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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복의 서예이야기] 백악예단의 네 사람 : 삼연, 사천, 겸재, 관아재 (3)

사천, 겸재, 관아재와 공재
조영석(1686~1761) 또한 노론 중심부에서 이병연, 정선과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노론 명문가 집안에서 조영석의 형 조영복은 김창협의 제자로 도승지, 개성유수, 한성부우윤 등을 지냈지만, 조영석 본인은 대과 급제에 실패해 지방 현감 같은 낮은 자리를 전전하다 70이 넘어서야 당상에 오릅니다. 조영석은 송시열 라인으로, 김창협의 처남이자 자신의 처백부인 이희조에게서 공부했습니다. 


조영석 <조영복 초상>(관복본) 1725년, 비단에 채색, 80x154cm, 보물 제1298호, 경기도박물관
조영석이 형 조영복을 그린 초상화


관아재 조영석의 상황을 보면 배와 김상숙이 떠오릅니다. 배와 김상숙의 경우 형이 그 유명한 ’김상복‘이었습니다. 형인 상복은 똑똑하여 정승에 오르고 실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생인 상숙은 큰 벼슬을 하지 않고(못하고) 평생 한량으로 지냈습니다. 

관아재 조영석은 풍속, 인물화나 산수화도 잘 그려서 조선후기 풍속화의 선두주자가 되기도 하고 문인화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만, 그림 그리는 일에 대한 나름의 고집 때문에 어진 모사 작업에 참여하라는 어명을 어긴 것으로 유명하지요. 그러나 어진을 보고 돌아와서 기억만으로 그려 보낸 것을 기본으로 어진 모사를 행했다고 할 정도로 실력에는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화로 조영석이 천여 명이 등장하는 청명상하도를 보고 그 안에 포함된 인물 수를 헤아려 몇 명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산에 다녀오면 화가들은 꽃을 모두 기억해서 그린다고 하는데, 한번 보고 난 것을 머리에 이미지로 새기는 능력이 있는 화가들이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정선 <산수도> 종이에 먹, 134.7x56.2cm, 삼성미술관 리움
겸재의 그림에 관아재 조영석이 감상을 써 넣었다. 


관아재의 화제 부분
"오늘 원백(정선)의 그림을 접하니 물이 얕은 내연산이 좋은데, 내가 보기에 세 여행객은 바르게 나이들었구려"



한 번 보면 모두 기억하는 천재들
천재들, 하니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는데, 조선 초기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이라는 사람의 형으로 세종과 친분이 두텁고 수양대군, 안평대군이 존경했다는 신미(信眉) 선사라는 유명한 승려가 있습니다. 그는 머리가 어찌나 좋았는지 어떤 책을 그에게 보여주었더니 보면서 한 장씩 찢어버리는 기행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보면서 자신은 다 외우고 이해했으니 (남들은 못 보게) 찢어버린 것입니다. 일독 이십행, 이십 줄씩 대각선으로 보면서 외워버린다는 이런 사람들 중에는 벽초 홍명희도 있고, 백하 윤순, 월사 이정구 등도 해당됩니다. 윤순은 문서를 전체적으로 훑어보았을 뿐인데 나중에 필요할 때 내용을 줄줄 썼다고 하며, 남들이 한두 달에 할 일을 하루아침에 다 했다고도 합니다. 월사 이정구는 중국을 열 차례 이상 다녀왔는데, 이렇게 몇 번 듣고는 중국말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조영석은 그림 뿐만 아니라 시도 잘 짓고, 글씨도 단아하게 잘 썼습니다. <선유도>, <송작도> 등의 그림에서 그의 글씨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조영석 <행주도> 1723년, 종이에 수묵담채, 42.0x29.0cm, 개인
친한 벗이 원주로 낙향할 때 그린 그림과 제화시
收拾琴書載一舟/携將家屋上原州/
卽今京洛無靑眼/歸路江湖接素秋/
吾道可堪哀鳳歎/客行眞似憶鱸遊/
從玆我亦他鄕去/萍梗東西各逐流/




조영석 <어선도> 1733년 종이에 먹, 31.3x43.4cm, 국립중앙박물관
(진재봉래도권(김윤겸금강산화첩)에 포함됨)
오른쪽 제는 1781년 강세황이 적은 것으로 “관아재의 그림은 우리나라에서 제일이요, 인물화는 관아재의 제일이요, 이 그림은 관아재 그림의 제일이다. 내가 수십 년 전에 이것을 보고 지금 또 다시 보았다.”의 내용이다.


