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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복의 서예이야기] 백악예단의 네 사람 : 삼연, 사천, 겸재, 관아재 (1)

백악산 아래 장동 김씨 자리잡다
백악산(북악산) 아래 살아서 백악예단이라고도 부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이들이 살던 동네로 먼저 가보겠습니다. 

청와대와 자하문터널 사이쯤에 장동(장의동)이 있고(자하문의 또다른 이름이 장의문입니다),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白雲洞)에서 이름을 따 왔다는 청운동도 근처 동네입니다. 이곳에는 청와대 영빈관 옆쪽으로 칠궁이 있는데, 이곳은 원래 영조의 친어머니, 숙종의 후궁이었던 숙빈 최씨의 사당 육상궁입니다. 숙빈묘로 부르다가 육상묘, 육상궁으로 승격했고 이후 다른 여섯 후궁의 신위를 모시게 되면서 칠궁으로도 부르게 된 것입니다. 칠궁 건너편 주한 로마교황청대사관과 궁정동 안전가옥을 허물고 만든 무궁화동산 공원 자리에는 무속헌(無俗軒)이 있었습니다. ‘속됨이 없는 곳’이라는 무속헌 자리가 그야말로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고 불립니다. 중종 때의 문신 안동 김씨 김번(1479-1544)이라는 인물이 아저씨뻘인 고승 학조대사의 조언으로 이 터에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여기가 정말 풍수가 좋았는지 어쨌는지 김번의 손자 대부터 큰 인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의정 선원 김상용(1561-1637)과 좌의정 청음 김상헌(1570-1652) 형제는 국가가 어려웠던 시기 나라를 위해 활약했던 분들입니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궤를 터뜨려 순절했고, 김상헌은 남한산성에서 항복문서를 찢고 단식 저항하다가 청나라에 잡혀간 역사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김상용의 후손 중에서 두 명의 부마와 8명의 정승판서가 났고, 김상헌 아래에서 참판 김수증, 영의정 김수흥, 영의정 김수항과 유명한 김수항의 아들들 ‘육창’ 등을 포함, 정승판서만 60명이 났다고 합니다. 

김상용은 청운동에 자리잡았는데, 겸재 정선의 그림 <청풍계>에서 우측 하단에 살짝 보이는 집이 바로 김상용의 집 태고정입니다. 계곡을 중심으로 왼쪽은 김상용, 오른쪽에는 김상헌이 자리잡고 살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선 <청풍계> 견본담채, 133.0x58.8cm, 보물 제1952호, 간송문화재단


청풍계 부분, 김상용의 집


그 일대 이렇듯 잘 나가던 안동 김씨들을 특별히 ‘장동 김씨’라고 합니다. 아까 등장한 김수항의 아들들,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김창즙, 김창립, ‘창’자 돌림의 여섯 동기들을 육창이라고 합니다. (아버지 대인 김수증, 김수흥, 김수항을 ‘삼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병자호란 이후 김상용의 후손들은 다 충청도로 내려갔지만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흡 등 김상헌의 증손자와 후손들은 현재 박노수기념관 언덕배기 위쪽에 그대로 살았습니다. 

안동(장동) 김씨들이 그 지역에 계속 살다가 병자호란 이후 노론의 중심세력이 되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조정의 고위직을 독점하는 전성시대를 맞습니다. 김상헌의 7대 후손인 김조순 때 인사동, 교동 쪽으로 거주 지역을 이동했고, 김병학, 김병국 등은 명월관, 오진암이 있던 자리 근처에서 살았고, 길건너 현재 서울미술관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 대원군 별장도 원래 김씨들 별장이었다가 대원군에게 넘겨주게 된 것입니다. 

당시 유명했던 육창 형제들 중에서 특히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문화예술계에 영향을 남깁니다.

육창 중 셋째, 삼연 김창흡


작자 미상 <김창흡 초상> 1793년


삼연 김창흡은 좌의정 김상헌의 증손자, 영의정 김수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큰 형 김창집은 영의정, 둘째 형 김창협은 예조판서에 오릅니다. 그 자신은 아버지의 성화로 과거시험을 봐서 1673년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그 다음에는 입시를 치르지 않았고, 천거되어도 벼슬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사환국(장희빈 소생을 원자로 삼으려는 것을 반대하고 중전 편을 들던 서인-노론계가 축출) 때 아버지가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고 충격을 받은 그는 영평, 지금의 포천 지역에 은거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스스로 공부에 매진해서 장자, 사기, 불경 등에 빠진 세월을 지나 후에 유학에 전념했습니다.

삼연 김창흡의 글씨
김상용과 김수증의 글씨는 지난번 안동 김씨 인물과 글씨를 소개할 때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상대적으로 노론 사람들의 글씨는 ‘노론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습니다. 김창협 등 노론 학자들의 글씨는 그 뿌리를 우암 송시열로 볼 수 있고, 다만 삼연 김창흡의 글씨는 특별히 개성이 있고 좋습니다. 안진경체로 눈에 띄는 서체를 보입니다.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여행을 많이 남겨서 그에 관련된 시와 글이 많습니다. 삼연이 평생 쓴 시를 세면 몇 만 수가 된다고 합니다. 


김창흡 <우중유회(雨中有懷) 기사흥연안(寄士興聯案)> 30.2x61.3cm, 개인



김창흡 <태학사관기손아(太學士冠其孫兒) 희음양수(戱吟兩首)> 1718년, 《삼가첩(三加帖)》 46.5x32.8cm, 경기도박물관


김창흡 자작시 <출산삼별> 등 1702년 12월 12일


육창 형제들 중에 김창흡이 벼슬은 포기했지만 후손 복이 많아 오래 살고 자손을 많이 남겼습니다. 다른 집에 양자로 보낸 아들도 있습니다. 포천의 삼부연을 좋아해서 호도 삼연이라고 지었다고 하지요. 설악산 등으로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설악산 봉정암 쪽에 소가 워낙 많아 백담(百潭)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영향받아 자신의 호를 ‘삼연’이 아니라 ‘백연’이라고 남긴 글씨도 있습니다. (연淵=담潭) 글씨는 삼연 글씨인데 왜 백연이라고 썼나 싶었던 적이 있습니다. 

삼연이 자주 다닌 지역으로 화천과 백운산이 있는데 백운산에는 김수항의 별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수 허목이 자주 다니던 화천의 곡운구곡과도 멀지 않은 곳입니다. 또, 동춘당 송준길의 후손들이 속리산 쪽에 많이 살아서 그들을 방문하기 위해 그 지역에도 여러 번 간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1721년 신임사화로 형 김창집마저 사망하고 나서 지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업데이트 2023.03.06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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