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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대 한국 실험미술의 소환, 최병소의 경우 - <의미와 무의미 SENS ET NON-SENS: Works from 1974 to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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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소환빈도를 높여가고 있는 70년대 한국 실험미술

전시명 : 意味와 無意味 SENS ET NON-SENS: Works from 1974-2020
장 소 : 아리리오갤러리 서울
기 간 : 2020.11.26 ~ 2021. 2. 27
글/ 김진녕



금속성 광택마저 발하고 있는 까만 종이는 자세히 보면 물리적인 줄무늬가 보인다. 계속 볼펜으로 까만 선을 그어 까만 면을 만든 것이다. 종이는 신문지다. 까맣게 칠해진 신문지는 애초 인쇄되었을 어떤 활자도, 의미도 읽을 수 없다. 무한대에 가까운 반복적인 줄긋기 행위로 의미와 맥락을 해체해 버리는 이 작업은 최병소 작가(b.1943)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최병소 작업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는 1970년대의 설치 작업과 최근의 줄긋기 작업을 함께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아리라오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개인전 <의미와 무의미 SENS ET NON-SENS: Works from 1974 to2020>(~2.27). 전시장은 최병소의 최근 작품과 그가 70년대 중반 한국 행위미술 작가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던 대구현대작가협회와 대구현대미술제에서 활동했던 당시의 작품을 재설치한 작품으로 꾸며졌다.




아라리오쪽에선 이 전시가 “작가의 예술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1970년대 초기 작품과 최근의 작품을 병치시킴으로써 1970년대 초반 전위적 한국 실험미술의 태동과 단색화의 경향을 관통하고있는 최병소만의 독특한 미술사적 위치를 재고하고자” 기획됐다고 밝혔다.

전시의 제목 <의미와 무의미 SENS ET NON-SENS>는 작가의 작품 <무제>(1998)에 사용된 메를로 퐁티의 저서(1948)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격인 볼펜으로 선을 그어 완전히 까맣게 만드는 작품과는 달리 너덜너덜하게 헤진 종이라는 물성만 보인다. 작가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작업은)고된 과정이다. 너무 지루해서 몇 년간 작업을 중단한 적도 있다. 내 그림에 형상은 없지만 형식은 있다. ‘나’라는 주체를 생각하지 않을 것. 숨 쉬거나 걸을 때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습관처럼 하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서 ‘의미와 무의미’를 구해서 다 쓴 볼펜으로 책 모서리를 계속 긁었다. 펜으로 상처 낸 책을 미술관에 전시했다. 이 행위가 곧 의미이자 무의미라는 차원이었다.” (2020년 11월3일자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 중)





최병소의 신문지에 볼펜으로 줄긋기 작업은 1975년에 시작됐다.
“1975년 어느 날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데 돌아가신 친할머니와 똑 닮은 할머니가 노점에서 LP를 팔고 있었다. 할머니 생각에 그 LP를 사들고 집으로 왔다. 불경(천수다라니경)이었는데 그때 문득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신문지가 눈에 들어오더라. 그게 시작이었어다.”(2015년 3월6일자 헤럴드경제 인터뷰) 그는 70년대에 줄긋기 작업을 담은 비디오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결국 신문지에 볼펜 긋기는 그의 대표 작업이 됐다. 요즘 선보이는 그의 이력에는 80년대가 공백으로남아있다. 그는 80년대에 선긋기 작업을 중단하고 대학원 과정을 밟았고 회화쪽으로 관심을 돌렸다고 한다. 하지만 90년대에 다시 그가 소환됐을 때 들고 나온 것은 줄긋기 작업이었다.




1970년대 한국의 현대미술계는 60년대를 달궜던 앵포르멜 그룹이 단색화 계열로 넘어가던 시기다. 김구림이나 박현기, 성능경, 이강소, 이건용, 최병소 등이 활동한 1970년대의 실험적 미술 그룹의 활동은 사회비판적인 맥락이 작품 속에 깔려있다. 최병소도 몇몇 인터뷰에서 그런 맥락을 언급하기도 했다. 지난 2018년 대구미술관에서 한국의 행위미술 50년(1967~2017)을 조망하는 전시에 ‘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이란 이름이 붙은 것도 기존 권위에 대한 도전은 물론, 사회 비판적인 맥락도 포함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전시에 최병소도 참여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최병소의 작업에는 일상의 하잖은 물건이 주요 소재로 쓰인다. 신문지, 볼펜, 연필, 의자, 잡지 사진, 안개꽃, 분필, 윷과 군용담요 등으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아쉬운 점은 70년대 작품은 사진 전시물 두 점을 빼고는 모두 ‘재현’이란 점이다. 작가의 대구 작업실이 침수되어 1970-80년대에 제작된 작품 대부분이 유실 또는 파손됐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사진 작품 두 점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 사진을 이용해 만들어진 <무제 9750000-1>(1975)은 푸른 창공을 나는 새 두 마리의 사진과 sky, cloud, wind, birds, flying, meeting이라는 단어가 인쇄된 종이가 맞물려있다. 6개의 단어로 사진이 설명될 수도 있지만 6개의 단어만 듣고 왼쪽 사진을 떠올릴 수는 없다. 해석과 경험, 선입견, 시각언어와 문자언어의 괴리로 이 작품은 관람객에게 말을 건다. 1970년대 당시의 최병소가 시각언어와 문자 언어 간 해석의 차이를 노출시키는 작업을 통해 시각 예술이 언어이자 개념의 영역임을 인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자 위에 우산이나 신문을 올려놓고 영어로 의자 위의 사물 이름을 써놓은 네 점의 사진 작품은 비디오나 필름, 퍼포먼스 등 실험적인 작품이 주력이었던 1975년 <대구현대미술제>에 처음으로 출품된 작품이다. 그때 설치했던 접의자 여러 개를 배치한 설치 작품 <무제 9750000-3>(1975)도 이번 전시장에 재현됐다. 의자가 놓인 바닥은 흰색 테이프로 표시되었다. 또 의자가 없는 곳에 테이프만 둘러져 있기도 한 곳도 있었다. 작가에 따르면 ‘의자 설치는 학교의 교실, 학급의 모습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의 설치 작업 중 최근작은 현장 설치 작품 <무제 016000>(2016)이다. 전시장 바닥의 세로 7미터, 가로 4미터 2차원 평면을 세탁소에서 쓰는 일회용 옷걸이 8천 여 개를 구부려 가득 메웠다. 볼펜의 까만 선 대신 부정형의 하얀 철사가 겹치고 겹쳐 바닥을 지워버린 것이다. 무념 무상의 줄긋기로 의미를 지워나간 최병소의 작업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앵포르멜 그룹의 최종 기착지였던 단색조 회화의 ‘반복 수행’과 일정 부분 조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단색조 회화 붐이 주춤한 최근 70년대 실험미술을 선보인 작가가 자주 호출되고 있다.





현재 국현 서울관에서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이승택 작가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고, 오는 4월과 9월 갤러리 현대에서 개인전이 열리는 이강소 작가와 이건용 작가도 70년대 대구현대미술제의 주력작가다. 또 국립현대미술관이 내년에 뉴욕구겐하임미술관과 공동으로 기획하는 '아방가르드: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전이 예고돼 있기도 하다. 이런 현상이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 오랫동안 한국 대중의 취향을 사로잡았던 이중섭-박수근-김환기로 대표되는 1950~60년대와 이별을 고하는 신호가 될지 궁금하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1.04.13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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