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조선에 건너온 한 일본인. 불상이나 칼 등을 수집하기도 했던 그는 고미술과 서적에 관심이 많아 조선에서 발견한 고미술품을 열심히 모아들였다.
근대적 일본미술사의 아버지 오카쿠라 덴신을 만나 그의 조언으로 조선총독부박물관 건립에 앞장서면서, 자신의 소장품 중 많은 부분을 박물관에 남겼는데,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국보 92호) <백자철화포도문호>(국보 93호), <청자철채퇴화삼엽문매병>(보물 340호), 공민왕의 <천산대렵도>,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심사정의 <설중탐매> 등이 그로 인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모셔지게 된 셈이다.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
나머지 일본으로 가져간 동아시아의 고미술은 아들이 세운 도서관에 모셔져 있다가 일본 사립대학교 도서관에 기증되었고, 한국에서 그 존재를 알게 된 1990년대에 많은 양이 한국의 한 대학교박물관에 기증되면서 한국으로 귀환해, 그의 이름을 딴 컬렉션을 가지게 된다.
전 이경윤 <송하탄기도(松下彈棋圖)> 《낙파필희》 종이에 먹, 37.0x54.0cm, 경남대학교박물관
조속 <매조도> 《홍운당첩》 마에 먹, 32x23.4cm, 경남대학교박물관
한일합방의 주역으로 우리 민족을 괴롭혔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문화유산의 지킴이 역할을 했던 이 사람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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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하는 악명높은 ‘데라우치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1906년 러일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자작 작위를 받고, 한일합방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백작 작위를 받은 사람이다. 일제에서는 육군대신으로 재직했고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위원을 맡아 일제의 동아시아 침탈에 앞장섰다.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1910년 5월 30일 한국통감을 발령받은 다음 한일합병 조약문을 가지고 7월 23일에 조선 땅에 왔다. 8월 22일 이완용을 내세워 순종에게 형식상 어전회의를 하도록 한 다음 총독 관저에서 이완용과 협약을 마친 후 옥새를 빼앗아 일주일 후 29일 한일병합을 공식 발표했다. 곧 초대 조선 총독을 겸임하면서 조선인들을 무력으로 억누른 인물이다. 두말하면 입 아프지만 조선인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단체를 해산시키고, 애국가를 불온 금지곡으로 만들고, 농토를 빼앗아 총독부 사유로 지정했으며, 동양척식회사와 친일파들에게 이익을 넘기는 데 최선을 다한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그는 고서화에 관심이 많고 취미로 칼과 불상 수집을 즐겼다고 한다. 『황성신문』 1910년 8월 기사에는 “사내(데라우치) 총독은 시국의 대강을 이미 해결함으로 심중에 한가함이 생기면 혹 남산구락에 출왕소요도 하고 혹 골동상 등을 소집하여 우리나라 고미술품을 수집 완상한다더라” 같은 동정이 실리기도 했다.
한반도에서 불상과 석탑의 유출을 막는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이기도 했는데, 조선도 일본 땅이라 생각해 무단 반출이 일본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총독부박물관의 유물을 채우는 데도 열심이었다. 1916년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조선을 떠나며 자신의 수장품 중 약 689건 858점을 박물관에 기증했다. 조선총독부박물관 최초 진열품 대부분은 그의 사위 고다마 히데오의 명의로 기증한 것. 뇌물이거나 상납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에 비하면 일본으로 가져간 조선의 서화 유물은 소소한 편이었다. 1922년 그는 데라우치가의 장서와 자신의 수집품으로 야마구치현에 사립 도서관인 오호데라우치문고(櫻圃寺內文庫)을 개관했다. 1922년의 문고 소장 목록에는 조선본 46종 432책 조선고간법첩류 150종 191책이 포함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재정이 어려워지고 뒤를 이은 아들도 죽게 되자 데라우치가는 1957년 야마구치 현립대학에기부채납 형식 유물과 자료, 비품 일체를 이관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우리나라에 데라우치문고의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다가, 1995년. 당시 야마구치여자대학 내 데라우치문고에 우리 문화재가 다량 소장되어 있다는 정보를 얻고 반환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경남대가 야마구치여자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어 학술교류 차원에서 추진할 수 있었다. 여러 난관을 거쳐 일부를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이끌어내고, 원 소유자 데라우치가로부터도 동의를 받았다. 1995년 11월 11일 광복 50주년을 넘기지 않은 때, 당시 문화재위원장이던 청명 임창순 선생 등이 참여한 가운데 기증 조인식이 열렸다.
유물 선정작업을 통해 98종 135책 1축. 1995점이 반환됐다. 한국 언론에 ‘강탈 문화재’라는 표현 때문에 일본 측의 거부감으로 수포로 돌아갈 뻔 했다. 일본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수집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명현간독』에 이 책을 80원에 구입했음을 알려주는 쪽지가 들어있기도 했다.
여튼 1996년 한국 측에서 고른 유물이 한국으로 들어오고, 일본에 남은 데라우치문고 소장 한국 회화는 야마구치현립대학 부속도서관, 야마구치현립야마구치도서관, 야마구치현에 있는 보쵸쇼부칸(防長尙武館) 등으로 흩어져 남아 있다.
데라우치 문고는 양이 어마어마하고, 밝혀진 것만 1만 8천여 권 정도인데, 데라우치의 수집 서적 중에는 퇴계문집, 고려사, 여사제강,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 다양한 고서적과 희귀본 등이 있다.
경남대학교박물관의 이 소장품들은 현재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509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