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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나를 보다 <박대성의 정관자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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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송대의 바람, 히말라야의 산바람, 허드슨강의 강바람을 헤쳐나온 이야기
-학교 대신 박물관에서, 거리에서 문명을 배우다

전시명 : 박대성 작가의 <정관자득: Insight>전
전시장소 : 인사아트센터
전시기간 : 2021.7.23~2021.8.23
글 / 김진녕

수묵화의 대가 박대성 작가의 <정관자득: Insight>전이 인사아트센터(7.23-8.23)에서 열렸다. 가로길이 4.5m, 세로가 2m에 달하는 <불국설경>(2021) 등 근작부터 고미 시리즈와 화첩까지 70여 점의 작품이 전시장 지하부터 1,2층까지 전시됐다.

 



그는 1945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왼쪽 팔꿈치 아래를 잃었고, 한국전쟁때는 부모를 잃었다. 정규 학교 이력은 초등학교 졸업 뿐이다.

그런 그의 그림은 2015년 경주에 솔거미술관을 만들어냈고, 2018년 남북정상회담장에 두 점이 걸렸고, 내년에는 미국 순회전이 준비돼 있다. 내년 7월 LACMA(LA카운티 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이후 2024년까지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다트머스대 후드 미술관,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메리워싱턴대에서도 전시가 이어진다.

한국에서 출신 대학도 없는 ‘비제도권’의 작가가 작품의 힘만으로 21세기 초 대표적인 수묵화가가 된 것은 해방 뒤 유례가 없는 일이다.

<정관자득靜觀自得>전까지 이르게 된 여정을 그의 말로 옮겨본다.

 



- 전시회 제목이 ‘정관자득’이다.

그 동안 나름대로 내가 공부했던 것을, 제목으로 정한 것이다. 누구에게 보여준다기 보다는 내가 보는 것이다. 내가 전체를 조망해서 나름대로 느껴서, 과거의 작품도 요즘 작품도 함께 내놓은 것이다.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그런 게 정관자득이다. 일종의 나를 점검하는 계기, 그게 이번 전시다.

 

- 미술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대가로 인정받고 있다.

자연에 대한 해석이 가장 중요하다. 어떤 분야든 자연을 떠나서 해석할 수 없다.

나는 아직 대단한 게 없다. 조금 더 기다려달라. 세월이 흐를 것은 흘러야 하고, 노력해야 할 것은 해야 한다. 그게 우리의 정신이다.

 


박대성 작가에겐 몇 번의 터닝 포인트, 도약점이 있었다.

1973년 ‘자유중국’(타이완) 유학, 1979년 중앙미술대전 수상, 1988년 호암갤러리 전시, 1994년 1년간의 미국 뉴욕 ‘유학’.

◇ 1973년 타이완행

내가 73년에 대만에 갔다. 타이페이 고궁박물관에서 1년 동안 매일 출근을 하며 그림 공부를 했다. 내가 중국말도 한마디 못하는데. 김계원 주중 대사가 그때 도와줬다. 그때 한중관계가 최고조로 좋았을 때였고.

그때 공부한 게 오늘날의 내가 된 큰 밑천이 됐다. 그건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내가 학교를 안나왔지만 그때 대만에 가서 공부한 게 대학공부한 것보다 부럽지 않다.

고궁박물관을 가니까 송원명대의 어마무시한 작품을 보는데 산을 뚝 떼어다 걸어놓은 것 같았다. 충격이었다. 한국에선 전통 회화는 제일 큰 게 <인왕제색도>였는데. 그런 걸 보면서 1년 동안 공부를 했다.

 



그는 귀국 뒤 1979년 중앙미술대전에서 <상림>으로 대상을 차지하면서 ‘박대성’이란 이름을 화단에 각인시켰다. 국전에서 여섯 번이나 입상했고 실력을 인정받았던 그가 마침내 제도권의 트로피를 들어올린 것이다. 이는 1988년 호암갤러리 <대작 100점>전으로 이어졌다. 650평의 공간을 그의 작품만으로 채운 전시였다.

 

◇ 호암갤러리 전시

호암갤러리가 주최한 40대 기수 시리즈 중 첫번째 전시를 내가 했다. 그게 성공적이었다.

