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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국전 동양화부의 산 역사 박노수, <선소운>



'선소운(仙簫韻)'. 신선의 퉁소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멋이 가득한 제목의 그림. 남정(藍丁) 박노수(1927~2013)가 스물 여덟 젊은 나이에 그린 수묵채색 인물화다. 휘슬러의 화가의 어머니가 생각나기도 하지만, 옆모습의 여인 초상은 일제강점기부터도 많이 제작됐던, 새롭지 않은 제재였다. 다만 조금 더 다른 표현을 하고자 하는 의욕으로 한복 면의 검은색은 붓질의 흔적이 없도록 칠하고, 호분의 흰 선을 이용해 주름과 외곽선을 그려 평면성을 드러냈다. 


(참고) 제임스 맥닐 휘슬러 <어머니의 초상> 1871년, 144x162cm, 오르세미술관


<선소운>은 1955년 제 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박노수는 국전에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한 작가인데 1회부터 30회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참여했고 국무총리상, 대통령상 수상의 결과물에 추천작가,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모두 거쳐 그야말로 국전의 산 역사라 할 수 있다. 제 1회는 <청추(晴秋)>가 입선에 그쳤지만 2회에는 〈청상부淸想賦〉가 국무총리상을, 3회 때는 승무 옷을 입은 여인을 그린 <아雅>가  무감사특선이라는 상을 받았다. 그 해 미협전에서는 <수하樹下>로 국무총리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4회 국전에서 드디어〈선소운〉이 그에게 대통령상을 안긴 것이다. 


국전 2회 국무총리상 <청상부> 1953년 11월 27일 조선일보. 



미협전 국무총리상 <수하> 1954년 7월 4일 동아일보 


국전 무감사특선 <아> 1954년 11월 8일 동아일보



해방 이후 동양화단은 해결해야 할 여러 문제를 숙제처럼 떠안고 있었다. 전통회화를 서화라고 부르다가 일제강점기에 일본화와 구별하는 차원에서 사용되던 동양화라는 용어부터가 걸림돌이었다. 명칭의 모호함, 그에 따른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미술대학에 설치되던 전통회화의 학과명도 대개 동양화과가 되었고, 전시회 이름에도 ‘동양화’를 사용하곤 했으며, 1949년 치러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도 역시 동양화부로 섹션을 나눴다. 

제 1회 국전에는 학생들도 다수 출품했는데, 서울대 학생들인 박노수, 서세옥, 장운상 등이 동양화부에서 주목을 받았다. 근원 김용준이 제 1회 국전을 보고 신문에 쓴 비평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장우성 씨의 <회고>는 이번 전시회의 큰 수확이었다. 씨의 동양화적 교양과 일본화에서 배운 사실의 정신이 합쳐져 우리가 늘 꿈꾸고 있는 조선화의 길을 가장 정당하게 개척하였다. 씨는 종래의 일본화적 인상을 주기 쉬운 호분의 남용도 없고 일본화 선조의 무기력하고 억양을 잃은 선조도 없고 의문의 처리, 체구의 운염, 결구의 허실, 부채의 담아 그리고 낙점운획이 모두 그 자리를 얻었다. 
장 씨의 화풍은 벌써 그 훈도를 받고 있는 서세옥(특선), 박노수의 몇몇 신진 등에게도 영향을 던지고 있거니와 앞으로 우리나라 모필화는 반드시 이러한 길로 걸어가게 될 것이요, 이러한 길이야말로 고루한 냄새도 없어지고 일본색도 축출하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서양화를 교육받았지만 문인화와 전통 서화에 몰두하고 있던 근원 김용준은 수묵의 서예적 필묵을 살리는 것, 문인화의 사상을 담는 것, 사실주의를 적절히 결합하는 것 등의 목표를 가지고 새로운 문인화를 만드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다. 동료인 장우성, 노수현 등도 뜻을 같이했다. )

박노수는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제1회화과(동양화과) 1기 신입생(46학번)이었고, 그 때 제1회화과의 교수였던 김용준과 장우성이 그의 주된 스승이니 그들이 국전 등을 통해 제자들의 갈 길을 열어주는 데 큰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또, 김용준의 지향점이 그에게는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을 수밖에 없다. 남화, 문인화라는 키워드를 벗어나지 않고 데생력과 필묵의 기술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음은 그 시기 작품들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다. 
업데이트 2023.11.29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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