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칼럼 > 근현대

[감상] 1910년 이도영의 합작그림과 만평

이도영, 김응원 <서창청공 書窓淸供> 1910, 지본담채, 44.4x97.0cm, 간송미술관

20세기 전반기 한국화 그림을 모아 놓은 전시라면 관재 이도영(1884-1933)의 이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의 동료, 선후배들과 합작도도 많이 남겼는데 이 그림은 그와 함께 서화미술회의 교수진이었던 소호 김응원(1855~1921)과 합작해 그린 그림이다. 나이차가 많으니 스승과 제자처럼 지냈을지, 배경이 다르니 아무래도 서로 조심하는 사이였을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이들이 포함된 합작 그림이 많이 전해진다. 




화려한 장식의 화병에 흰 꽃이 핀 매화 한 가지가 꽂힌 모습을 그렸다. 불수감 한 가지가 놓여 있고 이 부분은 이도영이 그렸을 것이다. 아래쪽 화분에는 난초가 심어져 있고 그 옆에 ‘소호가 난을 그리다(小湖寫蘭)’이라는 관지를 써 이 부분은 김응원이 그렸음을 알도록 했다. ‘서재 창문의 맑은 공양’이라는 의미의 화제 아래 ‘경술년 동지 전날 우당 대인께서 맑게 보시라고 그립니다. 관재 이도영’이라고 적었다. 1910년 이도영이 만 26세였던 해다. 

이도영은 안중식, 조석진과 그 이후의 ‘동양화 세대’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 사람이지만 그 급격한 변동의 시대에 전통화풍을 답습해 현재의 세대들에게는 큰 인상을 남기기는 어려운, 그런 정도의 위상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이후 세대인 이상범, 변관식, 노수현, 이용우 등이 상대적으로 더 주목받는 것 같다. 

전해지는 이도영의 작품에서 신선함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안중식을 통해 장승업으로 곧장 이어지는 그의 화풍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안중식 조석진 문하에서 그림을 배워서, 산수, 인물, 화조, 기명절지 등 전통적인 소재가 많다. 

그의 집안을 살펴보면 문인 서화가로서의 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할아버지는 공조판서, 예조판서, 한성부윤을 지낸 성공한 양반이고, 아버지는 현감과 군수직에 머물렀으나 가까운 친척들 모두 사대부였고 서화적 기량을 갖춘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어렸을 때 그림 베껴그리기에 몰두했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어떤 까닭이었는지 14살 때 신식화폐 제작을 위해 만들어진 전환국에 들어가 견습생 과정으로 3년간 공부하고 1901년 11월 졸업하다. 이때 화가 조석진이 전환국에 근무했으니 그 영향의 가능성도 있다.

20대의 그는 단체의 출판 편집 업무를 맡으면서 잡지나 소설책 등 인쇄물에 삽화, 표지화를 그리기도 하고, 휘문의숙 같은 일반학교 도화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고, <도화임본>, <연필화임본> 같은 미술교과서를 만들기도 했다. 
오세창의 대한협회가 발간한 『대한민보』의 시사만평화를 그렸는데, 1910년 만평이 삭제 당하고 신문은 폐간된다. 위의 합작도 그림이 이 시사만화를 그리던 때와 같은 시기다. 


이도영(李道榮,1884-1933) 大韓民報 만화(1910년 6월 23일자) 국립중앙박물관 


허리에 칼을 차고 한손에는 통감부 깃발을 든 인물에게 여러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이다. "한쪽에서 울며 청하고, 한쪽에서 구걸하는 광경이 참 가관이다"라며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조석진, 안중식이 세운 서화미술회 강습소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서화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한국화를 이끄는 그룹에서 계속 일했는데, 1919년에서 1920년 사이 안중식, 강진희, 조석진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 이후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최고 원로의 자리를 지켰던 것으로 여겨진다. 신문의 서화 소개 자리에 가장 먼저 소개되는 것이 이도영이다. 
업데이트 2024.02.28 12:44

  

최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