이 전시회 배경에는 이병철 회장이 ‘어떻게 너는 돌아가신 분, 현재 대가, 이런 안전한 것만 하냐, 40대 기수를 뽑아서 키워라’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거기서 기획을 했다고 한다.

나에게 처음 제의가 왔을 때는 거절했다. 나는 그 전시 이전엔 다방에서도 전시를 하고 제대로 된 미술관에서 전시를 못했다. 그런 내가 갑자기 무려 650평이나 되는 곳에서 전시를 하면 많은 (미술계)사람에게서 질투를 받는다. ‘시건방진 놈이 병신 육갑 떤다’고. 그래서 안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국장급 간부가 와서 ‘케네디도 40대에 대통령했다. 당신은 40대 중반’이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내가 ‘왜 내가 해야 되느냐’고 질문했다. 그때 화단은 서울대 홍대가 쌍벽이었다. 어느 한쪽 출신을 세우면 난감한 상황이 생겼다. 중앙미술대상을 받은 작가 중에 참신한 사람을 뽑는다고 나를 뽑은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하겠다고 했다. 그때 국전에서도 내가 손해를 엄청 봤었다. 너무 많이 당했다. 그래서 그럼 하겠다고 했다.

그 당시에 주최측에서도 나를 내세우는 게 두려웠나 보다. 젊은 작가를 내세웠다가 그들이 원하는 성과를 못얻을까하는 걱정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 기준에는 작품도 많이 팔리고, 관람객도 많아야 하고, 도록도 많이 팔려야 하고. 그래야 하는데. 나야 그때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고. 그런데 전시 이후 그 세가지 지표를 다 넘겼다. 성공적인 전시였다. 행운이었다.  



◇ 이건희 회장과의 만남

전시가 성공적으로 끝난 뒤 이건희 회장이 삼성본관으로 불렀다.

회장실에서 인사를 드렸더니 나보고 ‘존경한다’고 말하더라. 의외의 소리라 ‘왜 존경하냐’고 물었다. 이 회장이 ‘한 계통에서 1, 2프로 안에 드는 사람은 강도도 존경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더라.

그러면서 ‘뭐 하나 도와주고 싶다, 부탁할 게 없느냐’고 말씀을 하시더라. 그래서 내가 중국(본토)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해결해보겠다’고 했다. .얼마 안있어 연락이 왔다. ‘홍콩 가면 책임자가 나와 해결해 줄 것’이라고. 갔더니 이병석 중앙일보 홍콩 특파원(현 국회의장)이 마중나왔다. 그래서 그 분을 알게됐다.

그렇게 88년 가을에 중국에 들어갔다.

베이징을 시작으로 석 달 열흘, 백일을 중국에 있었다. 그때는 보통 2주 비자밖에 안나오는데, ‘특별한 방법’을 썼다. 거기 조선족 동포를 가이드 삼아서 중국 전역을 누볐다. 베이징을 시작으로 우루무치로 날아가서 거기서 시작해 갈짓자로 석 달 열흘을 중국을 누볐다. 마지막에 선전에서 홍콩 전철을 타고 나왔다. 그때부터 비단길 견문이 시작된 것이고 중국의 높은 곳, 깊은 곳, 오만 빈부격차, 다 봤다. 살이 한 6키로 빠졌다.

 
◇ 이건희의 취향

이 회장은 동양화를 좋아한 것 같다.

이병철 회장의 집무실은 ‘3년 상’(1987년 이병철 회장 별세) 기간 동안 유지한다고 했다. 그 기간이 끝나고 나면 이건희 회장 스타일의 집무실을 만들 것인데 벽면을 연구해서 그려달라고 말씀하셨다. 집무실 벽에 긴 횡축으로 띠처럼 두룰 수 있게 금강산과 설악산 섞은 산수화를 그려 드렸다.

 


◇ 현대를, 미국을 보다

1994년에 가나아트 주선으로 뉴욕 소호에 작업실을 차리고 1년간 있었다.

미국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했다. 물어도 시원한 대답도 없고. 중국어를 못했던 것처럼 영어도 못하는데. 그래서 직접 가서 보자고 갔다.

