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두 동생들
추사의 동생 산천 김명희(金命喜, 1788-1857)와 기산 김상희(金相喜, 1794-1861)의 경우 특히 젊었을 때 글씨에서 추사와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둘 중에서는 김명희가 더 닮아 있고, 김상희의 경우는 나이 차이가 좀 있어서인지 조금 글씨가 떨어집니다. 행서보다 예서는 조금 더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두 동생의 글씨도 좋은데 형님 때문에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글씨 뿐만 아니라 학문 면에서도 그러해서 김명희와 김상희도 학문적인 면에서 깊었다고 전해지지만, 문집 등 기록이 많지 않아 전해지지 않습니다. 형제간의 우애는 좋아서 그것을 나타내 주는 서간 등 자료가 많습니다.
산천 김명희가 초의선사에게 쓴 편지, 1832년
기산 김상희가 초의선사에게 쓴 편지
추사가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 1830년, 선문대박물관
『완당척독』에 수록된 것으로, 45세인 1830년 2월 15일 동생 김상희에게 보낸 것이다. 김상희가 직무로 집을 떠나 이동하는 가운데 안부를 묻고 이서구 8촌이 장원을 했다는 등의 소식을 전하는 편지를 본가에서 써 보냈다.
잘 알려져 있듯 추사는 아버지 김노경이 삭탈관직을 당하자 명예회복을 위해, 신원을 위해 일생동안 헌신합니다. 자신도 어려운 가운데 땅도 있고 집도 있는 고향 예산에 내려가지 않고 서울 근처인 과천에 머물며 버틴 것도 아버지의 신원을 위해서였습니다. 임금이 지나갈 때 두 동생과 함께 길거리에서 징을 치고 절을 하며 탄원하는 격쟁을 여러 차례했어요. 추사 생전에는 그의 원이 이뤄지지 않고 세상을 떠난 후에야 명예가 회복되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살아 있을 때에는 의도적으로 해주지 않다가 사망 후에 기다렸다가 해준 느낌입니다. 추사가 자신만만 기고만장하는 꼴을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자존심 강한 캐릭터였던 추사는 나쁘게 보면 오만한 분위기를 풍겼던 것입니다.
추사에게는 양반 친구는 몇 안 되지만 그에 비해 당대의 재주 있는 중인들과 친하게 지냈지요. 이에는 그의 콧대를 불편해 하던 양반들이 그를 조금 멀리했던 까닭도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당시 양반들은 중인들을 우습게 알았지만 추사는 중인이든 누구든 실력이 있는 사람이면 인정을 해 주었는데, 자신이 힘들고 고달픈 인생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천재라고는 하지만 추사는 대과도 어린 나이는 아닌 때에 통과하고 벼슬도 늦은 편이었으나 아버지 덕분에 자제군관으로 청에 가서 좋은 기회를 많이 얻은 행운아였습니다. 젊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고. 양반이 아닌 사람 중에 재주 있는 사람들도 많이 만났던 것 같습니다. 추사는 그래도 대사성, 종2품까지 벼슬을 했지만 추사의 두 동생은 5,6품 현감 정도 외에는 벼슬 자리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추사는 중인들을 제자처럼 가르치고, 그들의 그림과 글씨에 대해 한점 한점 평가했던 기록(1849년 예림갑을록)이 남아 있기도 할 만큼 그들을 아끼고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던 듯합니다. 후에 세한도에서 드러나듯 역관 이상적에게는 특히 고마움을 많이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서화를 가르친 전기, 유숙, 유재소 등의 모임 이전에도 추사에게는 여러 예외적 인맥이 있었는데 양반이 아닌 사람으로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 1772~1840)은 아버지가 평안감사였던 시절 만났다고 합니다. 대구 감영(경상관찰사) 갔을 때는 경주 비석 찾는다고 뻔질나게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역관들을 만나 친분을 맺기도 했습니다. 이때 중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 당시 신분제도는 상당히 강력한 것이었는데, 그 고정관념을 깨고 뜻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일이죠.
