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와 그 직후 조선의 서양화 발전은 일본 유학생들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유명 관립학교는 아니지만 일본의 서양화 단체인 태평양화회(太平洋画会) 부설 양화연구소를 모체로 하여 1929년에 도쿄에 설립된 재야의 사립 미술학교로 태평양미술학교가 있었다. (태평양화회는 현재까지 태평양미술회(太平洋美術会)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구본웅, 이인성, 남관 등이 이 학교 출신이며 1940년에는 박득순, 최재덕, 손응성 등과 같은 이 학교 출신의 화가들이 서울에서 PAS동인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태평양미술학교 출신의 또 한 사람 장두건(1918~2015)은 전후 구상 계열의 대표적인 화가다. 그는 1930년대 후반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에서 4년간 미술 공부를 했으나 당시 일본의 양화계와 맞지 않았을까, 그림을 접고 법학을 공부했다.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30대 후반. 파리로 가 4년간 체류하며 화가로 다시 시작했다. 담백하고 개성적인 화풍은 그의 이력의 독특함에서 나오는 것일 수 있다.
장두건 <풍경> 1965년, 130.0x97.1cm, 삼성문화재단
구상은 옛 그림이고, 추상이라야 현대화라는 당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독자적인 길을 꾸준히 나아갔다. 1978년 구상 계열의 작가들과 <상현전>을 만들거나 구상미술을 지향하는 <이형회>를 창립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나 남긴 작품 수는 많지 않다. 90년대 작품이 50여 점으로 그나마 많은 편이다. 위의 <풍경>은 섬세한 필선과 색감의 감각적인 구상 그림이다. 그의 시그니처라 할 만한 수법들이 눈에 띄는 이 작품은 수직의 기념탑과 수평의 땅과 창문 가득한 나지막한 건물 라인이 교차하고, 대부분의 나뭇잎은 떨어뜨린 가을 활엽수의 가지가 만들어 내는 얽힌 선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국립 미술관 소장의 또다른 풍경화도 비슷한 시기의 작품인데, 쓸쓸한 계절의 길쭉길쭉한 자작나무 숲이 구상이면서도 추상적인 미감을 보여주고 있다.
장두건, 무제, 1964년, 188x169cm, 국립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