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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복의 서예이야기] 이재 권돈인, 황산 김유근, 자하 신위

이재 권돈인
추사의 주변인을 살펴볼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람 중 한 사람이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 1783-1859)입니다. 김정희가 1786년생이니 세 살 차이가 나는데 집안의 당색도 같고, 학문과 글씨에서 모두 추사의 친구라 할 수 있습니다. 권돈인은 높은 자리까지 빠르게 올라 영의정까지 지냈습니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수많은 편지들이 전하고 있습니다.


권돈인 <석추(石秋)> 23.0x72.7cm, 개인


권돈인 <행서 시고(장화(張華, 232-300) 작 '여지(勵志)')> 부분, 27.3x14.0cm, 과천시


추사는 “이재가 붓을 쓰는 것은 천연적으로 그 법에 맞았으니, 이것은 평일에 헤아려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필법이 대단히 좋아서 경군비와 백석비 두 비의 체와 법이 갖추어져 있으니, 당신의 팔 밑에서 만들어진 것인가, 아니면 우연히 신(神)과 합하여 그렇게 된 것인가. 어찌 이렇게도 기이한가. 우리나라에는 이런 예체비(隷體碑)가 없었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있게 되었다”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권돈인의 글씨는 추사를 닮았으나 필력이 추사를 따라가지는 못합니다. 머리는 있는데 꼬리는 약하다고 할까, 올챙이 같은 모양새 그런 글씨입니다. 추사는 계속 바뀌면서 발전하는데 권돈인은 그다지 변화발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실록을 보면 권돈인의 발언에 대해 추사가 뒤에서 사주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철종의 조상을 종묘에 모시는 문제에 있어서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안동 김씨 파와 권돈인이 대척하여 싸우게 되는데, 같은 노론이지만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金魯敬, 1766-1837)과 권돈인은 김조순의 일파가 아니라 보다 순조, 헌종 등 왕의 편에 서는 쪽이었습니다. 안동 김씨들은 권돈인을 비판하고 추사 또한 마구 깎아내렸습니다. 

순조의 장인 김조순은 외척 세력으로 60년 가량이나 조선의 실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1809-1830, 후에 익종으로 추존)의 부인 조(趙) 씨-헌종의 어머니로 고종이 즉위하자 그의 양모로 수렴청정을 한 대왕대비 조대비-는 김조순과 반대 세력과 손을 잡습니다. 효명세자측을 도운 사람이 자하 신위와 김노경, 권돈인 등입니다. 

추사-이재-황산 세 친구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김조순의 아들 황산(黃山) 김유근(金逌根, 1785-1840)은 추사와 친구 사이이기도 했습니다.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의 경수당집에는 권돈인이 함경감사로 갈 때 김유근이 그림 두 장으로 소식을 전하고 권돈인이 그림에 시를 지어 가리개에 붙였다는 것, 그리고 권돈인이 돌아와서 이것을 자하에게 보여준 뒤 시에 화답해달라고 요청했던 내용이 나옵니다. 황산 김유근은 아버지 김조순과 같이 글씨, 그림, 시에 능했고 갈필을 사용해 담백하고 문기 있는 서화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황산은 중풍으로 쓰러져 오래 누워있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만약 좀더 오래 건강하게 살았다면 글씨가 꽤 좋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추사 제(題), 김유근 <괴석도> 127.5x31.0cm


자하 신위
추사, 이재, 황산 사이에 등장하는 자하 신위는 추사보다 한 세대 위의 사람입니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시서화 삼절로 불렸던 자하 신위의 입장에서 추사는 친한 지인의 아들이었습니다. 자하는 소론이고 추사 집안은 노론이었으니 두 사람이 스승 제자 관계가 되지는 못하였으며 자하는 추사를 자신보다 어리지만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추사가 자제군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나서 자하가 중국에 가게 되는데, 추사는 자하에게 다른 것 볼 거 없이 옹방강을 꼭 만나고 오라는 등 여러 조언을 해 주기도 합니다. 이후 자하와 추사를 중심으로 옹방강파가 형성되는데, 당시 중국에서의 평가에 비해 조선에서는 옹방강의 명성이 대단하게 됩니다.  
자하는 일생동안 동기창에서 비롯된 동글동글한 글씨를 씁니다. 한 번도 서체가 바뀐 적이 없습니다. 


자하 신위 <행서 오언시 2폭> 58.1x26.5cm, 개인

업데이트 2025.02.11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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