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원’이라고 하면 더 익숙한 사람이 많을 테지만 본명은 강창규. 2009년 근대 공예 작품으로는 최초로 국가 등록문화재에 오른 <건칠반乾漆盤>이 그의 작품이다.
강창규(姜昌奎, 창원菖園, 1906-1977) <건칠반> 1933년. 지름 35.5cm, 높이 15.2cm, 국립중앙박물관
많은 사람들이 칠공예, 하면 나전칠기를 떠올리고 나전과 칠공예를 혼동해 쓰는 경우도 많은데, 건칠에 대해서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옻나무에서 나오는 수액을 옻칠을 사용하는 공예를 칠공예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 이를 분류할 때 칠을 바를 몸체(소지)에 따라 구분하는 방법과, 표면 장식기법에 따라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소지에 따른 구분
1) 나무 – 목심칠기
2) 점토에 삼베(모시) - 협저(칠포), 건칠
3) 기타 – 종이 : 지태(紙胎), 금속 : 금태(金胎), 도자 : 도태(陶胎)
목심에 건칠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탈활건칠, 소지에 칠을 바른 이후에 칠과 삼베부분만 남기고 원형을 떼어내는 방법을 건칠이라고 부른다. 시대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달라져 혼동이 있다.
장식기법 분류
1) 조개패를 오려 붙임 – 나전(螺鈿)
2) 금가루를 뿌림 – 시회(蒔繪)
3) 여러 색의 옻칠을 물감삼아 붓으로 그림 – 칠회(漆繪)
4) 칠 부분을 조각하거나 목심 조각 위에 칠을 바른 것 - 조칠(彫漆)
옻나무가 자생하는 동아시아에서 모두 칠공예가 발달했지만 중국에서는 조칠, 일본에서는 시회, 한국에서는 나전이 가장 발달했다. 우리나라의 건칠은 여말선초에 건칠불상이 20여 구 나왔고 제작예가 거의 없다가 근대에 강창원으로부터 다시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그 배경에는 전람회 출품이나 감상용 공예 개념의 확산이 있었던 듯하고, 화려한 나전에 비해 담백한 강창원의 건칠은 모던한 느낌을 주었던 듯하다. 조선미술전람회(선전) 공예부에서 칠공예가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했는데, 나전기법을 사용하지 않은 선전의 출품작 중 많은 부분은 일본인들의 것이고, 나머지 중 반 이상이 강창원의 건칠 작품이다. 사라졌던 건칠기법을 강창규가 일본 유학을 통해 습득해서 선전을 통해 한반도에 소개한 셈.
해당 <건칠반>은 1933년 선전 12회 특선작이다. 전통적인 형식을 벗어나 시대성을 반영한 그때로서는 참신한 작품이다. 만개한 나팔꽃을 팔각으로 표현한 고족반高足盤으로 천판 아래쪽과 옆면, 굽하단 둘레, 내부는 붉은 주칠을 해 색의 대비가 강렬하다. 천판 둘레는 짙은 밤색으로 칠하다. 굽 안쪽에 금분으로 ‘昭和八年三月廿日’(소화8년3월20일)이라는 날짜와 ’姜菖園 作‘(강창원 작)이라는 명문이 있다. 동경미술학교 졸업을 위해 제작한 작품으로 당시 유일한 건칠작품으로 우수한 학점을 받았다고 한다. 지도교수의 권유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출품, 특선한 뒤 이왕가에서 구입했다.
해당 <건칠반>은 1933년 선전 12회 특선작이다. 전통적인 형식을 벗어나 시대성을 반영한 그때로서는 참신한 작품이다. 만개한 나팔꽃을 팔각으로 표현한 고족반高足盤으로 천판 아래쪽과 옆면, 굽하단 둘레, 내부는 붉은 주칠을 해 색의 대비가 강렬하다. 천판 둘레는 짙은 밤색으로 칠하다. 굽 안쪽에 금분으로 ‘昭和八年三月廿日’(소화8년3월20일)이라는 날짜와 ’姜菖園 作‘(강창원 작)이라는 명문이 있다. 동경미술학교 졸업을 위해 제작한 작품으로 당시 유일한 건칠작품으로 우수한 학점을 받았다고 한다. 지도교수의 권유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출품, 특선한 뒤 이왕가에서 구입했다.
강창규는 경남 함안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16세 쯤 일본으로 건나갔다. 오카야마공예학교(岡山工藝學校)를 거쳐 우에노미술학교(上野美術學校:도쿄미술대학) 칠공과를 졸업했다. 선전과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제전)에 출품해 수상하며 일본 천왕 접견실 장식을 의뢰받는 등 일본과 한국에서 주목을 받았다. 술을 많이 마시고 기행을 일삼았다고 하며 한동안 작품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만년에 재기했으나 1977년 10월, 개인전 준비 중에 세상을 떠났다. 일간지 구석에 다음과 같은 부고 기사가 떴다.
건칠 공예가 강창원 씨가 25일 오전 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2세. 강 옹은 일본 동경미술학교에서 칠공예를 전공, 1935년 일본 제전(帝展)과 선전(鮮展)에서 특선으로 데뷔, 이후 제전 4회 특선, 선전 연속 8회 특선의 기록을 올렸으나 해방 후에는 거의 작품활동을 중단했다가 73년에 국전 초대작가로 재기하여 만년을 작품제작에 정진했었다.
(강창규는 일본의 관전에서는 특선한 적이 없다고 한다. 입선을 특선으로 잘못 서술한 곳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