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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세기 서양미술의 대명사 피카소의 한국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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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피카소展
장 소 :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기 간 : 2021.5.1 -8.29
글 / 김진녕

-70년 만에 한국을 처음 찾은 <한국에서의 학살> 

-21세기에 다시보는 자본주의 미술시장의 대명사


1.

파블로 루이즈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0.25 ~ 1973.4.8)

그는 한국인에게 (서양)미술의 대명사이다. 한국의 성인 중 고희동(1886-1965)이나 이상범(1897-1972)의 이름이 낯설지만 피카소는 들어봤다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이는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김달진미술자료연구소가 발표한 1952년부터 2010년까지 국내에서 열린 외국작가 전시회 통계를 보면 1위가 피카소다. 피카소가 총 29회로 가장 많았고, 2위는 마르크 샤갈(17회), 3위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16회), 4위는 프랑스의 클로드 비알라와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호안 미로, 프랑스의 세계적인 구상화가 베르나르 뷔페(12회)였다. 회수를 보면 피카소가 나머지 그룹과 압도적인 차이를 보일만큼 피카소라는 이름은 절대적인 흥행카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카소란 이름을 내건 가장 최근에 열린 전시는 2018년 12월의 <피카소와 큐비즘>전으로 파리시립미술관 소장품 위주로 채워진 전시였다. 프랑스 입체파 화가의 전시를 하면서 피카소 이름을 앞으로 끄집어 낸 것이다.

20세기 후반까지 세계의 변방이었던 한국에 피카소 전시가 유독 자주 열릴 수 있었던 것은 피카소가 남긴 작품 자체가 엄청나게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1만3천500여 점의 그림과 700여 점의 조각품을 남겼고 도예 작품은 일일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일각에선 그의 작품 수를 전부 더하면 3만여 점이 넘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 많은 ‘현대 회화 대전’에 피카소의 판화나 유화 한 두 점이 들어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에서의 학살, 1951


2.

2021년 5월, 다시 피카소의 작품이 한국을 찾아왔다.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5.1-8.29,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파리국립피카소박물관에서 온 110점의 회화, 조각, 판화, 도예 작품이 선보인다. 파리국립피카소박물관은 요즘 한국 사회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는 상속세를 미술품 물납으로 대신할 수 있는 제도 때문에 생긴 미술관이다. 1973년 화가 피카소 사후, 막대한 상속세를 내야했던 유족이 프랑스 정부에 상속세대신 작품 200여 점을 대납해 피카소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피카소미술관이 탄생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피카소전이라고 이름붙은 전시에 100점이 넘는 작품이 전시된 경우는 이전에도 판화전이나 도예전이 있었다. 이번 전시는 유화나 조각 판화 도예 등 한쪽 매체에만 치우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피카소의 세계에 한국이라는 연결점을 갖고 있는 <한국에서의 학살>(1951)이 전시장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 작품이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의 홍보대사격이다.

이 작품은 당시 프랑스 공산당원이었던 피카소가 미디어를 통해 한국전쟁 소식을 듣고 전쟁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작품을 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한국에선 ‘삐라’ 대접을 받았다.

‘<조선의 학살> 때문에 피카소 이름의 方外(방외) 사용마저 한때는 금기였다. 「피카소 크레파스」, 「피카소 수채화」 등의 이름으로 물감을 만들어 온 회사 대표를 反共法 위반 혐의로 입건하고, 그 회사제품의 광고를 중지시켰다’(중앙일보, 1969년 6월9일)는 보도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피카소가 그 자신의 당적과는 달리 연애나 작품거래에서 철저하게 자본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아이콘으로 확인(?)되면서 그를 공산주의자로 보는 시각은 68혁명 때 마오쩌뚱과 문화혁명을 이상향으로 보던 서구 선진 자유주의 국가의 시위 세력만큼이나 긴장감을 잃었다. 한국에서도 체제 우위에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이 작품의 국내 전시를 추진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다.

