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위대한 만남, 내고 박생광ㆍ우향 박래현>
장 소 : 서울옥션 강남
기 간 : 2024.1.10~1.23
글/ 김진녕
서울옥션은 지난 1월 색다른 경매를 시도했다. 20세기 후반 한국화 진영의 주요 작가로 꼽히는 박생광(1904-1985)과 박래현(1920-1976), 두 작가만의 작품 143점이 출품된 <위대한 만남, 내고 박생광ㆍ우향 박래현>이란 이름이 붙은 온라인 라이브 경매가 진행됐다.
2023년 한국 미술품 매매시장이 전반적으로 불황이었다는 성적표가 속속 발표되는 연말연초 시점에 한국 시장의 핫이슈(단색화, 해외 갤러리의 직배작품)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전통 한국화, 그 중에서도 한국화의 혁신을 추구했던 두 대표화가만으로 치러진 경매라 결과에 관심이 쏠렸다.
1월 23일 경매 결과 81점이 출품된 박생광 파트에선 28점이 낙찰됐고 낙찰가 총액은 5억 7천 350만원. 최고가 낙찰 작품은 <무당12>(1984)와 <백운대 인수봉 해질녘>(1979)으로 각각 1억 5천만원을 기록했다.
내고 박생광 <무당12> 1984, 139.5 x 139cm, 낙찰가 1억 5천만 원
62점이 출품된 박래현 파트에선 20점이 낙점됐고 낙찰 총액은 22억 2천 200만원. 최고가 낙찰 작품은 <이른 아침>(1956)으로 6억 5천만원에 새 주인을 만났다.
박생광 |
총 작품 수 |
81 |
낙찰된 작품 수 |
28 |
|
낙찰율(%) |
35 |
|
낙찰가 총액(원) |
573,500,000 |
|
박래현 |
총 작품 수 |
62 |
낙찰된 작품 수 |
20 |
|
낙찰율(%) |
32 |
|
낙찰가 총액(원) |
2,222,000,000 |
|
합계 |
낙찰된 작품 수 |
48 |
낙찰율(%) |
34 |
|
낙찰가 총액 |
2,795,500,000 |
이번 경매를 ‘전시’라는 측면에서 보면 한국화가 중 지난 2-3년 사이에 가장 활발히 열렸던 박생광과 박래현 전시의 ‘피날레’격이었다는 점이다.
박래현의 회고전 <삼중통역사>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2020년 9월에 열렸고, 2022년 진주국립박물관과 진주시립미술관이 공동주최한 <한국 채색화의 흐름I>전, 2023년 <한국채색화의 흐름II>전에서 박생광과 박래현의 작품이 집중 소개됐다. <삼중통역사>전에 대거 소개됐던 주영갤러리 소장품 위주의 박래현 전시 <사색사계>전 1,2부가 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2022년 3-4월 열렸다. 이어 2023년 3월 예술의 전당에서 <한국화 대가 박생광·박래현 2인전-위대한 만남전>을 통해 더 큰 규모로 관람객과 만났다. 이 전시에서 박생광의 작품은 스케치 100여 점을 포함한 181점, 박래현의 작품 88점 등 총 269점이 출품된 전시였다. 이 전시의 틀은 2023년 9월 Kiaf 특별전 <박래현과 박생광, 그대로의 색깔 고향>으로 이어졌고, 이어 경매 프리뷰 형식으로 대중의 눈 앞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이번 경매 결과의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는 낙찰된 작품의 면면이다. 박생광이나 박래현 모두 한국화의 혁신이란 측면에서 이정표를 세울 정도로 뛰어난 작품을 남긴 작가다. 그런 평가를 받는 두 작가의 작품 중 특히 고가에 낙찰된 작품 목록은 현단계 한국 미술품 시장의 ‘주류 취향’을 가늠해 보게 된다.
