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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 시대 회화의 반복과 기시감의 전략 - 《The Colo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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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김성국 개인전 《The Colours》
장 소 : 갤러리 마노
기 간 : 2022.05.07-06.11
글 : 조은정(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

  김성국은 대상에 대한 묘사의 회화적 기법의 다양성을 익힌 몇 안되는 작가 중 하나이다. 그는 적절히 화면에 광택을 주어 실재감을 높이게 하거나 결코 콜라주 기법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입체가 평면에 고정된 사진으로 느끼게 하는 눈속임까지 할 줄 아는 작가이다. 필자는 그러한 화면에 깊은 흥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와, 정말 똑 같다!”라고 외칠 수 있는 오래된 그림 보기의 즐거움을 소환하였기 때문이다. 젊은 작가가 재주를 뽐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항상 무엇인가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예술의 아우라를 기반으로 한 비평수업으로 점철된 제도권 교육을 철저히 받은 작가에게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점들인 것도 이유 중 하나이다.

  대상을 그대로 묘사한다는 것은 예술가의 일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 지 100년도 훨씬 지난 시점에서 ‘똑같이 그리기’로 점철된 화면은 누군가에게는 불편해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무한복제 시대에 화가의 손은 결코 복제하는 기계와는 다른 존재임을 보여주었기에 흥미로웠다. 똑같은 형태가 반복되는 것 같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오래된 신화의 도상을 현대인의 형태로 재현하여 인간 본성에 대해 성찰하고 부조리에 경고를 보내는 것과 같은 화면들은 회화의 오래된 가치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주었기에,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가져왔음을 말해둔다. 

  통속적인 신문의 숨은그림찾기가 주는 약간의 흥분감, 어슬렁거리며 미술관 벽에 도열한 명화를 스윽 훑어보는 호사, 마음을 움직이는 영롱한 색채 혹은 형태들을 발견했을 때 입가에 절로 번지게 되는 미소와 같은 것들을 그의 작품에서 경험할 수 있다. 난폭하고 시사적이며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미덕인 현대미술의 흥분 속에서 아주 오래된 미술사 책을 넘기며 그림의 의미를 추측해보는 그림보기의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은, 현대인에게는 생경한 일이다. 새로움이 현대미술의 주요 전략이라면 그는 오래된 것으로 새로움을 구사하는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아! 소위 ‘법고’한다는 사람은 옛 자취에만 얽매이는 것이 병통이고, ‘창신’한다는 사람은 상도(常道)에서 벗어나는 게 걱정거리이다. 진실로 ‘법고’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능히 전아하다면, 요즈음의 글이 바로 옛글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글쓰기에 대한 평가이지만 창작이라는 원리를 설명하는 점에서는 미술에 빗대어 이해하여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연암에 따르면 지나친 새로움의 추구는 허황되고 괴벽해질 수 있고, 옛것에만 의존하면 그것을 그대로 본뜨는 것 이른바 표절이 되어도 부끄러운 줄 모르게 된다. 이 둘을 잘 조정하여야 하지만 어렵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래서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창신’을 한답시고 재주 부릴진댄 차라리 ‘법고’를 하다가 고루해지는 편이 낫다.”

  김성국의 회화를 보는 즐거움은 ‘알아보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스로마신화의 사건들과 그것을 내용으로 하여 그려지거나 조각된 미술사의 명작들을 상기하며 그의 작품이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다면 그는 분명 ‘법고’를 따른 것이다. 하지만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항상 현대인이며 자신의 친구들이거나 아는 이들 심지어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그것은 동시대성을 가진 대상으로 현존한다. 그러나 제스추어, 도상은 기시감 높은 과거의 명작 한자락에 기대어 있다. 유명한 것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작품에 심어두는 것은 팝아트의 전략이다. 기시감 높은 것들에 대한 친근성은 난해한 현대미술의 벽을 뚫는 송곳이었다. 김성국 작품에서 명작 도상의 차용은 기시감을 높여 친근성을 배가시키는 전략에 의해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잠깐 선보였던 나무 그림을 중점으로 보여준다. 작품 명제는 《The Trees》에 일련 번호를 붙인 것이다. 물론 《The Trees – Karma》라는 명제가 있지만 다른 일련의 시리즈와 외형상 구분점은 없다. 우리 눈앞에는 그저 다양한 식물들이 겹겹이, 규칙성을 가지고 화면 전면에 가득히 자리한다. 개개의 식물들은 작은 봉분처럼 보이기도 하고, 고기의 비늘 같기도 한데, 그 하나하나의 단위가 개별적인 다른 식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식물이구나 싶어 들여다보면 또 마치 섬유에 문양을 넣은 것 같은 ‘패턴화’로 느끼게도 된다. 동글동글한 식물의 단위들은 곳곳에서 익숙한 그림의 일부, 클림트 회화의 장식적인 부분들을 보여주고 있다. 황금색 고사리문양, 유디트의 옷자락 무늬, 키스하는 연인들이 밟고 있는 꽃밭의 일부, 아델 블로흐 바우어의 옷문양 등이 마치 나무처럼 동그스럼한 모양으로 슬쩍 식물들 사이에 위치한다. 