1년 살아보니 그 사람들은 동양에서 수천년간 문명을 쌓아온 매개체인 필묵을 모르더라. 먹을 인디언 잉크라고 하고, 붓을 브러시라고 하는데… 인디언잉크 소리 들은 다음날 짐싸서 왔다. 내가 뭐가 아쉬워 그들을 설득시키나. 세월이 가서 자기들이 복이 있으면 필묵을 아는 것이지.(웃음) 내가 교사도 아니고. 내가 영어를 하는 것도 아니고, 설득 필요성 못느꼈다.

그렇게 돌아와서 불국사 그리기 시작했다. 뉴욕까지 가서야 그게 생각났다.

맨해튼의 빌딩 숲을 처음 봤을 때는 놀랐다. 산이 솟아 오른 것 같았다. 몇 달 있다보니 놀랄 일은 아니네,라고 느꼈다. 나름 거부감이 오더라. 그때 거대하면서 따뜻한 게, 불국사가 떠오르더라. 맨해튼의 빌딩 숲은 뭔가 공포적이고 달이 떠도 조화가 안되고. 이게 아니구나, 내가 좋아하는 걸 찾아가야겠다. 한국은 정말 산자수명하고, 화가로서 한국 땅은 최고다. 그래서 이튿날 짐을 싸서 귀국하고 불국사로 갔다. .

 

대만과 중국, 실크로드를 거쳐 미주대륙까지 답사한 그는 최종 귀착지로 경주를 택한 것이다.

 

- 수묵만 한다.

1988년 호암갤러리 전시때는 전부 채색으로만 했다. 채색을 해보니 내가 갈 길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거기에는 내 정신을 넣을 수가 없었다. 내가 없어져버리더라. 먹은, 내가 존재하면서, 내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채색은 내가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효과가 나오니까, 내가 의도한 정신적인 부분을 컨트롤할 수 없다.

인물도 더러 다루기는 하는데, 이번엔 내놓지 않았다. 나름대로 욕심을 부리자면 아직 내놓을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표현의 한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앞으로는 어느 쪽으로?

우리는 서구를 너무 맹종하고 살고 있다. 내가 과거에는 동서양을 몰랐고, 이제 내가 나이가 77세인데, 이젠 왠만한데는 거의 돌아다니고 봤는데 크게 충격받을만한 것을 보지 못했다.

내가 그림을 그리면서 움추렸던게 언어문제였다. 영어를 몰랐으니. 큐비즘을 우리말로 풀어쓰면 쉬운건데. 그걸 영어로 하니까 내가 못알아들은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알고 보니 별 거 아니더라. 우리는 신라 이전에 그게 다 있었다. 그런데 서구에서 이제 그걸 갖고서 … 우리는 역원근법을 민화에서도 쓴다. 그런 것은 영어로 하면 그쪽에서 알아듣겠나. 우리말로 하면 하나도 안어려운 것인데.

우리가 너무 서구에 맹종하고 있다. 이젠 우리 것을 찾아나가야 한다.

내가 7~8여 년간 실크로드를 답사하면서 느낀 게,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미술이 경주에 도착해 완성된다, 우리가 한 것이다. 석굴암 불국사 등. 우리의 정신, 신라 정신이 뭐냐하면 진정성이다. 서둘지도 않고 뽐내지도 않고, 충실한 진정성. 하나를 향해서, 완성을 향해서 가는 진정성이다.

 


다시 이번 전시 얘기로 돌아왔다.

‘정관자득靜觀自得’을 어찌풀면 되겠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조용해야 한다. 나를 가라앉혀야 한다. 나를 조용하게 가라앉혀 사물을 보면 스스로 깨닫게 된다. 바람이 불 때는 물결이 치면 속이 안보인다. 바람이 자고 조용하면 물 속이 보인다. 조약돌도 있고 다 보인다. 그게 정관자득이다.”

 

원명송대의 바람과 히말라야와 파미르고원, 허드슨강의 바람을 헤치고 나온 그는 남산 기슭에서 바람이 자길 기다려 나를 보자고 한다. 소복소복 눈쌓이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은 바람이 멎고 대기와 땅을 덮은 눈이 소리를 흡수해 귀가 멍해지는 순간이다. 정작 눈은 그려지지 않은 <불국설국>에서 소복소복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전시장을 채운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1.09.19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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