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추사의 ‘판전(板殿)’ 글씨 원본을 반으로 축소해서 걸어놓고 보니, 전혀 맛이 안 났던 경험이 있습니다. 추사가 어떤 글씨를 어떤 방법으로 쓸 때는 다 이유가 있고 그 목적에 맞게 쓰는 것입니다. 커다란 추상화를 실물로 보지 않고 작게 인쇄된 것을 보면 전혀 느낌이 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추사 글씨를 작게 해 놓으면 원래의 느낌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추사가 그은 그 큰 획이 주는 느낌은 아무리 잘 본을 뜬다고 해도 살아나지 못합니다. 축소해 보니 그 감동이 확 줄어듭니다.
판전. 현판 크기 77x181cm
<판전(板殿)> 탁본
‘판전’은 봉은사에 있는 유명한 편액이죠. 1856년 영기 스님(1820~1872)이라는 분이 〈화엄경수소연의본(華嚴經隨蔬演義本)〉 80권을 직접 손으로 베껴쓰고 그것을 목판으로 찍어 인출했는데, 이 화엄경판을 안치하는 법당(판전)을 지었습니다. 1856년 9월에 추사가 봉은사에 기거하고 있었기에 영기 스님이 판전의 현판 글씨를 추사에게 부탁한 것이지요. 추사는 그해 10월에 세상을 떴습니다. 이 판전 글씨는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에 썼다고 알려집니다.
판각은 호암 스님이 했습니다. 큼지막한 두 글자로, 그 때 그런 식으로 쓰는 사람은 없었겠지요.
영천 은해사 대웅전 현판 글씨 탁본. 현판 크기 86x270cm.
'대웅전' 글씨도 작게 보니 그저 그렇게 되어버립니다. 추사가 쓴 ‘대웅전’ 글씨는 크게 두 가지 스타일이 있는데, 변칙적으로 조금씩 멋을 부린 것과 담백한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멋 부린 글씨를 많이 썼지만 갈수록 그러한 것들이 없어지고 담백한 글씨를 좋아했습니다. 은해사에는 이 대웅전 말고도 부속암자, 성보박물관 등에 ‘불광(佛光)’, ‘보화루(寶華樓)’, ‘은해사(銀海寺)’, ‘일로향각(一爐香閣)’, ‘산해숭심(山海崇深)’ 등 추사 글씨의 편액과 주련이 꽤 남아 있습니다.
<은해사> 탁본. 1847년 팔공산 은해사에 큰 불이 나서 전각이 모두 불에 탄 이후, 3년간의 불사로 다시 전각을 세우고 대웅전, 불광, 보화루 등의 현판을 추사가 썼다. 제주도에서 해배되어 서울로 돌아온 1849년 정월부터 1851년 가을 북청으로 유배가기 전까지 2년간의 서울 생활 동안 쓴 것으로 추정된다. 추사 나이 64-65세.
<부지노지장지당> 탁본. 현판 크기 27x123cm
추사 말년에 쓴 '부지노지장지당(不知老之將至堂)'이라는 현판에서 ‘부지노지장지’는 논어 술이(述而) 편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원문은 ‘발분망식(發憤忘食) 낙이망우(樂而忘憂) 부지노지장지(不知老之將至)’, 즉, 배움을 좋아해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면 밥 먹는 것도 잊고, 학문하는 즐거움으로 세상 걱정을 잊게 되며, 종국에는 늙어가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누구를 위해 써 주었는지는 모르나 행초서로 쓴 드문 현판으로 학문하는 즐거움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 것이겠지요. 갈 지(之) 같은 경우도 그렇고 한 글자 한 글자 본다면 조금 이상할 수도 있고 딱히 잘 썼나 싶기도 한데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로움 리듬 속에서 빛이 납니다.
<吉羊如意室> 탁본. 현판 크기 31x118cm
<小窓多明> 탁본. 현판 크기 39x140cm
<吉羊如意室>도 처음 글씨와 마지막 글씨 가로 획의 차이에 주목해 보세요. 이러한 시도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잘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小窓多明>을 볼 때도 추사의 독창성과 조화로움에 아, 추사를 따라갈 사람이 없구나, 하고 느껴집니다. 이러한 추사 글씨의 깊이는 그의 기본기와 지식이 워낙 탄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 추사는 중국 자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 정도는 다 외고 있었을 겁니다. 그 글씨를 흉내낸 사람들은 많지만 모든 것을 다 익힌 사람과 적당히 아는 사람은 그 결과물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사 글씨를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특히 현판을 위한 대련 글씨를 제일로 쳤습니다. 글씨를 써 달라고 요청을 하는 경우 별다른 말이 없더라도 현판 글씨, 대련을 써 주는 것이죠. 현판과 대련은 청나라에서 많이 유행했고, 표암 당대부터 아마 그 유행이 들어왔을 겁니다. 표암 글씨로 현판 대련 글씨는 없지만 박제가부터는 그런 글씨들이 나옵니다. 청나라 소금장수들이 돈을 벌어 집을 크게 지으면 뽐내기 위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당호를 짓는 것입니다. 이름은 무엇으로 짓고 누가 쓰느냐,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인 거지요. 다섯자, 일곱자 짜리도 있지만 스무 자 이상의 긴 글씨 대련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련 유행에는 추사와 자하가 가장 앞장섰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작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부탁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글을 써 주게 됩니다.
소당 윤석오(1912-1980) 선생 같은 경우 일생동안 자하 신위의 글씨인 자하체만 썼는데 그분께 글씨를 부탁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래 알았네, 대련을 써 준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작은 종이에 써 준다면 그것은 예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죠.
현판과 대련 큰 글씨를 쓰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 되면서 조선 사람들의 서예가 변화 발전한 측면이 있습니다. 작은 글씨보다 큰 글씨를 쓰는 것이 서예에 도움이 되고, 팔꿈치를 대고 쓰는 방식보다는 현완을 들고 쓰는 방식으로 글씨를 쓰도록 연습하게 되었습니다. 다들 글씨가 늘었고, 어떻게 교육하고 익혀야 하는지도 조금씩 발전한 것입니다. 글씨를 보는 시각도 달라져 예술적 개념을 더욱 많이 가지게 되고 감상하는 방식도 조금씩 달라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