관아재는 자신의 그림을 모아 <사제첩麝臍帖>이라는 화첩을 만들었지만 "물시인범자비오자손勿示人犯者非吾子孫" (남에게 보이지 말라, 만약에 범하면 내 자손이 아니다)라고 써 놨습니다. 화첩의 제발은 이웃 친구 사천 이병연이 썼습니다. 화첩에는 바느질, 새참, 시차를 돌리는 목공, 마굿간, 어미소의 젖을 짜는 장면 등 풍속화와 닭, 개 , 병아리, 메추라기, 두꺼비, 산나리. 일상을 그린 그림 15점이 들어 있습니다. 


이병연의 발문 중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조 때 세조의 어진을 중모하는 일이 있었을 때 홀로 나의 벗 조종보(조영석)는 붓을 내던지고 옥(獄)으로 나아가 임금의 노하심을 크게 범하는 데 이르렀지만 스스로 슬퍼하지 않았다. 이는 우세남과 이백도 내치지 못하였던 것이니, 어찌 예전과 지금으로 사람의 높고 낮음을 정할 수 있겠는가? 종보의 그림이 다시는 한 점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나 여러 아이들이 종잇조각들을 주워 모으니 스스로 쓰기를 ‘사제첩(麝臍帖)’이라 하였다. 동리의 사천 노인이 이에 속으로 느끼는 바 있어 또 그 끝에 쓴다. 


조영석 <고목도(古木圖)>종이에 먹, 30.5x23cm, 개인

고목을 그리고 왼쪽에 발문을 썼다. '종보(宗甫)'는 그의 자. 

“가장귀나무와 종려나무에 울창하고 마르고 황폐하고 굴곡진 모습을 갖추어야 진정한 고목이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술통이 술과 어울리지 못하면 술의 제맛을 잃게 되는 것처럼 특이하다. 그래서 고목은 도랑에서 자라나야만 제 면모가 살아난다. ”


사천, 겸재, 관아재와 공재
이병연은 1671년생, 정선은 1676년생, 조영석 1686년생으로 이들보다 약간 선배 격으로 윤두서가 있었지요. 공재 윤두서는 1668년생으로 조선 서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람이지만 이들과 공재가 서로 교유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공재 윤두서와 겸재 정선이 서로 만났다는 증거가 전혀 없습니다. 윤두서는 서울 회현동에 집이 있었지만 수원에서 살다가 여러 조건들 때문에 해남 고향으로 내려가 살았기 때문에 친해질 계기가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노가재의 후손들
노론 집안은 완물상지, 즉 물건을 너무 탐하면 뜻을 잃는다고 했던 터라. 글씨를 너무 치중하면 글이 안 는다며 글씨를 잘 쓰는 것을 경계했지요. 그래서인지 우암 송시열 이후 글씨 잘 쓰는 사람이 나오기 어려운 분위기였습니다. 노가재 김창업(삼연 김창흡의 동생)이 그림을 그렸더니 아버지가 공부에 방해된다면서 그만 그리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노가재 김창업은 조선시대 삼대 연행록 중 하나를 쓴 사람으로도 이름을 남겼지요.(맏형 김창협 덕에 자제로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김창업은 형 삼연의 글씨를 조금 닮았습니다. 벼슬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노가재 집안의 분위기가 그랬던지, 김창업의 아들과 손자 모두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유명한 화가 김윤겸(1711~1775)이 그의 아들(서자)이고, 김윤겸의 아들 김용행(1753~1778)도 그림을 잘 그렸던 화가입니다. 김윤겸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척했는데, 김창업, 김창흡 집안과 친밀했던 정선과 김윤겸이 밀접한 접촉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는 김용행은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와 교유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합니다. 그는 퉁소를 잘 불었다고 하고 성격이 ’아무도 못말려‘ 였던 것 같은데, 지병이 있어 스물 다섯 해를 살고 요절했습니다. 

김창집의 후손(현손)인 김조순(1765-1832)은 순조의 장인 즉 정조의 사돈으로 어린 순조 뒤에서 30년간 집권,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주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황산 김유근이 김조순의 장남입니다. 김조순의 묵죽, 김유근의 괴석이 유명합니다. 



김조순 <산수> 서화첩 부분, 29.5x19cm, 10면, 개인
여백에 '사원(士源)씨사'라고 써 있어 김조순의 그림임을 알 수 있다. 화제는 두보의 시.
김조순과 이조원의 그림과 글씨가 수록된 서화첩에 포함된 그림으로 해당 서화첩은 2022년 12월 23일 칸옥션 경매에서 3,800만원에 낙찰됐다.

업데이트 2023.05.17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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