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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을 기억하다] 이승조의 <핵 F-90-G7>, <핵 G-999>(1970)

글/ 고금관

이승조(1941-1990)
평안북도 용천 출생.

화가 이승조(1941-1990)는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해방 직후 가족과 함께 남하하여 오산중학교(현 오산고) 2학년 때 미술반 활동을 시작으로 화가로서의 꿈을 시작하게 됐다. 오산중 시절 미술반 벽에 걸린 이중섭의 그림을 보고 자극을 받아 창작 활동에 열의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959년(18세)에 국전에서 정물화 <굴비>로 입선을 하고 홍익대 미술과에서 입학하면서 김환기 등 당대 최고의 은사들로부터 회화 그리고 동양미술과 서양미술사를 배우며 화가로서 기초적인 입지를 갖추게 된다. 그러한 단단한 기초를 발판으로 당시 화가들의 등용문이었던 국전에서 수 차례의 입상을 하고 1968년과 1970년 두 차례에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함으로써 화가로서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본인이 소속하고 있던 오리진, AG 그룹 등의 단체에서도 입지를 높이는 원동력이 되었고 본인 또한 한국 화단의 중추적인 인물로 자리를 잡아 갔다.


이승조 <핵 F-90-G7> 1970년, 162×130cm (1970년 국전 문공부 장관상 수상작)


화가 이승조의 작품 명제가 된 ‘핵(核)’을 그리게 된 동기는 기차여행 중 눈을 감았을 때 망막에 스치던 빛의 강렬한 인상이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시그니처인 형상은 그 장면을 조형적으로 담아낸 것이라고 하며 (이 글을 쓰는 본인 포함)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기차를 타고 눈을 감은 채 비슷한 체험을 했다고 증언한다. 

화가로서의 최고 영예, 국전의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하게 해 준 작품 <핵 F-90-G7>을 출품하던 때는 오리진과 AG 그룹 단체전 등을 통해 핵 연작을 발표하며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이다. 핵 시리즈의 기법과 공정은 간단하지 않다. 우선 캔버스에 하얀색을 견고히 칠하고 이것이 다 마른 다음 사포질을 하고 다시금 칠을 반복하는 수고로운 작업을 6회에서 10회까지 반복해 캔버스 표면을 유리처럼 매끄럽게 한다. 그리고 넓은 평붓에 서로 다른 명도의 색을 묻혀 파이프라인의 형상이 될 때까지 절제된 색의 변화로 여러차례 채색을 반복하는 과정을 거친다. 2차원의 추상 화면에 3차원의 입체 형상을 입혀 내는, 수행과도 같은 고된 연마의 기법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핵 F-90-G7>의 전체적 이미지는 평행선과 사선이 격자처럼 겹쳐지는 마름모꼴 구도의 기하학적 추상화로, 여기서 핵의 소재인 각각의 원통형 파이프는 산업 문명을 상징하며, 중앙의 검은색 형상과 파이프의 상반된 색조는 음양의 변주로서 공간을 형성시키는 동력의 근원이 된다. 


이승조 <핵 G-999> 1970년, 캔버스에 유채, 194×112cm 2점, 192×111cm 1점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시기에 지인으로부터 또 다른 500호 크기의 대작을 소개받았는데, 그것이 나에겐 행운의 인연이 된 작품 <핵 G-999>이다. 이 작품은 120호 캔버스 세 폭에 서로 다른 색조의 유화 그림으로 구성된 하나의 조형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데 각 화면은 파랑, 노랑, 빨강, 흑과 백, 이렇게 다섯 가지 색조를 각기 다른 파이프 안에 반복하는 형상으로 표현함으로써 전체적으로 강렬한 율동미를 자아낸다. 그 시대적 상황과 분위기를 생각해 볼 때 작가가 어떻게 이러한 창작품을 그려낼 수 있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ORIGIN 회원전 자료 사진. 가운데가 이승조.


<핵 G-999>는 1970년 제4회 ORIGIN 회원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으로, 유족으로부터 건네받은 참고 자료를 보면 그룹 멤버 7인의 기념 사진 속 뒤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 작품이다. 유족들의 입장에서는 흑백 사진으로만 대했던 작품이라 이토록 아름다운 오방색의 화려하고 웅장한 작품일 줄은 몰랐다며 기뻐하셨다. 유족분들이 수 년 간을 찾아 헤매던 이승조 화가의 대표작 두 점을 개인적으로 소장했었다는 인연이라고 생각하니 나에게는 큰 행운이자 행복이었고 그분들께 돌아갈 수 있게 된 것도 또한 큰 기쁨이었다.
업데이트 2024.07.29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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