  일견 익숙한 것처럼 보이는 것, 그것은 인체가 등장하던 이전의 회화에서처럼 기시감에 의거한 것이다. 크리스마스 기분을 한껏 낸 냅킨이나 방안에 다른 기분을 내어주는 띠 벽지 문양처럼도 느껴지는 이 식물들이 익숙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작가가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체계를 사용하여 새로운 것들을 이것저것 만들어내는 브리콜뢰르(bricoleur)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편적 체계를 창조할 가능성에 대해 회의감이 높은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브리콜라주기법은 유용하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적 사고의 특성은 구성이 잡다하며 광범위하면서도 한정된 재료로 스스로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어떤 과제가 제시되든 신화적 사고는 주어진 재료를 활용해야 한다. 달리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화적 사고는 일종의 지적인 손재주(브리콜라주)인 셈이다.”라고 하였다. 김성국의 도상의 변용은 브리콜라주의 영역에 있는 것이고 한정된 재료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는, 현재까지는 유일한 통로이다. 

  김성국의 화면은 또한 패턴을 통해 단순하고 감각적인 회화에 접근한 경험을 회화에 도입함으로써 반복이라는 추상의 언어를 구사한다. 비슷한 크기의 것들로 채워져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것은 디지털 세계의 픽셀과도 같다. 하지만 개개의 부분들은 모두 다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크기마저 차가 있다. 얼핏 반복으로 보이지만 실은 다른 개체들의 조합이라는 말이다. 자연에는 완벽한 좌우대칭이나 완벽한 반복도 없다. 그래서 그의 화면에 반복적으로 나타난 형태들은 작가가 창조해낸 하나의 자연계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에 의해 완벽히 창조된 세계, 추상의 가치를 그의 구상회화는 보여준다. 




  《The Trees》는 일련의 시리즈처럼 보이지만 개별성을 지닌다. 하지만 작품 안에서 이들은 또한 서로 연결된다. 이를테면 《The Trees 28》에 오른쪽에 살짝 보였던 클림트 작품의 보석장식 일부는 《The Trees 29》에서는 좌측 상단에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다. 《The Trees 27》 상단에서 잘린 고동색 나무줄기에 지그재그로 잎새가 있는 나무는 《The Trees 29》 하단에 그 윗부분이 묘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나무 하나하나는 다양한 기법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키스해링처럼 단순한 선으로 서로서로 연관되어 공간을 채워나가는 방식으로 그려지거나, 점묘방식으로 채도를 높이거나, 붓을 휘둘러 움직임이 강령하거나 물감을 비비대서 모호한 경계를 갖거나 하는 방식으로 붓을 쓰는 다양한 방법, 잎새에 떨어진 빛을 표현하는 높은 채도를 다루는 방식 등이 고루 시도되었다. 

  그의 화면에 그려진 식물들은 상징이나 해석에서 벗어나 식물 그 자체로 자유로이 존재한다. 그의 화면 앞에서 서면, 중세에 인간을 둘러싼 자연의 힘의 상징으로서 동물적인 몸체를 가졌던 식물에서부터 약리성을 지녀서 은총 가득한 세계로 보여지던 식물이 “나는 200여 가지 꽃을 묘사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듯한 르네상스 화가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존쿡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하는 일련의 공동 작업도 이러한 법칙에서 예외는 아니다. 디지털 이미지를 편집한 김시종의 화면에 김성국은 수작업의 붓질로 색채를 올려 다른 층위를 만든다. 디지털 이미지의 무한복제를 수제의 원본으로 만드는 것, 그것은 작가의 수작업이다.  

  르네상스기 회화에서는 저마다 다른 꽃과 잎을 가진 식물은 비록 아주 작을지라도 생명성의 가치를 저버린 적이 없다. 이들 식물은 결코 나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며, 땅에 뿌리를 내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잠든 마르스를 지켜보는 아름다운 비너스의 옷자락 아래 펼쳐진 잔디처럼 아름다운 사건과 함께 나를 기다릴 것이라는 안도감을 주는 것들이다. 그저 꽃, 그저 나무. 그것이 갖는 가치는 오래된 자연이 주는 안도감에 기댄 생명성의 즐거움을 기반으로 한다. 김성국의 《The Trees》의 힘은 바로 오래된 역사와 전설 속에서 꾸준히 반복되어 변함이 없는 그 가치에서 온다. 기시감 높은 그들은 그림을 보고 행복감에 젖게 하는 것, 기쁨을 느끼게 하는 것 또한 회화의 본령이라고 주장한다. 
  
글/ 조은정 관리자
업데이트 2022.07.02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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