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노인이 되어서야 벼슬을 할 수 있었죠. 영조 때 기로과를 특별히 설치해 합격해서 평생의 한을 풀었을 겁니다. 이 때 또다른 기로과 출신으로 유명한 시인 석북 신광수(石北 申光洙, 1712-1775)가 있습니다. 신광수는 1772년 61세에 기로과 장원, 강세황은 1773년에 급제해 벼슬을 했는데, 신광수는 윤두서의 사위로 강세황과 나이도 비슷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강세황의 글씨 중에 표암이 신광수에게 써 준 것이 있는데, 유명한 <관서악부關西樂府>입니다. 신광수가 지은 이 글은 7언 4구의 시 108수여서 삼천 자가 넘는 장편인데, 이 속에는 평양의 역사, 지리, 풍속, 충효, 사찰, 누대, 속요(俗謠), 유흥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읊고 있고, 그 표현이 섬세하고 절절하여 하나하나가 진주 같다고 하여 '백팔진주(百八眞珠)'라 하기도 하고, 일 년 동안을 사시로 나누어 읊었다 하여 '관서백사시행락사(關西伯四時行樂詞)'라고도 합니다. 이 관서악부는 석북의 다정한 친구인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1720-1799)이 평안감사가 되어 부임한 후에 당대 최고의 시인인 석북에게 시를 지어 달라고 계속 채근을 하니, 십여 년 전에 평양산천을 두루 돌아보고 시를 지어 그 광경을 표현해 보고 싶었던 신광수가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생각을 쏟아 낸 것입니다.
강세황의 글씨 중에 표암이 신광수에게 써 준 것이 있는데, 유명한 <관서악부關西樂府>입니다. 신광수가 지은 이 글은 7언 4구의 시 108수여서 삼천 자가 넘는 장편인데, 이 속에는 평양의 역사, 지리, 풍속, 충효, 사찰, 누대, 속요(俗謠), 유흥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읊고 있고, 그 표현이 섬세하고 절절하여 하나하나가 진주 같다고 하여 '백팔진주(百八眞珠)'라 하기도 하고, 일 년 동안을 사시로 나누어 읊었다 하여 '관서백사시행락사(關西伯四時行樂詞)'라고도 합니다. 이 관서악부는 석북의 다정한 친구인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1720-1799)이 평안감사가 되어 부임한 후에 당대 최고의 시인인 석북에게 시를 지어 달라고 계속 채근을 하니, 십여 년 전에 평양산천을 두루 돌아보고 시를 지어 그 광경을 표현해 보고 싶었던 신광수가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생각을 쏟아 낸 것입니다.
이 시를 완성한 후에 석북은 또다른 친구이자 글씨로 이름을 떨친 표암 강세황에게 편지를 써서, "그대의 멋진 글씨로 이 시를 써 준다면 촌 여자가 서시와 같은 미인이 되지 않겠냐"고 부탁합니다. 석북 문집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생각하면, 이 부탁을 받은 강세황이 바로 관서악부를 써 주었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석북의 후손이 가지고 있는 표암 글씨의 관서악부에 표암이 쓴 발문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석북이 1774년 무렵 이 시를 완성하고 1774년 말이나 1775년 초에 표암에게 편지와 이 시를 보냈는데 표암이 무슨 사정인지 쓰지 못하고 있던 차에 석북이 1775년 4월 세상을 뜨게 됩니다. 표암이 석북의 죽음을 슬퍼하며 관서악부를 써서 아들에게 보낸 것은 그해 가을이었습니다.
표암 강세황이 글씨 쓴 석북 신광수의 <관서악부> 부분
당시 표암의 인간관계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안산 15학사입니다. 안산에서 어울리던 열 다섯명의 선비들인데 여기에는 강세황, 허필, 유경종, 이용휴 등등이 포함되고 이들은 대개 남인 아니면 소북 사람들입니다.