박생광 작품의 낙찰율이, 박래현 작품의 낙찰율보다 근소하게 앞섰지만 낙찰 총액을 놓고 보면 박래현이 세 배 이상 높았다. 박래현 작품 중 억대 이상의 낙찰 작품은 <이른 아침>(1956)과 <기도>(1959), <향연>(60년대 초) 등 50년대 후반-60년대 초 서양 현대미술의 입체주의적 요소를 받아들였던 시기의 작품과 박래현의 출세작이기도 한 선전에서 최고상을 받은 <단장>(1943)이다. 1960년대 후반 미국 유학을 전후해 선보인 추상화나 태피스트리 작품은 미술계의 평가만큼 시장 반응이 뜨겁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박래현 <단장> 1943년, 129.7x152.8cm, 낙찰가 2억 5천만 원
내고 박생광 <초가> 68.7 x 45.7cm 낙찰가 800만 원
이번 서울옥션의 경매는 단순히 경매에 그치지 않고 20세기라는 한국의 압축된 근현대기를 관통하는 작가에 대한 평가와 미술관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도 됐다.
경매시장에서 주목받고 거래가 활발한 박수근, 이중섭, 장욱진 등 극소수의 작가를 빼고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제대로 전시를 열어 조명해주는 작고 작가가 극히 드물다. 국공립미술관이 한국 근대미술품의 창고 노릇만 할 뿐 20세기 작가에 대한 조명이나, 그들의 작품을 시민에게 소개하고 보여주는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꾸준히 나오고 있는 이유이다.
박생광과 박래현의 대규모 ‘전시’가 민간에서 가능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두 작가의 대표작이 국공립미술관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한국적 상황’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래현의 덕수궁관 전시와 한국 채색화의 흐름전을 제외한 예당-Kiaf로 이어지는 박생광-박래현 작품 전시는 주영갤러리 등 미술관에서 ‘개인소장자’로 분류하는 곳의 소장품이 큰 역할을 했다. 물론 <삼중통역사> 전시에도 ‘개인 소장자’의 작품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던 전시이다.
주요 작품이 국공립미술관에 들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화 대표작가의 대표작을 수시로 감상 가능한 전시가 활성화됐다는 게 관람자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지만 국공립미술관의 기능을 생각하면 미심쩍은 일이기도 하다. 이는 한국 근현대미술품을 보듬고 갈고 닦아서 시민에게 보여줄 수 있는 근대미술관 건립 논의가 활성화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반도에 서양 미술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이 일제 강점기부터이고 이후 수많은 해외의 사조가 한번에 쏟아져 들어와 서양 미술의 르네상스기부터 현대까지 500여 년에 걸쳐 형성된 서양현대미술을 벼락치기하듯 압축적으로 학습한 게 한국의 20세기이다. 백남준처럼 한국 출신 작가가 현대미술의 유파에서 맨 앞에 선 사례도 있지만 그건 한국 현대미술의 성과가 아니라 독일이나 미국 현대미술의 성과이다.
20세기 초반 식민통치를 통해 500년간 유지되던 왕조체제가 무너지고, 살기 위해 간도와 연해주, 일본과 미주를 향한 대규모의 디아스포라가 발생하고, 한국전쟁 중의 대규모 인명 살상과 분단으로 신분체제가 완전히 무너진 뒤 독립국가를 세우고 60년대 들어서서야 대규모 이동이 가능한 도로가 깔리고 이를 바탕으로 공단이 생기고, 농촌 해체가 본격화된 게 20세기 한국의 근현대 역사이다. 이런 한국적 상황 속에서 전통을 혁신해 한국화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고 현대화의 방향성을 제시한 흐름에 1950년대의 김기창이나 박래현, 천경자가 있고, 1980년대의 박생광, 황창배가 있다. 하지만 현행 국립‘현대’미술관 체제에서 이를 조명하고 반영하는 전시에 인색하다는 지적이 미술계 안팎에서 꾸준히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