 

3.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한 한국의 반응은 그 자체가 한국의 정치사회사이자 문화사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 부산에서 첫 반응이 나왔다. 고향이 평양이고 부친이 평양의 유력인사이자 부호였던 김찬영의 아들인 화가 김병기(B.1916)는 회고담(2017년 8월17일자 한겨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피카소의 <코리아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은 1951년 부산에서 <타임> 잡지를 보고 알았다. 그림 내용은 무장한 기계화 부대가 벌거벗고 있는 양민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장면이었다. 여기서 기계화 부대는 미군을 의미하고, 그런 미군이 한국인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군이 자행했다고 북한에서 주장하고 있던, 황해도 ‘신천의 양민학살 사건’을 소재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미군의 양민 학살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고, 또 훗날 전문학자들의 연구 결과도 미군 학살이라기보다 민간 좌우익 간의 살육전으로 이해하고 있다. 아무튼 나는 피카소가 미국을 비판하는 태도와 작품 제작은 부당하다고 느꼈다. 우리를 위해 미군은 해방 때까지 4년을 일제와 싸운 반면, 소련은 휴전 일주일 전에 참전해, 결과적으로 한반도를 반반씩 나눠먹었다. 이런 상황에서 피카소의 미국 비판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피카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피카소를 단순히 비판하려고만 한 것은 아니었다. 피카소는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화가다. ... 그때 피카소는 해골을 많이 그렸다. 전쟁 때니까 해골은 하나의 현실이었다. 연인의 키스도 그렸는데, 그 키스는 전쟁통에 이별하는 키스였다. 피카소는 저항을 한 작가다. 피카소보다 먼저 나온 마티스는 생의 환희를 그렸을 따름이다.

피카소는 1952년에도 <전쟁과 평화>라는 작품을 로마에서 그렸다. 전쟁은 이렇고, 평화는 저렇다라는 것. 전쟁은 나쁘고 평화가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피카소는 너무 관념이 앞서 있는 것 같았다. 그림을 지옥과 천국으로 단순 비교하여 그린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한국전쟁을 너무 관념적이고 피상적으로 본 것 같아 나는 이 점을 지적하고자 했다. 전쟁이 만든 ‘굿바이 피카소!’였다. ‘피카소와의 결별’은 그런 배경에서 쓴 글이었다. 이 글은 1951년 부산 남포동의 어느 다방에서 시인과 화가들을 모아놓고 발표했다. 공초 오상순과 조각하는 차근호 등 20여명이 있었다. 하지만 편지를 피카소 본인에게 실제로 부칠 방법이 없었다. 원고의 전문은 1954년에야 한 잡지를 통해 활자화될 수 있었다.”

 

 



피카소 씨여! (…) 물론 당신의 비설명적인 표현은 지나친 내용의 해석을 허용하지 않을는지도 모르나, 총을 겨누는 로봇 병사들의 한 그룹과 벌거숭이 부녀자들의 다른 한 그룹이 무엇을 또한 누구를 의미하고 있는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아마도 코뮤니스트의 공식으로는 그렇게 보는 것이 타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1945년부터 몇 해를 두고 보아 왔으며, 특히 이번 동란의 격랑 속에서 지칠 대로 보아온 한국에서의 학살은 당신의 <조선의 학살>과는 정반대의 학살에서 시작했다고 하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서 우리들의 정치적인 위치가 당신과는 다르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김병기, ‘피카소와의 결별’, <문학예술>, 1954. 4.)


4.

이번 전시의 프랑스쪽 전시 커미셔너인 요안 포플라르은 <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51년 1월18일 발로릿에서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은 주제가 확실한 작품이다. 울고 있는 인물을 제외하면 화면 위에 몇 개의 선과 색채만을 조합해 그림을 그리는 모더니즘의 화풍과는 거리가 멀다.

‘주제’ 대신 피카소가 즐겨 사용했던 단어인 ‘비극(drama)’을 대입해보자.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진 이 비극은 무엇인가? 작품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피카소는 한국 전쟁 소식을 접한 뒤에 이 작품을 그렸다. 한국전쟁의 공포가 유럽 언론의 보도 덕에 피카소가 살던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발로리스까지 전해졌다. 그러나 작품을 유심히 보면 한국 전쟁임을 특정하는 요소가 전혀 없다. 황폐하고 시간을 알 수 없는 풍경,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있을 법한 벌거벗은 여성과 아이들, 절반은 중세 시대의 기사고 절반은 로봇의 형상을 한, 미래에도 폭력은 끝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 군인들.