조선 후기 예단이 만약 두 갈래라고 한다면, 겸재의 백악 예단은 노론 중심이 될 것이고 그에 상대할 만한 것이 (비노론계) 표암 예단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표암은 대단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시, 서, 화를 다 잘 해서 삼절이라고 불린 것은 물론, 표암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면도 있고, 리더십이 조금 있었던 듯합니다. 말년에 서울에 와서 활동 북인(소북)이면서 소론계 사람이나 노론계와도 사이가 멀지 않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정치적인 분위기가 그를 돕지 못했기에 가난했고, 서울 회현동 쪽에 살다가 가세가 기울고 염천교 근처 처갓집 부근으로 이사하여 살았습니다. 유명한 시인 처남 해암 유경종(柳慶種, 1714-1784)과는 한 살 차이로 친하게 지냈는데, 결국 처가 진주 유씨의 터가 있는 안산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진주 강씨들은 주로 괴산, 공주, 그리고 천안 아래 풍세 쪽(강씨들 산소 남아 있다)에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이후 안산으로 이사 온 집들이 많았습니다.
진주 유씨들은 당시 안산에 땅이 많았고 표암은 유경종의 신세를 지게 됩니다. 서로 친구로 지내던 연객 허필, 표암 강세황, 해암 유경종 세 사람 글씨가 비슷한 와중에 해암과 표암은 더 비슷합니다. 담배를 많이 피워 호도 연객인 허필도 시서화를 모두 잘 했는데, 연객 글씨는 표암에다가 이인상의 글씨를 섞은 듯이 획이 많이 풀어져 있습니다.
허필 <묘길상> 종이에 먹, 30.0x98.1cm, 국립중앙박물관
<노송도> 오른쪽 화제는 허필이, 왼쪽 발문은 강세황이 썼다.
표암 글씨의 특징은 다소 여성적이랄까, 획이 가늘고 길고 유동성이 큰 편인데, 가늘고 두꺼운 밸런스가 잘 맞아서 예쁩니다. 백하 윤순 글씨와도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동기창에서 온 것은 확실한데 동기창보다 획이 많고 굵습니다. 예쁘긴 한데 격조가 있다고는 하기 어렵습니다. 이와 비교하면 이인상 글씨는 예쁘면서도 격조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강세황 <作書畵所見> 1789년, 종이에 먹, 37.5x22cm, 통보사성보박물관
강세황 <행서 시고 십곡병> 부분, 종이에 먹, 각 52x32.5cm, 개인
두보, 이백 등의 시
표암 글씨보다 연객의 글씨가 더 풀어져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잘 쓴 것은 괜찮지만 조금 못 쓸 때는 흐트러진 느낌을 줍니다. 개인적으로는 표암 글씨보다는 연객의 것을 더 좋아합니다. 연객의 글씨는 한나라 예서 기운이 붙어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가 좋아하던, 그 예서의 낭창낭창함.
표암과 연객은 최북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호생관 최북은 글씨다운 글씨가 남아있지 않고 관지도 많지 않아서 글씨를 평가하기 어렵지만, 글씨는 연객 허필의 것과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북 <송하한담도> 비단에 수묵담채, 25.4x36.7cm
호생관 그림에 있는 글씨 중에 본인이 쓴 글씨인지 확실치 않지만 좋은 글씨가 있습니다. 표암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비슷한 스타일의 글씨로 시를 쓴 것은 본인 글씨일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가로획이 세게 나가서 가늘게 빼는 것, 앞에서 치는 것, 각도도 있고 멋을 낸 글씨입니다. 옷으로 말하면 상의에 깃을 세우고 입은 셈이라고 할까, 어떻게 보면 조금 간드러집니다. 조선 후기 글씨 중에 강약의 장점이 잘 드러난 글씨에 속합니다. (허필은 최북에 비해 멋을 더 부립니다.)
청명 임창순(1914-1999) 선생 등은 표암 글씨를 별로 안 좋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글씨 못 쓰는 사람도 이렇게 쓰면 예뻐 보인다고 하기도 하셨지요.
