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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을 기억하다] 정영렬의 <적멸寂滅>(1979)

글/ 고금관

작가 : 정영렬(鄭永烈, 1934~1988)
광주 출생

대한민국의 대표적 추상화가 중 한 사람인 정영렬. 그는 고교시절 미술교사였던 강용운의 영향으로 추상미술을 접하게 되면서 60년대 앵포르멜 운동과 70년대 단색조 회화의 흐름을 주도한 작가이다. 


정영렬 <적멸寂滅> 1979년, 캔버스에 유채, 112×145cm(80호)


현재 한국 미술시장 열풍의 주역인 정창섭,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등 단색화가로 분류되는 선후배 작가들에 비해 일반에게 그 이름은 다소 생소하다. 그것은 정영렬이 당시 다른 작가들에 비해 개인전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많이 알리거나 거래하려고 하기보다는 많은 단체전에 참여해 미술 흐름에 앞장서면서 활동하려했던 창작자였기 때문이며, 54세의 많지 않은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떴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라 본다. 

1999년 9월 작가의 10주기를 맞아 열렸던 광주시립미술관 유작전, 그리고 유족이 보관하던 작품 32 점의 기증으로 이뤄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을 통해 초기 추상미술, 70년대의 <적멸(寂滅)> 연작, 그리고 80년대 적멸 시리즈인 요철(凹凸) 기법 한지작업 등이 화가 정영렬의 작품 세계를 널리 알리는 기회가 됐다.

개인적으로 오래 전부터 선생의 작품을 소장하기도 했지만, 2022년 우연히 유족과 접할 계기가 있어 유족의 소장품, 수많은 아카이브 자료와 완성작들을 화실 수장고에서 볼 기회가 있었는데, 각각의 다양한 창작품을 보고 느꼈던 감동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정영렬 <작품 70-21> 1970년경, 캔버스에 유채, 80.6x99.5cm, 국립현대미술관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작품도 대표적인 <적멸> 시리즈 중 하나이다. ‘적멸’은 은 불교 용어 열반(涅槃)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그가 산사를 찾았을 때 느꼈던 적막함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동양적 모티브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정영렬의 <적멸> 연작은 1970년~1978년 사이 물결무늬 시리즈를 시작으로 하고 있다. 이 시기의 <적멸> 연작들은 크고 작은 기하학적 무늬를 일률적인 패턴으로 캔버스에 표현한다. 

이 작품 또한 화면 전체에 원을 기본으로 한 기하학적 모듈이 반복되며 짙은 황갈색과 검정색을 사용해 실제로는 평면이지만 역동적인 가상의 요철 착시 효과를 보인다. 이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보는 이로 하여금 엄숙함을 느끼도록 한다. 

이러한 <적멸> 연작은 특정한 패턴 안에서 이중적 음양의 입체감을 표현하는 복잡한 공정의 기법으로 작업 기간이 더딜 수 밖 없어 1년에 6~7점 이상의 다작을 할 수 없다. 이로 인해 1985년 이후의 <적멸> 시리즈는 캔버스가 아닌 한지 작업으로 전환한다. 한지 작업의 장점은 닥종이를 사용해 굴곡이 드러나도록 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다양한 입체감과 수채물감을 사용한 다양한 화면 연출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또 짧은 시간에 작가가 원하는 형태의 구성을 다량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정영렬 <적멸 79-11> 1979, 캔버스에 유채, 131x162.5cm, 국립현대미술관


정영렬 <적멸> 1979, 닥지에 아크릴릭, 62.5x92.5cm, 국립현대미술관



정영렬 <적멸 83-P19> 1983, 한지에 유채, 67x132cm, 국립현대미술관


작가의 작업장과 작품들, 자료를 보면서 그의 작품들 중에 비슷한 형태의 것이 드물고 하나같이 각양각색의 개성 넘치는 표현이 담겼음을 느꼈다. 상업미술이라 치부될 수 있는 여타의 단색화 화가들의 작품과는 견줄 수 없는 정영렬의 작가 정신과 완성도 높은 유작들에 대해 재조명될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비전을 갈망해 본다. 

(글/ 고금관)
업데이트 2024.05.13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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