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 <파리의 곡예사> 1957, 캔버스에 유채, 129.6×162cm
큐비즘을 자신의 탐구 영역에 적극적으로 올려놓은 화가 박영선(朴泳善, 1910-1994). 형태면에서 입체주의적 면 분할과 다시점, 색채, 제재면에서 서커스, 곡예사 등 입체주의, 특히 피카소 작품의 영향을 숨기려는 의도 하나 없이 드러내었다. 이탈리아 미래주의의 영향도 보인다.
문화는 수압과 같은 것이어서, 큰 데서 작은 데로 강한 곳에서 약한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 당연할 터이지만, 한국에서 큐비즘이 수용되는 모습에 있어서는 중국의 유명 화가를 ‘방’하는 전통이 남아있는 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박영선은 도쿄의 가와바타화학교 출신으로 서구의 모더니즘을 일본에서 대하고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세잔에게 경도되었고, 프랑스 파리의 체류 이후 세잔의 후기인상주의와 사실주의, 입체주의 등을 탐구한 작품들을 남겼다.
재현의 문제에 있어서 한 차원을 넘어서고자 노력했던 현대의 화가들 중 일부는 형태를 해체하고 종합하는 과정으로 나아간 것이 자연스런 인과로 이해될 만하다. 이들을 모두 큐비즘의 영향 하에 둘 수는 없고, 다만 모더니즘의 맥락에 대한 이해도 본질적인 방향성도 같지 않은, 표면적인 흔적은 아니었는지 짚고는 넘어가야 한다. 박영선은 서구 모더니즘을 다각도로 연구한 작품들을 남겼고, 입체주의가 완전한 추상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가진 것과 달리 세잔과 사실주의의 방향으로 회귀했다. 그것도 흥미롭다.
박영선 <농부의 가족> 1947, 캔버스에 유채, 98×160㎝,
박영선<남산에서> 1943, 캔버스에 유채,65×90㎝,
박영선은 1940년대에 징병제 실시를 찬양하고 홍보하는 적극적 친일을 했는데 또 해방 후에는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한 바가 있어 흥미롭다. 1949년 초대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도맡아 하고 전쟁 후 홍대 교수를 하다가 3년간 파리로 가 그랑드쇼미에르에서 공부했다. 1976년 일찌감치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된다.
20여 년 전인 2005년 덕수궁에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한국, 일본, 싱가포르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큐비즘 수용의 역사 및 사례를 조망하는 《아시아큐비즘》이라는 전시가 열렸다. 이때 도록의 서문에는 아시아의 큐비즘은 “단적으로 말해서 ‘큐비즘’이 아니라 ‘큐비즘 같은 것’”이라고 단정했다. 일본은 1910년대에, 나머지 국가들은 20세기 중반에 이 '큐비즘 같은 것'이 등장하는데(중국은 1980년대에), 서구 모더니즘의 입체주의의 정신 쪽이 아니라 형식과 외면을 주로 받아들인 것을 '적극적 수용' 같은 것으로 포장하기는 조금 어려워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