통 여성 초상화에 대해 알아봤다. 
거의 없었다. 조선 5백년 동안 두 명인가 있었다. 그것도 이름도 없는 여인 초상이었고, 근대에 그려진 작품이었다. 그랬구나, 그럼 나는 ‘내가 관심이 있는 여성의 초상을 그려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여성 초상화를 그리려고 한다. 

- 가수 한영애는 어떤 도움?


내가 그림 처음 시작하고 1년인가 2년인가 있다가 그룹전을 했다. 그때 서울시립미술관장했던 김홍희가 기획하고 박영수 윤석남 등 4명이 공동작업을 했다. 그때 한영애가 노래로 참여했다. 전시 내내 한영애의 노래를 틀어놨다. 그때 처음 만나서 그 다음부터 계속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그 전시에 포스터를 내가 만들었는데, 거기 한영애 얼굴이 들어가 있다. 

- 이번 초상화는 처음 만났을 때 모습인가?
모델로 삼은 분에게 (어떤 모습이 그려지고 싶은지)당신들 마음대로 선정하라고 얘기했다. ‘내가 어느 때 어느 시기의 얼굴이 좋아’, 그런 건 당신들에게 맡길게. 사람당 열 장 정도의 사진을 받고 상의해서 그렸다. 상황 묘사는, 내 의견이 들어갔다. 그 사람이 이런 삶을 살았을 것 같아, 나와 관련된 부분은 이거야… 물론 그들의 삶이 그대로 들어간 초상도 있다. 

- 이번 전시에 출품된 설치작에도 강아지가 들어간다. 
현재 안양사 터에 1,025마리의 강아지 시리즈를 설치했다. 주최측이 마음에 들게 전시했다. 
실제로 내가 만든 것은 1,400마리인데 1,025는 상징적인 숫자다. 
2003년에 동아일보미술관에서 전시할 때 유기견 1,025마리를 돌보는 이애신 할머니 얘기가 실렸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 철렁했다.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다음에 이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서 만났다. 나보다 한 살 아래더라.
가서 보니 비참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 같은 회원들이 먹이구입을 도와주지만 철망에 넣어두었더라. 현장을 보고 집에 가서 많이 울었다. 그때 인간이 갖고 있는 야비함, 천박함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작품으로 만들었다. 인간이 갈 수 있는 마지막 천박성, 그게 기르던 개를 버리는 것이다. 하나의 생명체인데. 1025를 작업하는데, 유태인 학살도 떠오르고 그랬다.  


이번 전시의 설치작 <신가족>에도 개가 등장한다. 새로운 가족 형태, 개도 피로 연결된 가족만큼 그렇게 여겨지는 시대가 됐다. 그런 새로운 가족 개념을 보여주고 싶었다. 

- 개를 기르나. 
내 남편, 지선이 아빠는 집 안에서 개를 기르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작업실에서 기른다. 
딸이 완벽한 애견인이다. 개를 딸처럼 아들처럼 기른다. 나는 개 작업을 통해 인간의 야만성을 애기하고 싶었다. 

- 요즘 작업은?
(그리기)편안한 대상이 없으니까 거울 놓고 연습하고 그리다보니 자화상이 많아졌다. 
나는 가능하면 초상화를 하고 싶다. 꼭 하고 싶은 초상화가 있다. 아직 관련된 책을 못샀는데 일제시대 때 저항했던 여성 백인이 있다. 그때 여성의 삶을 생각해보고, 마음을 생각하고, 그럼 얼굴이 어떻게 생겼을지 떠오를 것이고... 내 마음은 그 백명의 여성 얼굴을 그리고 싶다. 
이번 전시 끝내면 1년 정도 그림을 안그리고 조사하고 연구를 하고 싶다. 


- 초상화의 매력은 무엇인가. 
일단은 상대방의 삶을 내 나름으로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한순간으로 잡아낸다. 재미있다. 얼굴이 안예쁘게 나오는 것을 걱정하는 것보다, 한순간을 잡아채서 객관화시키는 것, 그게 또 공감을 얻어내는 것, 그런 작품이 아무런 상관없는 제 3자로부터 공감을 얻어내는 게 매력있는 작업이다. 
일제하 여성 백인의 초상이 결실을 맺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각 한사람 다 역사가 있는 삶인데. 매력이 있는 작업이다. 무척 기대가 되는 작업이다. 잘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지만. 연구를 많이 해야한다. 그래서 1년 동안 그림을 안그리고 연구만 하려고 한다. 

- 공재의 초상화를 본 이후 한국화를 재평가하게 된 작품이 있나?
뭐라고 말하기엔 내가 기억력이 부실해서….
하지만 그 전에 보지 못하던 것, 예를 들어 풍경화(산수화)도, 강에 배 하나 떠있고 섬있는 그림에서도, 하늘도 보이고 산도 보이고 그러더라. 전에는 먹으로 붓질했구나 했는데, 이제는 세계가 보이더라. 내가 투영을 하는 것인지, 자신은 없는데, 내 정신이 거기 몰두하라고 나한테 시키는듯하다. 요새는 너무 좋다. 아주 단순한 그림도 너무 좋다. 
물론,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림도 있다. 한국화라고 말하는 특유의 풍경화, 단풍과 산, 집을 그린 그런 류의 그림엔 아직 아무 느낌이 없다. 친척 중에 취미로 그리는 이도 있는데, 열심히 그려서 보여주는데, ‘참 이상하다’ 그런 생각만든다.(웃음)  
수묵이나 채색 다 좋아한다. . 
18세기 일본 기생을 그린 그림이 있는데 눈동자가 살아있고, 일본 옷과 천을 표현한 게 기가 막히더라. 이건 그 전까지는 못느낀 세계였다. 기교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공부하면서 이런 작업을 할 수 있을 시간이 될까 싶어서 안타깝다.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계속 공부하며 그리고 싶다. 앞으로 어떻게 그릴지, 컬러풀하게 그릴지, 먹으로만 그릴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 채색화는 일본풍이라는 논란도 있다. 
고려 때 불화를 보라. 그건 채색화다. 나는 불화를 깊이 연구한 적은 없지만, 책으로만 봐도, 채색화는 한국화다. 


인터뷰가 끝나고 함께 작품을 보러갈 시간이 됐다. 
윤석남 작가가 혼잣말을 했다. 
“나 여기 있을까봐. 말은 근사하게 해놓고, 그림은 엉망이고 그럼…….”


글/ 김진녕 관리자
업데이트 2019.12.05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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