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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복의 서예이야기] 연암파의 글씨 1 – 이한진

조선 후기의 실학자 중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글씨는 크게 돋보이지 않지만 그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 중 서예가라고 할 만한 사람으로 이한진(李漢鎭, 1732~?), 조윤형(曺允亨, 1725~1799), 유한지(兪漢芝, 1760~1834) 등이 있고 이덕무(李德懋, 1741~1793)도 글씨를 잘 썼습니다. 

경산 이한진
경산(京山) 이한진은 성주 이씨의 좋은 집안으로, 고려말의 문신 이조년, 조선 초기 문신 묵재 이문건(조광조의 문하였던 이문건은 황기로와 친구 사이이기도 했음) 등이 성주 이씨 집안입니다. 이한진은 50이 다 되어서야 소과에 급제해 미관말직으로 지냈습니다. 외가가 안동 김씨 농암, 삼연의 집안이라 그의 영향도 많이 받았으며, 박지원, 홍대용, 성대중 등과 어울렸습니다. 

이한진은 전서로 유명해, 이인상 그룹(이인상, 송문흠, 이윤영)의 다음 세대를 이어나갔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한진의 한 세대 아래로는 유한지가 전서로 유명합니다.
전서는 많이 쓰는 글씨가 아니니 시대별로 한 두 사람이 대표하게 됩니다.


이한진의 전서


 


정황 <이안와수석시회도易安窩壽席詩圖> 1789, 종이에 수묵담채, 종이에 먹, 42.3x73.5cm(시축 전체), 개인
서문은 유한준이 쓴 것이고, 상단의 전서 제자 ‘易安窩壽席詩軸’이 이한진의 글씨다.
이안와 남백종(南伯宗, 1729∼?)이라는 이의 회갑일에 이안와(易安窩)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그의 장수를 축하하고 시회 모임을 가졌다(남기한의 집은 자하동으로 저택 내 별채 이름이 이안와였다). 이때 정선의 손자 정황을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해, 화려한 꽃나무, 수석과 화분이 둘러싼 가운데 명사들의 모임을 기록했다. 



이한진의 전서는 획이 가늘고 굵기가 일정한 당나라 이양빙(李陽氷)의 옥저전(玉箸篆)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옥젓가락을 휘어놓은 것 같은 글씨라 획이 균일하고 변형이 적고 조형미는 있으나 재미가 좀 없습니다.


이양빙 천자문



<삼분기(三墳記)> 767년. 이계경(李季卿)이 짓고 이양빙이 씀. 원석은 소실.


이인상이나 유한지는 획에 강약이 있고 유연한 맛이 있는 데 반해 이한진의 경우는 예서를 많이 쓰지 않아서인지 유연한 맛이 없습니다(이인상과 유한지는 예서도 많이 썼습니다). 전서는 좀 큼직해야 멋있기 때문인지 크기가 작은 세필 전서가 드문데 이한진은 세필 전서 또한 많이 남겼습니다. 이인상이나 유한지의 경우 작은 전서를 보기 어렵습니다. 


이인상의 전서와 예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화첩)


유한지의 전서 (기원첩)



이한진의 전서(경산전팔쌍절첩)



조선시대 전서의 쓰임
그 시대, 전서는 왜 썼을까요. 다른 쓰임도 많지만 주로 비석의 머리 부분, 비액(碑額)에 쓰기 위함니다. 전서(篆書)로 쓴 비액을 전액(篆額)이라고 하고, 종종 예액(隷額)도 눈에 띕니다. 


영통사 대각국사비 탁본


전서는 고대부터 내려오는 글씨이기 때문에 신과 통한다고 생각해서 초기 진나라 이전 제사와 관련된 물건에 많이 새겼습니다. 그것이 비석 꼭대기에 남게 된 것이죠. 도장도 전서로 많이 새기는데, 혼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사자관과 별도로 전서를 쓰는 사람을 따로 뽑았습니다. 옥새나 나라에서 쓰는 도장, 임금이나 왕후가 죽으면 일생을 적어 무덤 속에 넣는 옥책 등을 담당했습니다. 역시 신성한 글씨로 여겼던 때문입니다. 옥책에 새겨 넣는 시호는 차후에 증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다시 만들기에 일거리가 계속 있습니다. 

이한진의 생전에 비석에 전서를 써 달라는 요청이 아마 많았을 것입니다. 여러 비석에서 이한진의 전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비석에 새길 글씨를 쓰는 것은 대가를 받는다고 다 쓰는 것이 아니고 개연성과 설득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한진이야말로 쓰고 싶은 기분이 들어야 썼습니다. 

이한진은 음악적으로도 재능이 뛰어나 그의 퉁소는 홍대용의 거문고와 짝을 이뤄 모임의 분위기를 띄우는 데 큰 역할을 한 듯합니다. 김홍도 등과 어울리며 남긴 글씨도 많습니다.


김홍도 그림, 이한진 글씨 <암거천관巖居川觀> 《영정첩寧靜帖》25.5x16.7cm(그림)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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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이한진 등과 교유했던 이들 중에 나열(1731~1803)이라는 사람도 시와 글씨가 좋다는 평을 들었는데, 근역서화징에서 오세창은 나열에 대해 '왕희지를 배워 글씨가 기이하고 강건하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업데이트 2023.07.1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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