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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화의 ‘현대’를 끌어냈던 ‘삼중 통역사’ 박래현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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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미국에서 당대를 배우고 ‘한국화’로 소화해낸 박래현

전시명 : 탄생 100주년 기념: 박래현, 삼중통역자
장 소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기 간 : 2020.09.24~2021.01.03
글/ 김진녕

20세기 후반 한국화를 대표하는 미술가 박래현(朴崍賢, 1920-1976)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박래현, 삼중통역자>전(~2021년 1월 3일)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문을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개막 직전까지 이어지던 방역 2.5단계가 2단계로 완화되면서 관람객과의 만남이 이뤄지고 있다.


박래현에게 ‘여류’라는 말을 붙이는 게 군더더기인 작가다. 20세기 후반의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한국화의 대표 작가다. 식민지 시대 말기에 도쿄에서 일본화를 배웠지만 해방 뒤에는 전통을 답습하지 않는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회화를 선보였다. 1960년대 초반부터 추상적인 세계를 모색하던 박래현은 40대 후반이던 1969년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떠나 현대미술의 심장에서 6년 동안 당대의 추상화와 태피스트리, 판화를 탐구했다.

전시는 이런 박래현의 작품 활동 여정을 연대기적으로 구성하고, 각 시기별 대표작품을 촘촘하게 전시장에 등장시켰다. 네 섹션으로 구성된 전시의 들머리는 1943년 작 <단장>을 시작으로 하고, 그 옆에 한복을 입은 여인의 뒷모습을 담은 <여인>(1942년)을 배치했다. 20대의 그가 옆모습이나 뒷모습만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섬세하고 기량이 좋은 작가였는지 두 작품만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이어지는 연대기적 작품 배열은 그가 70년대 중반 현대 추상의 세계를 다루기 까지 작품의 주제와 구현의 틀이 계속 이어가며 발전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최 측은 “섬유예술이 막 싹트던 1960년대에 박래현이 선보인 태피스트리와 다양한 동판화 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1970년대에 선보인 판화 작업들은 20세기 한국 미술에서 선구적인 작업으로 기록될 만하다. 이러한 성취에도 대중에게 박래현은 낯설다. 가부장제 시대는 ‘박래현’이라는 이름대신 ‘청각장애를 가진 천재화가 김기창(1913~2001)의 아내’라는 수식을 부각시켰다. 이번 전시는 김기창의 아내가 아닌 예술가 박래현의 성과를 조명함으로써 그의 선구적 예술작업이 마땅히 누렸어야할 비평적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한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일반인 사이에 박래현이라는 이름은 김기창의 부인으로 더 많이 알려져있다. 김기창이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타고난 재주로 청각장애라는 장애물을 넘어서 ‘이당 김은호의 수제자’로 20세기 중반 한국 사회의 스타였기 때문에 늘 박래향의 이름은 ‘스타의 아내’이자 신사임당상을 받은 ‘현모양처’의 틀안에서 미디어에서 다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래현의 삶을 보면 그는 늘 그가 선택한 방식으로 삶을 이어나갔고 도전과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지주 집안 출신의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여성이 김기창을 결혼 상대로 선택한 것은 집안의 결정이 아니라 그의 결정이었다. 결혼 뒤에도 작품 활동을 보장하라는 조건을 내걸은 것도 그였고, 아이를 넷을 낳고 기르는 과정에서도 작품 활동을 쉼없이 이어갔다.


이는 결혼 전 그의 이력이 또래 화가와 견줘 더 도드라졌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1943년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 양화과를 졸업한 서양화가 배동신(裵東信, 1920~2008)이나 1942년 다이헤이요미술학교(東京太平洋美術學校)를 졸업한 서양화가 김영주(金永周, 1920~1995)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박래현 역시 1944년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 일본화과를 졸업했다. 박래현은 졸업 전인 1943년 제22회 선전에서 <단장>으로 최고상을 타며 이미 두각을 나타냈다.

박래현은 1940년대 일본에서 배운 것으로 배움을 끝내지 않았다. 1963년 김기창이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작가로 참여를 전후해 박래현과 김기창은 동반 해외여행을 자주 다녔다. 그러면서 박래현은 새로운 세계, 현대 회화의 흐름에 눈을 떴다. 1967년 9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는 박래현이 작가로 참여했다.


상파울루 비엔날레 2년 뒤인 1969년 박래현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미국 뉴욕의 밥 블랙번(Bob Blackbunn) 연구소와 프렛(Pratt) 그래픽 센터에서 판화와 타피스트리(tapestry)를 공부하고 1974년 귀국했다.

1960년대 초반 한국 화단은 외국 잡지로 독학한 ‘한국형 앵포르멜’분이 일다가 60년대 후반들어서는 단색조 회화쪽으로 회귀하는 분위기였다. 한국화는 60년대는 물론 70년대까지 전성기였다. 그 와중에 김기창과 동갑인 김환기가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여 뒤 귀국하는 길에 뉴욕에 눌러앉아 뉴욕 시대를 열었다. 한국 현대 추상회화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최욱경(1940~1985)이 미국유학을 떠난 것은 1963년이다. 1970년대 중반 귀국했다. 최욱경은 학창 시절 김기창,박래현 부부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운 이력이 있다. 그런 시대에 박래현은 이미 네 아이를 둔 학부형이자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작가로 참여할만큼 한국에서 이미 자리를 잡은 작가였지만 새로운 배움을 위해 유학을 떠난 것이다.

1974년 귀국한 박래현은 새로운 기법을 통해 전통 한국화와 판화 기법을 섞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줬다. 다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다. 1976년 1월 갑작스레 발병한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전시장에는 그가 병상에서 작업한 마지막 드로잉 두 점도 나왔다.


전시장에는 회화, 판화, 태피스트리 등 작품 총 138점이 등장했다. 1985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렸던박래현 10주기 회고전 이후 최대 규모의 전시다. 박래현의 작품을 다수 소장했던 한 재벌가가 문을 닫은 뒤 작품이 흩어졌을 것이라는 등 소문만 무성했던 여러 작품, 그동안 공공 장소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다수의 작품을 모으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전시이자, 그걸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서울 전시 이후에는 청주에서 전시가 이어지지만 코로나 시대에는 ‘미술관 문’이 요즘 ‘국시’인 방역의 본보기로 휘둘리는 시대라 문을 열 때 보는 게 우선이다.



글/ 김진녕 관리자
업데이트 2020.11.26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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