표암이 여러 사람과 어울렸지만 당연히 북인쪽 사람들에게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조의 입장에서는 실각한 북인과 남인의 인재를 고르게 쓰고 싶었을 것이고, 석북이나 표암을 등용한 데에도 그런 배경이 있었을 것입니다. 표암은 똑똑하고 활발하고 대인관계가 원활했던 사람이니 적합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야당이지만 여당 인사들과도 교류가 어렵지 않은 인물을 떠올리면 그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건륭황제 재위 60년을 축하하기 위한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중국 당대 명사들이 표암의 글씨를 높게 평가하고 교유했습니다. 이후 정조 대의 연행사절에도 연결해 주는 등 역할을 했습니다. 표암이 연행을 다녀온 이후 예술의 풍조가 달라졌다고 할 정도로 표암의 말은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서화 잘 쓰기만 했던 사람이라기 보다 판을 읽고 변화시키려고 했던 사람이며, 중국이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고 한국이 가야하는 길도 보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사군자 화본 네 개를 세트로 다 그린 사람은 표암이 거의 최초일 것입니다. 사군자를 유행시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세황의 묵매도에 허필이 제를 달았다.
19세기 추사 이전, 18세기 시서화 통틀어 예단. 학술, 시와 서를 함께 봤을 때. 전각도 할 줄 알았던 표암이 중심인물이라고 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표암 당년부터 우리나라에 전각이 유행하고 이를 추사가 한 단계 끌어올리게 됩니다. 도장도 이전에는 조잡하거나 너무 크거나 작은 것 등 두서가 없었는데, 표암 이후에 인장의 수준이 상당히 좋아집니다. 그 전에는 누가 누굴 도와준다는 개념이 없었는데 후학에게 멘토로서 이야기해주고 끌어주는 방식이 강화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술사에 오르내릴 만한 관계를 만들었습니다.
농암 김창협이나 삼연 김창흡이 겸재 정선에게 그림에 대해 조언을 하고 이끌어주는 역할을 강하게 했을까요? 그렇게 할 만한 것이 많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표암은 스스로가 시서화 다 할 줄 알았기 때문에 멘토로서 더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표암에게서 마지막으로 대우/인정 받은 사람은 단원 김홍도와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5) 정도였던 듯합니다. 자하는 16-17세부터 시인으로 유명했습니다. 단원은 1745년생이고 표암은 1777년에 세상을 떴으니 단원이 스무 살이었을 무렵 만나 십 여 년 출입했을 것입니다. 단원 글씨에서 표암과 유사한 면을 볼 수 있습니다. 표암 글씨에 이광사를 합친 것 비슷. 표암은 비뚤게 쓰지는 않는데 이광사는 약간 비뚤비뚤하게 씁니다. 즉 단원은 표암과 비슷한 글씨이면서 비뚤게 씁니다. 단원만 그런 건 아니고 화원과 역관 출신들이 조금 그런 경향을 보입니다. 이광사의 영향일 수도 있습니다.
화원 중에서 글씨 좋은 사람이 많지 않은데 단원이 생각보다 글씨가 좋은 것은 표암이 영향인 듯합니다. 김홍도의 친구 이인문의 경우 글씨를 전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 생각에는 박제가의 그림으로 알려진 그림 중 상당수는 이인문의 그림이고, 여기에 박제가가 글씨를 썼기 때문에 오인된 것입니다. 박제가는 화제를 썼을 뿐. 이인문의 그림 화제는 거의 유한지, 홍의영, 박제가 등 다른 사람이 썼습니다(장승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서와 예서를 열심히 연습했으나 표암의 주된 글씨는 행서. 표암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글씨와 글을 잘 했지만 분위기는 달라서 한석봉 스타일에 가까운 글씨를 썼습니다. 표암에서 확 달라진 후에 후손들에게 이 글씨가 아들인 강인 삼형제, 강이천 강이오 등의 손주들, 강진, 강로 등의 증손자들로 이어집니다. 자손들도 그림을 잘 그렸고, 그 집안의 편지들이 꽤 많이 나오는데 글씨도 비슷합니다. 천주교 때문에 고생한 후손들이 많은데, 그중 정조와 맞선 불량선비 강이천은 어려서부터 시를 잘 썼던 것으로 유명했지요. 제가 친필 글씨 하나를 가지고 있기도 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