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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이야기] 갈라진 얼음장을 그린 그림들

이 대단한 날씨, 언제까지 계속되려나. 푹푹 찐다는 말 그대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계절은 돌고 도는 게 이치. 이 여름도 곧 가고 가을이 올 터. 요즘 날씨는 기상이변이니 엘니뇨니 하는 것 때문에 이상해졌다지만 모르긴 몰라도 예전에도 예전 나름으로 ‘유난하다’는 말이 있었을 거다. 그 옛날, 틀기만 하면 바람이 나오는 선풍기가 있었나 에어컨이 있었나. 있는 건 오로지 부채뿐이지 않았나. 산에 올라가 허리춤을 풀어 제치는 거풍(擧風)이라는 더위 피하는 법은 그래서 고안된 것인지 모르는데 한층 더 고상한 것도 있다. 더위 자체를 잊고 다른 것에 몰두하는 것. 일종의 정신승리식 피서법이랄 게 있다. 절로 땀이 나는 한여름에 삭풍 몰아치는 겨울 그림, 그것도 눈이 수북이 쌓인 설경 그림이면 더욱 좋은데, 뭐 그런 그림을 걸어 두고 보면서 그림 속에 빠져드는 피서법이다. 


18세기의 이름난 산수화가 심사정(沈師正 1707-1769) 그림에 그런 게 있다. 환갑 나이에 그린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로 여기에는 눈 속을 헤치고 매화꽃을 찾아가는 운치 있는 고사가 그려져 있다. 그린 때는 음력 6월(그림 위쪽에 병술초하(丙戌初夏)라 적혀있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대충 7월이다. 이번 여름 7월이 얼마나 더웠는지를 떠 올리면 이 그림의 용도(?)는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명 중기에 문인화 부흥을 이끈 문인 화가의 한 사람인 문징명(文徵明 1470-1559) 그림에도 엄청난 설경 그림이 있다.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에 있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관산적설도(關山積雪圖)>다. 이는 처음부터 정신승리식 피서용으로 그린 것은 아니지만 만일 그렇게 사용했다면 효용 면에서는 단연 최고 자리를 차지할 법한 그림이다. 


문징명明文徵 <관산적설도關山積雪圖>권(부분), 명, 25.3x445.2cm, 타이페이 고궁박물원


심사정 그림은 그저 큼직한 한 폭으로 벽에 걸어놓고 감상하는 그림이지만 이쪽은 길이가 4.45 미터에 이르는 두루마리 대작이다. 두루마리 그림은 무릎에 올려놓고 한편으로 펼치면서 한편으로는 감으면서 보는 게 정상이다. 설경의 대작을 펼쳐서 보고 감고 또 펼쳐서 보고 있노라면 웬만한 더위는 절로 저리 갈 것이다.


이것으로도 충분한데 이 그림에는 흐르는 땀도 멎을 만한 장면이 하나 들어있다. 삼분의 이쯤 되는 곳에 말을 탄 사람들 일행이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장면이다. 이들 몇 발자국 앞에는 얼음이 쩍쩍 갈라져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설마 얼음 갈라지는 것을 그렸을라고, 하겠지만 강 한복판에 그려진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얼음장이 갈라진 빙렬(氷裂)처럼 보인다. 혹자는 풀 같은 것이 아니겠냐고도 하겠지만 위치로 보면 강기슭도 아닌 이상 얼어붙은 갈대가 그곳에 있을 리 없다.

마루야마 오쿄, <빙도(氷圖)>병풍


빙렬설로 보면 그를 보충해줄 만한 그림이 있기도 하다. 대영박물관에 있는 일본화가 마루야마 오쿄(円山応挙, 1733-1795)의 <빙도(氷圖)> 병풍이다. 오쿄는 18세기 교토에서 활동한 인기 화가의 한 사람으로 동양화에 생소한 '철저 사생'이라는 화풍을 구사해 일가를 이룬 화가다. 이 병풍은 우리식으로 치면 머리병풍에 해당하는데 얼어붙은 연못만을 화면 가득히 그린 정말 특별나게 이색적인 그림이다. 제아무리 사생파라고 해도 얼어붙은 연못만을 관찰해 그렸다고는 쉽사리 상상이 되지 않으나 그림에는 얼음판만 보일 뿐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그 얼음장은 찡 소리가 들릴 듯이 갈라져 있다. 
이런 그림을 앞에 놓고 보면 구차한 정신승리용이 아니라 그냥 납량 스릴러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덧붙이면 빙렬 테마는 중국에서는 옛부터 길상문으로 쓰이면서 도자기에 주로 많이 그려 넣었다고 한다.     




업데이트 2023.08.0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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