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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편지 45] 요즘 사람들이 이를 옛 印法이라 하는데 깜짝 놀랄 일이네

글/ 김규선(선문대학교)


 옥수 조면호가 한대(漢代)의 인장 등 중국의 인장에 대한 여러 가지 물음에 답신 형식으로 쓴 편지이다.(『옥수선생집(玉垂先生集)』 권28 「상김추사, 정희(上金秋史, 正喜)」 계해 참조)*  『완당전집』에 실려 있지 않은 귀한 자료이다. 

 역대의 인장사를 개괄하며 구체적인 내용까지 상세하게 언급한 데에서 추사가 가진 박학의 범위를 짐작케 한다.
 추사의 척질이자 제자로 시와 글씨에 일가를 이룬 조면호는 청나라의 문인들과 다양하게 교류하며 관련 문물들을 많이 소장했음이 그의 문집 곳곳에서 확인되는데, 묻고 답한 두 통의 편지에서, 추사를 중심으로 한 당시 학계의 학술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앞서 소개한 추사 편지들과 함께 원래 옥수의 집안에서 소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漢印, 只有官·私兩印, 而漢人多作姓名印, 一人至於百十方. 卽爲傳後計, 故後世所傳漢印, 無論銅玉, 或收儲至數千方, 奚止八百而已. 近世所傳內府甚多, 潘有爲最盛, 其次千餘方者, 亦非一二.
 至於閒印[卽堂号文字等], 始於唐李長源端坐軒, 宋元以來汎濫爲文字之屬, 遂至於今, 而閒印多於姓名印, 六朝亦無閒印矣.
 蘭亭原無印款, 如歐本·褚本各有宋元以來收藏印, 褚氏印·神龍印, 皆於摹榻後所鈐識, 非山陰原本之所有耳.
 厲樊榭漢印譜序所稱諸人, 皆前代之收藏漢印者, 而外此又不勝指屈, 何以一一枚擧耶? 又有以漢印法刻漢人姓名, 而恰與漢印相混者爲幾千方, 作譜以傳, 而具眼者, 亦能辨別耳.
 王子梅所得漢印, 偶與其姓名相符, 以爲奇遇. 至於漢鴻事蹟, 無考耳. 許印林·齊玉溪, 果有其人, 阮圖未之見耳.
 大槩漢印一法, 非篆非隷, 自有一法. 卽所謂繆篆, 而與說文鍾鼎等字大異. 今人以說文鍾鼎等字, 入之印刻, 謂之古印法, 如此令人大噱處. 若求印學, 此非猝乍可及, 有甚於書學畵學耳.
 한인(漢印, 한나라 때 인장)은 관인(官印)과 사인(私印) 두 가지만 있네. 한인(漢人)들은 대부분 성명인(姓名印)을 사용하여 한사람이 110방(方)까지 새기기도 하네. 후세에 전할 계획이 담겨서, 후세에 전해진 한인은, 동(銅)과 옥을 포함하여 수 천 방을 소장한 사람이 있기도 한데, 비단 800방 뿐이겠는가. 근세에 내부(內府, 궁내)에 전하는 것이 아주 많은데, 개인으로는 반유위(潘有爲, 옹방강의 제자)가 가장 많고, 천여 방에 이른 사람도 한둘이 아니네. 한인(閒印)[당호(堂號) 문자 등]은 당나라 이장원(李長源, 이독李瀆)의 단좌헌(端坐軒)에서 시작했으며, 송·원이래 문자인이 범람하였고, 지금에 와선 한인(閒印)이 성명인보다 많네. 육조시대에는 한인이 없네.
 난정서첩(蘭亭敍帖)엔 원래 인관(印款)이 없으며, 해당 첩의 구양수본(歐陽脩本)과 저수량본(褚遂良本)에는 저마다 송·원이래의 수장인이 있는데, 저씨인(褚氏印)과 신룡인(神龍印)은 모두 임모한 것에 날인한 것일 뿐 산음(山陰, 왕희지)의 원본에 있는 것이 아니네.
 여번사(厲樊榭, 여악厲鶚 1692~1752)가 쓴 한인보서(漢印譜序)에서 거론한 인물들은 모두 지난 시대 한인(漢印) 수장가들인 바, 이 밖에도 손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어찌 하나하나 다 거론할 수 있겠는가. 또 후대에 한인(漢印)의 각법으로 한인(漢人)의 성명을 새겨 원래 한인(漢印)과 뒤섞여있는 것도 몇천 방이 되고, 그것이 인보로 만들어져 전하기 하는데, 안목을 갖춘 이라면 판별해 낼 수 있네.
 왕자매(王子梅, 왕홍王鴻 1807~?)가 소장한 한인(漢印)은 자신의 성명과 우연히 일치한 것으로, 특별한 일일세. 한(漢) 왕홍(王鴻)의 사적에 대해서는 고증할 수가 없네. 허인림(許印林, 허한許瀚 1797~1866), 제옥계(齊玉溪, 제학구齊學裘 1803~1883)에게는 실제 해당 인물이 있는데, 완도(阮圖, 완원 한 대인보漢代印譜)에만 보이지 않네.
 한인의 법은 전서도, 예서도 아닌 별도의 법을 갖고 있네. 이른바 무전(繆篆)이라는 것으로, 『설문(說文)』, 종정(鍾鼎) 등의 글자와 아주 다르네. 요즘 사람들이 『설문』, 종정 등의 글자를 인장에 새겨 넣으며 이것을 고인법(古印法)이라 하는데, 이는 매우 깜짝 놀랄 일이네. 인학(印學) 공부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글씨나 그림 공부보다도 어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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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옥수선생집(玉垂先生集)』 권28 「상김추사, 정희(上金秋史, 正喜)」 계해년(1863, 계해년은 추사 사후 연도여서, 옥수 문집의 오류로 보임. 실제 『옥수선생집』엔 오자가 아주 많음.)

