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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복의 서예이야기] 구한말의 전서와 예서, 몽인 정학교

한 때 전서 글씨를 수집하기 위해 애쓴 적이 있는데, 사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면서 말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전서 글씨가 인기가 없습니다. 구한말까지 전서나 예서를 쓰고 전각을 한 서예가가 꽤 있으나 지금은 많이 잊혀지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구한말 전서를 가장 잘 쓴 사람으로 오세창(1864~1953)이 많이 알려져 있지요. 그리고 그 이후 시암 배길기(1917~1999) 선생의 전서가 유명한데 미술시장에서 거래 가격은 많이 낮습니다. 안광석(1917~2004)도 대표적 전서 서예가입니다. 다만 전서라는 글씨 또한 자기 특징을 가져야 하는데 이서라고 할 만큼 개성있는 글씨가 별로 없습니다. 


오세창 <도덕길상道德吉祥> 25x105cm



배길기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 33x132.5cm



안광석, 묵서대련, 1976년, 32.5x125.5cm


오원 장승업(1843~1897) 그림에서 많이 보이는 예서 글씨는 몽인 정학교(1832~1914)의 것일 경우가 많습니다. 장승업 그림에 글씨가 있는 경우, 행서든 예서든 그중 70~80퍼센트는 정학교가 쓴 것이라고들 하죠. 문인화 괴석도로 유명하지만 글씨로도 널리 이름을 알렸습니다. 근역서화징에서는 “전서, 예서, 해서, 초서가 모두 대단히 뛰어났으니 광화문의 액자를 썼다”고 그의 명성을 증언합니다(광화문 현판 글씨는 경복궁 중건시 훈련대장이던 무관 임태영이 썼다는 일지 기록이 나왔고 중건시 정학교의 나이가 30대 초반이라 의문이 남은 부분입니다). 김석준은 그에 대한 시에서 “반평생 글씨 명성 항상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며 “모나고 둥근 모양이 구양순과 우세남 법이거나 안진경 힘줄에 유공권의 뼈”라고도 했습니다. 


정학교 <괴석도> 종이에 먹, 115.5x36.7cm,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정학교, 예서 시고, 비단에 먹, 118.5x35cm(좌) 행서 시고, 종이에 먹, 118.5x24.5cm(우) 



장승업 <기명절지> 2폭, 종이에 수묵담채, 각 132.6x28.7cm



몽인의 선조들은 천주교 박해로 고향을 떠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집안이 경상도 문경 산골에 거주하고 있었고, 그는 어릴 때 충북 청안에 이주해서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생원시에 합격하고 어찌어찌해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눈에 들어 그와 친밀하게 지내면서 민영익, 윤용구와도 교유하고 이상적, 김석준, 오경석 등 역관 문인들, 이한철, 유숙 등의 화원, 경아전의 여항문인들과도 교유했습니다. 대원군의 믿음을 얻어 광화문 현판 글씨를 쓰기도 하고 화원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장승업의 그림에 대리낙관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이라는 조선왕조 공식 인보집이 있는데, 헌종(재위 1834-1849)이 실제 사용하던 인장과 직접 수집한 인장, 왕실에서 가지고 있던 인장을 당대 서화와 시문의 대가인 자하 신위(1769-1847), 조두순 등을 시켜 집대성한 것입니다(보소당은 헌종이 쓰던 당호). 헌종 사후 인보집에 실린 인장 실물이 거의 소실됐다가 고종 때 다시 다시 보각(補刻)했는데, 이 때 이 일을 맡은 것이 정학교입니다. 고종 때의 『보소당인존』은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정학교의 아들이자 서화협회의 발기인이었던 정대유(1852~1927) 또한 서화가이자 서예가로 이름을 얻었습니다. 정학교의 동생으로 알려진 서화가 정학수도 서화협회 발기인으로 그의 생몰년은 정확치 않으나 1860년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태어난 해가 1884년이라는 기록도 있었으나, 정학교와 형제라고 할 때 55년이 넘게 나이 차이가 나서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업데이트 2023.10.05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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