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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복의 서예이야기] 연암파의 글씨 2 - 유한지, 이덕무

유한지의 전서와 예서
이한진 이야기를 했으니, 전서로 유명했던 사람으로 당시에 기원(綺園) 유한지(兪漢芝, 1760~1834)도 함께 언급해야겠네요. 유한지는 이한진보다 28살 어려 세대 차이가 있지만 연결고리가 꽤 있는데, 성대중(1732~1809) 등 두 사람과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꽤 있어서 이한진과 유한지의 직접적인 교유 기록은 없다 해도 서로 얼굴을 본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전서 글씨로만 보자면 유한지는 이한진보다는 시대가 더 먼 이인상(1710~1760)과 비슷한 모양새입니다. 이인상 계통의 전서라고 했을 때 차이 나는 부분은 이인상이 더 풀어지고 유한지는 조금 경직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이한진은 이인상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다른 서법의 전서를 썼습니다. 


유한지 예서 <기원첩>


유한지의 경우 예서가 중요한데,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 '화홍문' 현판, 정조대왕이 수원에 행차할 때 지나던 만안교 교비에 새긴 명칭 등이 그의 예서 글씨입니다. 그는 조전비 계통의 예서를 주로 썼습니다. 한나라 때의 예서를 구분할 때 근본이 되는 비석의 이름을 따라 예기비(禮器碑), 조전비(曹全碑) 등으로 나눕니다. 예기비 예서는 한비 중에서 가장 근엄하고 품위있고 남성적이어서 획이 각지고 네모난 틀 안에 들어가게 쓴 듯 보입니다. 예기비보다 조금 늦게 세워졌던 조전비의 예서는 아름답고 삐침, 파임 등이 유연하고 율동감이 있습니다. 예기비는 경직되어 보이고, 조전비는 너무 부드러워서 가벼워 보일 수 있습니다. 후에 오경석(1831~1879)이는 조전비만 썼습니다. 조선시대의 예서에서 예기비와 조전비를 모두 발견할 수 있으나 조전비의 영향이 좀더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기비



조전비


유한지와 김홍도
유한지의 인맥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김홍도(1745~1806?)와 어울렸던 흔적이 꽤 많다는 것입니다. 김홍도는 스스로도 글씨를 잘 썼지만 다른 이와 합작하여 서화를 남긴 예도 많지요. 김홍도의 대표작 중에 김홍도가 그림을 그리고 낙관을 보태고, 제목은 유한지가, 글은 홍의영이 쓴 작품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유한지의 글씨에 김홍도 그림인 작품은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1796년 10월 수원화성이 완공된 후 김홍도가 그린 '서성우렵(西城羽獵)', '한정품국(閒亭品菊)' 작품 상단의 제목은 글쓴이가 누구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유한지의 글씨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김홍도 <기로세련계도>1804년경, 비단에 담채, 137.3x53.2cm, 개인
화면의 상단부에 홍의영(洪儀泳)이 쓴 장문의 제발(題跋)과 유한지(兪漢之)가 쓴 제목이 있다.




김홍도 <응렵도> 종이에 담채, 24.5×69.5㎝, 삼성미술관 리움
김홍도가 그림을 그리고 유한지가 글을 쓰고, 이한지가 감상했다고 적힌 부채 그림
'단원사(檀園寫) 기원서(綺園書) 경산관(京山觀)'


유한지 글씨, 김홍도 그림



* 김홍도와 친했던 이인문의 경우 그가 글을 못하니 대부분 간재 홍의영, 유한지, 능사 황기천, 박제가, 등이 써 주었다고 합니다. 

김홍도의 그림도 이 때가 가장 좋고, 유한지도 당시에 활동을 왕성하게 했습니다. 대부분의 그림에 제를 남길 때 행서를 많이 사용했지만 좋은 예서를 쓰는 경우 품위를 더할 수 있었습니다. 김홍도는 화원이지만 유한지 등 양반들과 어울리면서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겠지요. 박제가의 경우는 이인문과 어울렸다고 하는데 김홍도와 함께 한 기록은 없습니다. 박제가 그림으로 전해지는 산수화가 있는데 글씨만 박제가의 것이지 그림은 이인문같은 다른 사람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덕무의 개성 있는 글씨 
이한진, 유한지와 함께 북학파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겠지요. 이덕무는 서예가로 거론되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예서를 비롯해서 글씨가 매우 좋은데, 그의 글씨는 어디에서 온 것인지 단언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덕무의 글씨


이덕무는 서자 출신으로 집안도 어렵고 몸도 약해서 동네 서당에서 배웠는데, 워낙 총명했던 데다 실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깊이 공부해서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오기도 하면서 경험과 지식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박제가, 유득공 등과 함께 규장각 검서관이 되기도 했고, 이서구 같은 양반집 자제도 그에게 배웠다 할 정도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서구 글씨 중 이덕무 글씨를 따라 쓴 편지도 남아 있습니다. 

이덕무의 예서 기를 넣은 명조체 필사 글씨가 일품인데 안타까운 것은 큰 글씨가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큰 글씨를 잘 쓰면 작은 글씨도 잘 쓰게 되지만, 반대로는 못 간다고들 하니, 큰 글씨가 없으면 글씨로 그를 제대로 평가하기가 힘듭니다. 힘이 있고 독특한 면으로 보면 연암 박지원의 글씨가 이덕무의 글씨에 영향을 준 듯도 합니다.
업데이트 2023.08.09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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