 私印始于漢官, 見於文字者, 未詳幾處. 證以淳煕淸賞堂印, 宋之君臣皆用之. 竊疑宋以前, 溯以至晉, 未必不用也.
 蘭亭帖擧無印識可考否? 閱之且久, 今不存儲, 亦不喜與人煩瓻(?), 攷據無術, 徒自儚儚. 
 厲樊榭漢印譜序, 有王揚(楊)吾邱朱葉諸家之譜, 格式考而韻釋之, 並不得過眼.
 程氏所藏八百餘件, 亦豈盡獲一時者乎? 必有其說.
 外此前後當不無獲印家傳奇之作, 可得聞一二古實否? 乞垂隲.
 近聞王子梅鴻得漢王鴻私印, 洵奇遇也. 未知漢鴻却是何許人? 有事蹟之或著者否?
 阮太傅書首, 齋(齊)玉溪作圖, 許印林作攷, 此卷已果鑒別否? 並以問焉.
 사인(私印)은 한나라 관인(官印)에서 시작하는데, 문자로 확인되는 것이 몇 몇 곳인지 자세하지 않습니다. 송(宋) 순희(淳煕)의 청상당인(淸賞堂印)을 증거로 들면, 송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모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심스럽지만 송을 거슬러 진(晉)나라 때까진 반드시 사용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난정첩(蘭亭帖)」엔 고거(考據)할 만한 인지(印識)가 없는지요? 오랫동안 열람했었는데 지금은 보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남들과도 번거롭게 거론하고 싶지 않은데, 고증할 길이 없어 혼자 먹먹해 하고 있습니다.
 여번사(厲樊榭, 여악厲鶚)의 한인보서(漢印譜序)에, 격(格)과 식(式)을 탐구하고 운(韻)을 해석한 왕후지(王厚之, 송宋, 「한진인장도보(漢晉印章圖譜)」)·양극일(楊克一, 송 「집고인격(集古印格)」 )·오구연(吾邱衍, 원元, 「인식(印式)」)·주규(朱珪, 원, 「인문집고(印文集考)」)·섭삼(葉森, 원, 「한당전각도서운석(漢唐篆刻圖書韻釋)」)등의 인보가 소개돼 있는데 모두 실물을 보지 못했습니다.
 정씨(程氏, 정종룡程從龍 「정여강진한인보程荔江秦漢印譜」)가 소장한 800여 건은 어찌 한 기간에 모두 모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그 내역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밖에 그동안 인가(印家)와 관련한 자료를 의당 구하셨을 걸로 생각되는데, 한두 가지 사실을 들려줄 수 있으신지요? 도움 주시길 앙망합니다.
 근래 자매(子梅) 왕홍王鴻, 1806~?)가 한대(漢代) 왕홍(王鴻)의 사인(私印)을 구했다 하는데 정말 기묘한 일입니다. 한대 왕홍은 어떤 사람인지요? 혹사 드러난 행적이 있는지요?
 완태부(阮太傅, 완원)가 제목을 쓰고, 제옥계(齊玉溪)가 그림을 그리고 허인림(許印林)이 고증한 책을 살펴보셨지요? 모두 함께 여쭙니다.
업데이트 2023.11.01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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