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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챌린지]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의 소반 ⸳ 조선도자명고』(1996)

조선에 지식과 사랑을 품었던 그의 기록


아사카와 다쿠미 지음/ 심우성 옮김, 『조선의 소반 ⸳ 조선도자명고』, 학고재, 1996.

 
몇 십 년 전만 해도 어렵지 않게 보던 장면들이 있다. 어린 신부가 시집갈 때 혼수 속에는 거울과 몇 개의 서랍이 달린 경대가 들어 있고, 할머니는 손주에게 문갑 속에서 아껴뒀던 사탕을 꺼내어 쥐어주시고, 부엌 찬장에는 청화로 국화가 그려진 투박한 양념단지 항아리들이 자리잡고 있고, 손님이 오시면 낮은 소반에 다과를 내어 나간다. 불과 한두 세대 만에 경대나 문갑, 백자 단지나 소반이 우리 생활에선 사라지고 박물관이나 골동품 가게에서 보는 옛 물건들이 됐다.

같은 아쉬움을 느꼈을까. 1914년 조선총독부 농공상부 산림과 산하 임업시험장에서 일하기 위해 조선 땅에 왔던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 1891~1931)는 조선의 집에 살며 조선 살림살이를 쓰다가 소박한 소반과 백자에 매혹되어 그 문화가 점차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이 분야를 깊이 연구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1929년과 1931년에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무렵 이 방면에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기록은 없다시피 했으니 그의 연구가 간접적으로 일제의 식민 정책을 돕는 일이었는지 어쨌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우리말로 번역되어 한 권으로 묶여 출간됐던 것도 1995년에서나 이뤄진 것이다. 현재로도 책 속의 기록은 성실함, 정밀함으로 놀라운데 거기다가 정성들여 만든 손때 묻은 소반과 도자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못한다는 데서 감동을 준다. 

공예품을 정의하고 종류를 나누고, 각각을 부르는 용어, 만드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어떤 것은 익숙하고 어떤 것들은 전혀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다. 그 사이사이에 아사카와 다쿠미의 공예품에 대한 생각이 명언으로 불쑥불쑥 나오기도 한다. 

“올바른 공예품은 친절한 사용자의 손에서 차츰 그 특질이 지닌 아름다움을 발휘하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사용자가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제작자의 손에서 떠나는 순간 사용과 더불어 점점 아름다움이 바래간다면-추해진다면 올바른 공예품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공예품’을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아름다운 물건들’로 대치하면 매일매일 새로운 물건을 사고 소비하고 싶도록 훈련된 자본주의 시장에 물든 우리는, 구매 직후부터 가격/가치가 급락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전에 한번 되돌이켜 생각해 볼 지점이다. 이 말은 특별히 소반을 주제로 고른 까닭에 대한 설명이었는데, 조선의 소반은 순박한 아름다움, 단정한 모습, 삶과 함께하며 세월이 흐를수록 아취를 더해가는 대표적인 물건이어서 진정한 의미의 공예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간도로 이주하는 가난하고 피곤에 찌든 농부 가족이 기차에 싣고 가는 물건 중에는 새로 만든 바가지와 함께 잘 닦은 소반이 있다.” 

100년 전의 이사 모습을 자료 사진 같은 곳에서 본 적이 있는 듯하다. 아사카와는 경성에서 이사하는 짐들 속에서 소반이 얹어져 있지 않은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고 한다. 전국 각지에서 경성으로 소반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경성에서는 각 지방의 각양각색의 소반을 볼 수 있었고 그 차이점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산간 농촌 어디나 소반을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하는 장인이 있었다. 농한기에 소반을 만드는 농부도 있었고. 잘라 말려두면 노인들이 천천히 세공해 장에 가지고 나와 잡화와 교환해나가는 식으로 느긋하게 만든 소반들이 많다. 같은 질, 같은 형태가 거의 없다.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만들었다. 사는 사람들은 선택의 즐거움이 있다. 여기에 흥미로운 부분이 또 있다.

“조선 시골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 고르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상인도 막지 않는다.”


과일, 만두, 종이까지도 자유롭게 골라서 사는 것도 이런 관습에서 온 것 같다고 말한다, 음식물이나 기물을 골라서 산다는 것 자체를 흥미로워 한다. 

지방색이 두드러지는 소반에 대한 설명이 뒤따르고, 그 생김새의 특징, 재료, 만드는 법, 연원, 용어도 자세히 썼다. 공예품을 만들어내는 장인이 착취되는 과정을 목민심서의 기록을 들어 이야기하기도 한다. 직권을 남용해 목공품을 독점 공급하는 관교들, 세도가의 횡포를 언급하고 하지만 이것은 20세기 초에 나름의 대량생산 시스템으로 조잡한 것을 마구 만들고 자본가가 이익을 얻는 방식과는 달랐다고 씁쓸해 한다. 




