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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복의 서예이야기] 추사와의 어긋난 만남

추사의 글씨는 너무나 유명하고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만큼 또 많은 사람들을 좌절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1978년, 우연히 추사 글씨 대련을 보게 됐습니다. 그 때 돈으로 2, 3백 만원 정도라 했으니 이삼 년 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꽤 가격이 있던 셈인데, 사도 괜찮은 것인지 어떤지 확신이 없어서 통문관 영감님과 그 아래쪽 고정실이라는 골동품가게에 물어봤습니다(당시 고정실에는 추사 현판을 걸어놓고 있었습니다). 다들 괜찮은 것이라 해서 큰맘 먹고 그 대련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한 1년 있다가 사정상 서울을 떠나게 되었는데 보관할 곳도 마땅치 않아 이 추사 대련을 팔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내놓으니 글씨 쓰던 어떤 양반이 사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2~3일 후 이 양반이 추사가 아니라고 안 사겠다고 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한 번 더 물어봤는데 그 사람도 추사 작품 같지 않다고 조금 이상하다고 해 매매는 물 건너가 버리고, 결국 그 작품은 가짜의 낙인이 찍혀버렸습니다. 얼마나 분하고 화가 나던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 가짜가 되어버린 추사 대련은 보관할 데도 없고 해서 조계사 맞은편 예전 덕수미술관 근처 식당에 맡겼고, 작은 식당 입구에 걸리는 신세가 됐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어서 그때부터 추사에 대해서 치열하게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장자 같은 한문과 함께 갑골문을 공부했었는데, 갑골문에 대한 지식을 쌓았던 것이 이때 추사 공부에 상당히 도움이 됐습니다. 적극적으로 추사에 매달려 이 책 저 책 찾아보고 청명 임창순 선생님, 백아 김창현 선생님 등께도 여쭤보면서 파고들었습니다. 당시 가장 많이 본 자료는 간송미술관과 지식산업사에서 출간한 추사 도록이었습다. 『추사정화』라는 옛날 책 호화본인데 좀더 얇은 단행본으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당시에는 번역 자료도 드물 때였으나 어렵게 어렵게 추사 문집도 모두 읽었고, 다른 이가 한 번역을 보다가 틀린 것도 발견하곤 했습니다. 추사 연구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개인적으로 수업료를 호되게 낸 셈입니다. 

70년대 말의 통문관 영감에게 고마운 것은 나에게 초서 공부를 반드시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 때는 초서를 배울 만한 곳도 많지 않아서 『초결백운가』 등 몇 가지 책과 여러 인물들의 간찰 같은 것을 보면서 스스로 터득한 것이 많았습니다. 많은 자료를 볼 수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빨리 늘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백아 선생을 찾아가 배운 것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5년 쯤 공부하니까 글씨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고, 10년쯤 지나니까 추사 글씨를 알 만 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10년차 정도가 가짜를 사기 딱 좋은 때라고들 합니다. 좋다 나쁘다 구별 가능하게 되니 자신감이 생기고 누구와 붙어도 괜찮다 싶다는 느낌이 드는, 그 때가 위험한 것입니다. 아무튼 20년쯤 지나니까 추사와 우봉(조희룡) 글씨가 구별이 됐습니다. 처음 추사인 줄 알고 샀던 그 대련 글씨가 우봉 글씨였던 것입니다. 추사와 우봉 글씨는 차이가 있지만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봉 조희룡 <명인사화 2폭> 130.5x25.5cm. 우봉의 전형적인 행서. 본문내용과 관계 없음.


추사 김정희와 우봉 조희룡, 두 사람의 관계와 글씨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부분이 많습니다. 우봉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지만 추사에게도, 후대에게도 크게 인정받지는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봉 자신은 어쩌면 추사보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들이 보기에 우봉의 글씨는 전체적으로 조화가 떨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예서 같은 것은 그렇지 않지만 행서나 해서의 경우 시작할 때 힘이 들어가고 너무 과하다고 할까요. 추사와 큰 차이가 그런 데에서 보입니다. 획이 너무 강하고 진한데, 뒤로 가면 점점 물러지는 느낌입니다. 소치 허련도 그런 면이 조금 있습니다. 소치와 비교한다면 소치는 거칠고 우봉은 깔끔하긴 한데, 너무 멋을 내고 자신을 드러내려 합니다. 소치는 추사를 닮으려고 묵묵히 노력한 면이 인정받았다면, 우봉은 무언가 조금 지나쳐서 문제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20대 때 추사의 글씨는 큰 특징이 없다가 청나라에 다녀와서 옹방강의 영향을 받아 그와 비슷해지고, 10년 지나면서 추사의 글씨가 완전히 새로운 경지에 이릅니다. 그 때의 추사는 웬만한 중국 글씨는 다 임모하여 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됩니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는 아들들-양자 김상무, 서자 김상우-, 동생인 김명희, 김상희 등과도 비슷한데 제주도 유배지 이후에는 크게 달라집니다. 그 이전 글씨들은 구별이 쉽지 않습니다. 


김명희의 글씨


김상희의 글씨



권돈인 <우일난정又一蘭亭> 27.0x22.6cm




추사 김정희 <서원교필결후書員嶠筆訣後>  


추사는 어떤 글씨를 쓰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만 그의 두 동생이나 권돈인은 그렇게 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재능도 있지만 노력의 차이에서 온다고 생각됩니다. 추사만큼 노력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벼루를 열 개 뚫었다고 하는데 그 정도가 다가 아닙니다. 또 똑같이 노력을 한다고 해도 제대로 배우고 맞는 방향으로 공부하고 연습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경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제대로 배우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오래 공부하고 연습해도 늘지 않습니다. 중국에 가서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났던 것, 어떻게 임모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그 방법을 알게 된 것이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고 봅니다. 송 이후의 학문의 문제를 인식하고 한나라 초기 철학을 비석 등을 통해 연구해 그 안에서 예술적인 것을 찾아낼 수 있었고, 그것을 적용한 청의 글씨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적용해 글씨를 부단히 연습했고, 그 정신을 이어받은 제자들은 확연히 글씨가 좋아졌습니다. 사람마다 가르치고 배우는 방법은 다르겠지만 요즘 사람들이 서예 배울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서양의 피카소를 보면 추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서예에서의 입체파라고 할까요. 글씨를 공간화해 차원을 달리 한 시도.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것들. 가운데에 두 글자를 쓴다든지, 한쪽에 치우쳐 쓴다든지. 조형적인 실험들은 추사의 현대적인 면으로 조명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에도 여러 시도를 한 서예가들이 있지만 추사처럼 그렇게 연구하고 시도하고 도달할 수 있었던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코끼리 상[象]자를 그림처럼 상형자로 변형한다든가, 부수와 획, 왼쪽 오른쪽을 바꾼다든가, 조금만 잘못 쓰면 어색할 수 있는 것을 완전한 조형미로 만들어냅니다. 


추사 김정희 <행서> 53.3x46.0cm, 간송문화재단


글씨를 예술로 받아들여 그림을 보듯이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평면을 공간화해 그 전체를 다 이용할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하늘의 그물이 넓고 엉성하여도 결코 새는 일이 없다(天網恢恢疎而不漏(失)’는 말이 있는데, 본뜻과는 좀 다르지만 추사 작품의 조형미에도 이 말을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빈 것은 빈 대로 완벽해 성긴 것 같은 데도 무엇 하나 더 집어넣을 게 없는. 그러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다 전서, 예서, 행서를 한 평면에 다 넣기도 하는 파격도 보여주면서 마음대로 공간을 구성합니다. 
업데이트 2024.09.25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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