이 작품, 그리고 1952년에 발로리스의 한 예배당에 그린 <전쟁과 평화>에 대해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의 모습을 표현 할 때 나는 오로지 ‘잔혹성’만을 생각한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 군인의 군모와 군복 같은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피카소가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특정 전쟁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 피카소의 단어를 차용하자면 바로 ‘잔혹성’이었다. 작품이 담긴 주제에는 겉으로 보이는 사실적 요소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투쟁의 에너지와 체제 전복의 잠재력을 일깨우는 힘이 있다. <한국에서의 학살>이 완성되고 나서 몇 년 뒤인 1956년, 이 작품의 복제본이 바르샤바에서 전시되어 구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비판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그 예이다.” 

 


5.

이 작품이 제작된 1951년은 피카소의 나이가 70이었다.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과 1937년 <게르니카>로 피카소는 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 이미 20세기 미술의 확고부동한 슈퍼스타였다. 그가 이 작품을 제작할 무렵 그 무렵 극동에 관심을 가질만한 이유가 있었다면 1950년 도쿄에서 열린 일본 회고전 정도였을 것이다. 그가 1950년 7월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이나 10월의 신천군 사건이나 1951년 1월4일의 1.4후퇴 뒤 벌어진 한국의 참상에 대한 정보를 세세히 듣고 이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때문에 이 작품의 기원을 노근리나 신천군 등 구체적인 사건에서 찾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이는 아마도 한국인이고, 20세기 중후반 한반도에서 미군의 역할에 대해 비판적인 근거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이 작품엔 제목만 한국이 붙었을 뿐, <게르니카>에서처럼 전쟁의 참혹함과 공포를 나타내는데 집중했지만 <게르니카>만큼의 성취를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한국인에게 특별한 <한국에서의 학살>을 빼고도 이번 전시의 출품작은 연대별로 피카소를 살펴보기에 좋다.

피카소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법적으로 첫번째 부인이었던 디아길레프발레단의 무용수 출신 올가 코클로바(1891-1955)와 1918년 7월 첫 결혼식을 올린다. 올가와 살면서 피카소는 1910년대를 전후한 입체주의 양식에서 벗어나 얼굴과 신체를 보이는대로 그린 ‘신고전주의 시대’를 연다. 피카소는 올가와의 사이에서 1921년 아들 폴 (paul 1921-1975)을 얻었다. 피카소의 작업은 이무렵 1910년대를 전후한 입체주의 양식에서 벗어나 앵그르풍의 전통적 구상회화로 전환하는 시기로 입체주의와 고전주의의 상반된 두 경향이 공존한다. 피카소의 사후에 발견된 <편지읽기>(1921)는 그의 절친으로 1차 대전 중 사망한 기욤 아폴리네르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아들인 폴을 그린 <피에로 복장의 폴>(1925) 역시 피카소의 신고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이번 전시에 두 작품 모두 등장했다.

아흔 넘게 살면서 늘 새로운 여성을 만나 ‘영감’을 얻어냈던 피카소였던만큼 여성편력과 결부된 작품이 다수 출품됐다. 첫번째 여인으로 기록된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여인의 상반신>이란 조각으로, 도판으로도 널리 알려진 <마리 테레즈의 초상>(1937)은 네번째 여인이었고 다섯번째 여인이었던 도라 마르를 소재로 한 1930년대 후반~40년대 초반 작품도 석 점이 전시장에 등장했다. 

이번 전시에 특기할만한 것은 에칭 판화인 <볼라르 연작>이다.

작품을 주문한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이름을 딴 <볼라르 연작 suite Vollard>은 1930년 9월부터 1937년 3월 사이에 제작된 에칭 작품 100점이다. 이 시기는 마리 테레즈와 연애를 하던 시기고 마리 테레즈도 작품 속에 등장한다. 사십대 후반에 10대 후반의 마리 테레즈를 만나 떠올린 영감(?)이 어떤 것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피카소가 기존에 쌓았던 명성에 의지하며 ‘유명인’으로 살던 2차 세계 대전 이후가 아닌 그 이전 시대의 작품이 주를 이룬 전시라는 점을 기록해둘만하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1.09.19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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