예림갑을록, 27x33cm, 남농미술문화재단
남농 허건이 장첩한 이 첩에 누가 글씨를 썼는지는 미상(허건으로 추정). 화가에 대한 품평이 적혀 있다.
추사가 조광진에게 보낸 편지
神, 艸 등의 글자를 길게 내리긋는 독특한 서체를 구사했다. 평양의 서예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눌인 조광진과 추사는 관계가 돈독해 눌인이 추사의 집에 머물기도 했고 이 편지에서는 조광진의 아들이 김정희에게 와서 수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완당전집』 권4 에 실려 있다.
한참 후에도 조선 땅에서 신분이라는 것은 무시못할 튼튼한 담벼락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중인이 양반가를 찾아갔을 때 툇마루에 오르는 일도 허락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정도였습니다. 아버지가 관상감 주사였던 중인 집안의 육당 최남선은 양반 자제들과 함께 김윤식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양반가 아이들이 방 안에서 공부할 때 최남선은 문 밖의 마루에서 공부했다고 합니다. 최남선이 당시 권세 있는 양반 집안의 정인보, 홍명희 등이 친구로 지내 이것이 눈에 띄는 일로 회자된다는 점 자체가 세태를 방증하지요. 벽초 홍명희는 일본에 가서 황해도 서민 출신의 춘원 이광수를 사귀기도 했고 육당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박제가, 윤정현
추사는 어떤 사람을 스승으로 모신 것일까요. 그는 특별히 한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고 일찍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아마도 여기저기 배움을 찾아다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위대한 사상가로 꼽히는 율곡도, 퇴계도 특별히 스승이라고 여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조선에서는 ‘위대한 스승, 그 위에 업적을 쌓는 제자’와 같은 학맥의 이어짐을 찾기 어려운데, 큰 스승 아래 더 뛰어난 제자가 나오기 힘든 전통, 혹은 분위기가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중국 등에서는 한두 명의 뛰어난 제자를 남기도록 해 더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반면, 조선에서는 수제자를 따로 세우지 않아 결과적으로 고만고만한 여러 제자들만이 남아 있게 되는 것도 같습니다.
추사가 박제가의 제자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딱히 박제가를 스승으로 삼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박제가가 어린이 김정희의 입춘첩을 보고 칭찬했다는 일화도 있고 먼저 청에 다녀왔으니 찾아가 여쭙고 하는 관계는 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릴 때 글을 배웠다고 하는 이덕무도 그렇고, 영향을 주었을 수는 있지만 학통이랄 것이 없는 그런 경우는 스승이라고 일컫지 않습니다.
문집에 남아 있는, 박제가와 김정희가 나눈 편지를 보면, 박제가는 서얼 출신이고 왕가의 외손인 추사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겠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정조가 추사 아버지와 선물을 주고받던 사이라고 하면 조금 느낌이 올 것입니다. 영조의 딸 화순옹주가 추사의 증조할머니가 됩니다. 정조는 추사 아버지의 당숙뻘입니다.
추사는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갔을 때 지인인 관찰사 윤정현(1793-1874)에게 부서진 황초령비의 복원을 요청해 다시 비를 세우고 비각을 짓도록 했습니다. 이때 현판을 추사가 현판을 써 주었습니다. 황초령비 옮긴 내력을 적은 비석이 있는데, 비석 글씨를 쓴 사람이 윤정현으로 되어 있으나 글씨가 추사체입니다. 귀양간 사람이 쓸 수 없으니 이름을 감사 이름으로 대체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유명한 추사의 '침계(梣溪)' 글씨가 바로 침계 윤정현에게 써 준 것입니다.
황초령비 보조각
김정희 <침계> 1852년경, 42.8x122.7cm, 간송미술문화재단, 보물 1980호
(2018.4.20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