도자 때문에 읽기 시작한 책이지만 소반에 대해 흥미를 새롭게 느낄 정도로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다. 관리의 점심을 운반하는 용도로 많이 사용되던 소반은 아래쪽에 화두창이 뚫려 있는데 이는 식기를 놓고 보자기를 씌워 반 뒤로 묶고 상 밑바닥에 머리를 넣고 이동할 때 화두창으로 발 밑을 보면서 걷도록 한 것이다. 운반 후 그대로 식사하기 좋도록 수저를 넣는 서랍이 달린 것도 있다. (오늘날 한국의 식당 테이블 마다 있는 수저 서랍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조선도자명고』에서는 도자를 쓰임에 따라 나누고 각 기물의 이름, 부위의 명칭, 가마터, 도구의 명칭 등을 자세히 기록했다. 원래 제목은 이조도자명휘(李朝陶磁名彙). 이름을 모아놓았다는 뜻이다. 

명품들로 인해 잘 알려진 도자들, 사발 접시 대접 종자 탕기 보시기 종자(종주. 종지?) 합 찬합 툭박이 같이 지금도 쓰고 있거나 그럭저럭 알아먹을 수 있는 용어도 있지만 젖을 앓는 부인이 서낭당에 젖을 담아 올려 기원하는 젖병이라든가, 돈이나 곡식을 담아두고 신처럼 모시는 토주항아리라든가하는 재미있는 작은 물건들도 많다. 우리가 지금 플라스틱이나 합성수지 재료로 아무거나 다 만들 듯이 그때의 조선 사람들은 무엇이든 도자기로 일단 만들어 봤던 것 같다. 아사카와 다쿠미도 ‘조선 사람들의 식기는 대개는 도자기’였으며 은식기 놋쇠 목기 등은 아주 한정적이라고 쓰고 있다. 지금 식당에서 밥을 먹다보면 이런 전통은 어디로 갔는지, 스텐레스 공기밥에 플라스틱 반찬그릇으로 통일된 곳이 많다. 그나마 뚝배기에 나오는 국 찌개류가 도기(옹기)여서 그 명맥을 잘 잇고 있다.  






가마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도 다큐멘터리 찍듯 세세하게 기록했다. 가마의 종류, 시설의 이름과 역할, 공정,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등. 


“물레(윤대)는 분원산이 유명하다. 재료는 떡갈나무가 좋은 재료이며, 심봉에는 자작나무를 사용한다. 심봉과 대의 마찰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닿는 부분에 자기를 붙여 둔다. 소형 물품을 돌리는 물레는 토방 평면에 그대로 장치한다. 항아리와 같이 대형인 것을 돌리는 물레는 땅에 구덩이를 파고 물레의 윗면이 땅 평면과 거의 일치하도록 낮게 설치한다...구운 질그릇을 나란히 얹어서 운반과 건조를 하는 널을 잔판(棧板)이라 한다. 재료는 보통 적송으로 두께 1.5~1.8cm, 폭 9~12cm, 길이 182cm 정도 되는 것을 사용한다.”


조선도자명고에 대해서 야나기 무네요시는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이 저술이 10년만 늦었더라도 여기 모아져 기록된 명칭의 수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지은이는 잃어버리게 될 인간의 기억을 교묘하게 보완해주었다.” 

잊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것이 이 책을 쓴 이유 중 가장 큰 것이다. 명칭도 그렇지만 쓰임새조차도 그렇다. 요강을 안주 그릇으로 쓰고, 밥그릇이 찻잔이 되거나 양념 항아리를 엽차 그릇으로 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일본인들이 봤으면 하는 책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사카와 다쿠미의 기록 안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먼저 알아보았다거나 많이 알고 있다거나 하는 우쭐함을 발견할 수 없다.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조급하거나 부족한 것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움이다. 

외국인들이 한 나라의 문화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원래부터 그 문화 속에 있던 사람들 대신) 설명하고 옹호하고 홍보해 주는 것에 대해 스스로 지나치게 뿌듯해하는 것은 아닌지 경계는 필요할지도 모른다. 소위 국뽕에 젖어 우리가 이런 정도였어 하면서 쾌감을 느낄 것이 아니라, 반성과 함께 존중의 마음, 그 정도면 충분한 듯하다.

야나기는 “이 책을 옆에 놓고 보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는데, 그 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기준 삼았을지 궁금하다. 

1931년 4월 2일, 아사카와 다쿠미는 도선도자명고가 출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마흔 두 살의 나이에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문리의 조선인 묘지에 묻혔다가 해방 후 망우리공원에 이장됐다. 비문의 글은 다음과 같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업데이트 2023.03.06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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