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칼럼 > 서예

[김영복의 서예이야기] 둔필이 없는 창녕 조 씨 가문 : 조문수, 조윤형, 조인승

조선 말에 동지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도 다녀온 조인승(曺寅承, 1842~1896)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사헌까지 올라간 사람으로 일본이 내정간섭을 하려고 하던 때, 일본측과 협상테이블에 앉기도 하고 조선의 독자개혁 대신으로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의병이 봉기했을 때 의병부대에 의해 살해됐습니다. 이 사람의 글씨는 부드러운 동기창 계열인데, 이 무렵의 김옥균, 홍영식 등 알아주는 글씨들이 비슷한 느낌이기도 합니다. 그 무렵의 글씨 중에는 이건창 글씨도 좋습니다. 


동곡 조인승, 서간, 종이에 먹, 25.4x37.7cm 칸옥션



이건창(1852~1898), 서간, 1895년, 종이에 먹, 22.4x38cm 경기도박물관


조선 말기의 조인승은 조선시대 글씨로 집안간 겨루기를 한다면 최고를 다툴 창녕 조 씨 집안입니다.(조선 전기에 성수침, 우계 성혼 등을 배출한 창녕 성씨가 잘 쓴다고 했지만 후기에 와서 그 후손들은 이름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조 씨 중에 글씨 못 쓰는 사람이 없다 해서 ‘조씨무둔필(曺氏無鈍筆)’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창녕 조 씨 가문에서 글씨로 대표가 될 만한 사람을 찾아 올라간다면, 이전에도 소개한 바 있는 설정(雪汀) 조문수(曺文秀, 1590~1647)라 하겠습니다. 조문수 당대, 17세기 조선에서 글씨 잘 쓰기로 손꼽혔던 사람들은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 1542~1621), 동회(東淮) 신익성(申翊聖 1588~1644) 등입니다. 김현성과 신익성은 모두 조맹부의 글씨인 송설체로 유명합니다. 조문수 또한 크게 보면 송설체이지만 여기에 왕희지체가 덧붙여져 가늘고 미려한 송설체에 비해 조금 둔탁한 느낌을 줍니다. 


설정 조문수 <范氏心箴> 1647년, 종이에 먹, 29X17cm, 1647년



조맹부趙孟頫 <한거부閑居賦>



왕희지(王羲之) <난정서(蘭亭序)>


획의 굵기에 큰 차이가 없어 둔탁한 느낌을 주어 획이 리듬감 있게 변화하는 신익성의 글씨나 강약이 있고 부드러운 김현성의 글씨와는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둥글둥글한 설정의 글씨를 들여다보면 한석봉의 글씨와도 닮은 점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신익성의 글씨




『근역서화징』에 인용된 『서주집』에서의 설정 조문수에 대한 평가를 보면 “본래 송설체를 좋아했으나 그 색태가 너무 곱고 예쁜 것을 싫어하여 다만 꺾어진 마디와 살이 이어댄 곳만을 취하고 거기다가 우군(右君, 왕희지)의 청진(淸眞)한 뜻을 혼합했으니, 그 글씨의 체와 기운이 무르녹고 순수하며 파임[波]과 지게다리[戈]가 유동하여 종이를 펴 놓고 글씨를 쓸 적에 바람과 비가 몰아치는 듯하여 크고 작은 해서와 초서가 각각 그 극진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끝 부분이 낭창낭창한 것이 송설체 장점인데 설정 조문수의 경우 지나치게 유려한 부분이 싫어서 일부 장점만 취하고 우직한 그의 서체를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석봉체가 약간 들어갔다고 봅니다. 


그의 아들 중에는 회곡(晦谷) 조한영(曺漢英,1608~1670) 문장도 잘하고 기백이 있어서 척화파로 심양에 억류되기도 하는 등 공이 있어서 불천위(不遷位)를 받습니다.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위,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되고 불천위가 되는 사당을 부조묘(不祧廟)라고 해요. 이 사당은 모실 사람이 없으면 나라에서 양자를 들이게해서라도 지키게 합니다. 



조한영, 동춘당 송준길 선생에게 보낸 시고(詩稿)


조한영 아래 두루 주(周)자 항렬 조헌주, 조건주 등이 글씨로 이름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들의 자식 대 하(夏) 자 돌림 조하망과 조하기가 영조 때의 명필입니다. 그 아래 명(命)자 돌림으로 조명채 조명교 등이 유명하고 글씨도 잘 썼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조명교의 아들 조윤형(曺允亨, 1725-1799)에 와서 창녕 조 씨 집안의 글씨가 빛이 났습니다. 원교 이광사와 백하 윤순의 제자로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서예가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조윤형 <난정시蘭亭詩(손작孫綽 시)> 21.7x11.7cm 화정박물관


송하 조윤형의 초서


조윤형의 해서


윤(允) 자 항렬인 윤형, 윤대, 윤명, 윤정 등이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알려졌었습니다. 조윤형은 그다지 높은 벼슬은 하지 못했지만 글씨로 유명했기에 임시로 서사관으로 발탁되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 정조가 『춘추』를 제작할 때 조윤형과 도곡 황운조(道谷 黃運祚)가 글씨를 나눠서 썼습니다. 까다로운 정조의 기준에 통과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송하 조윤형은 소론 글씨를 이야기할 때 다룬 적이 있었지만 특히 초서가 좋습니다. 윤백하, 이원교, 조송하 이 셋으로 연결된 초서는 연결하여 감상하고 연구해 볼 만 합니다. 조윤형의 독특한 사인이 있는데 송하옹(松下翁)이라는 세 글자를 하나로 합쳐서 쓴 것이 있습니다. 

조윤형의 글씨는 이광사보다는 각이 덜한데, 이는 그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워낙 부드러워서 알아보기 좋습니다. 이광사는 거칠고 강한 편이고 윤순도 부드러운 편입니다. 초서의 경우가 그런 것이고 예서와 해서 등은 세 사람의 글씨를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조윤형에게는 정부인에게서 아들이 없고 서자만 있었습니다. 조윤형은 서녀인 딸을 자하 신위에게 시집 보내 그의 첫째 부인이 됩니다. 
 
창녕 조 씨 윤자 항렬 아래에는 떨칠 진(振) 자 돌림으로 조용진, 조봉진이 있고, 조윤형의 양자 아들 조성진 등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조봉진입니다. 그 아래 항렬로는 주석 석(錫)자 항렬 조석원(조윤형 손자) 등이 있고 이 항렬에서 글씨 잘 쓰는 사람이라고 하면 조석원 외에 조석정(조윤명 손자), 조석여, 조석우 등이 있습니다. 



※ 관련 칼럼 링크
중기의 명필(1) : 남창 김현성
중기의 명필(2) : 선조의 사위 동회 신익성
중기의 명필(3) : 설정 조문수
소론의 글씨(4) : 조윤형, 서무수, 서명균






업데이트 2024.01.30 16:36

  

최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