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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길거리 거지를 유심히 관찰하다 – <유민도>

남기고 싶은 모습, 우러러볼 만한 모습의 인간을 그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추하고 보기에 불편한 사람들의 모습을 골라 그림으로 남기게 되는 것은 어떤 동력일까. 
백성들의 처참하고 헐벗은 모습을 그리는 중국의 유민도 전통은 송나라 때 시작해 명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려졌다. 조선에도 유민도가 있다고 하지만 명청대에 비하면 그 수가 적다. 

유민(流民). 흘러다니는 사람들. 기근이나 전쟁 등의 이유로 농토를 떠나 도시 빈민, 유랑민이 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유민도는 북송 때 정협(鄭俠, 1041~1119)이라는 사람이 극심한 기근에 떠도는 백성들의 처참한 모습을 그려 황제에게 올린 것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황제였던 신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신법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었는데, 유민도를 대한 이후 신법을 철회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민도는 백성들의 참상을 통치자에게 알린다는 의미를 띄게 된다.

명나라 말인 1594년 양동명(揚東明, 1548-1624)이라는 사람도 정의감이 남달랐던 것 같다. 황하가 범람해 큰 수해로 재난 상황이 이어지자 목숨을 걸고 황제에게 '기민도설(飢民圖說)' 14폭을 올렸다. 양동명의 유민도 <기민도설> 열 네 폭은 현재 판화로 전해지는데, 각각의 장면이 그 끔찍했던 상황을 전해준다. 각 제목은 ‘사람이 초목을 먹다’, ‘온 가족이 목매어 죽다’, ‘인육을 잘라 먹다’, ‘온 길에 굶어 죽은 사람이 가득하다’, ‘두 살배기 딸을 죽이다’, ‘아들은 거지가 되고 어머니는 물에 빠지다’, ‘아들을 버리고 달아나 살 길을 찾다’ 등이다. 끔찍한 참상을 알지 못했던 황제를 일깨우는 그림이었다.


양동명 <온 가족이 목매어 죽다(全家縊死)> 《飢民圖說》 1594, 목판화, 20.2×27.5cm, 首都圖書館


비슷한 시기의 사람들이 사는 곳을 그린 그림인데 <태평성시도>는 물자가 넘쳐나고 부유한 모습인 반면. <유민도>는 시체가 곳곳에 널리고 아들과 딸마저 외면하면서 연명하기 급급한 비참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는 이야기다. 갖가지 재해, 환관 등 조정을 농락하는 세력들로 인해 민생이 참상에 이르렀을 때 그것을 표현한 그림으로 시각적 충격을 준 것이다. 유민도는 통치자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구휼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판매하는 것으로 변화하기도 했다 한다. 

명나라 주신(周臣, 1460-1535)의 <유민도>는 정협이나 양동명의 의도나 표현과는 조금 다르다. 백성들의 참상을 드러내는 상황을 주제로한다기보다는 한 명 한 명의 헐벗고 추한 사람들을 초상화를 그리듯 기다란 폭에 정성스레 그려넣은 것이다. 


주신 <유민도(流民圖)>(부분) 1516년, 두루마리, 종이에 수묵담채, 31.9x244.5cm, 클리블랜드미술관

 
주신은 쑤저우 출신으로, 이 유민도에는 쑤저우의 시장과 거리를 가득 메웠던 가난한 사람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당시 쑤저우는 부유했지만 그 부는 몇몇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했다. 원래 작품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서 클리블랜드 미술관에 열두 명이 그려진 폭이, 호놀룰루미술관에 있는 또다른 유민도에 열두 명의 그림이 있다. 명대에 그려진 그림이 청대 중기에 두루마리로 제작됐다가 청대 말기에 두 권으로 분책되었다고 한다. 한 폭에 한 인물 씩 그려진 두 도상이 서로 쌍인 것처럼 마주보고 있다.

주신은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두루마리 그림의 왼쪽에 화가가 쓴 마흔 다섯 글자의 기록이 붙어 있다.

  

正德丙子秋七月, 閒窗無事, 偶記素見市道丐者種種態度. 乘筆硯之便, 率爾圖寫. 雖無足觀, 亦可以助警勵世俗云. 東邨周臣記. [인장] 東邨; 舜卿; 鵝場散人
정덕(1516년) 병자년 가을 7월에 한가하여 일이 없었는데, 우연히 평소 저잣거리 거지들의 일상 태도를 본 것이 생각나서 붓과 벼루가 있기에 갑자기 그림으로 그렸다. 비록 볼 만하지는 않지만, 또한 이로써 세상의 풍속을 일깨우고 권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동촌(호) 주신이 기록하다.



명나라 때 소설 『유세명언(喩世明言)』에는 거지에 대해 “구멍뚫린 모자, 누더기 옷, 다 해진 거적때기 상의에 닳아빠진 이불잇 같은 바지, 대막대기 지팡이에 이 빠진 동냥 그릇” 등의 표현을 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 저잣거리 거지의 스탠다드는 등에 해진 짚자리와 담요를 메고, 대나무 막대기와 깨진 밥그릇을 각각 손에 들고, 다 해진 누더기 옷을 대충 입어 노출된 면이 많은. 대체로 옷을 제대로 갖춰입지 않은 상태라 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주신의 표현이 어느 정도 사실적인지 짐작할 만 하다. 효과적인 구걸을 위해 당시에도 성대모사 급의 재주가 필요했던 듯, 『유세명언』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도 들어 있다. 

“뱀 흉내, 개 흉내, 원숭이 흉내, 입으로 온갖 흉내도 잘 내네. 딱딱이를 두드리며 각설이 타령 들어간다...” “기와를 깨트려 얼굴에 처발랐나, 못생기기는 어째 그리 못생겼나” 


주신의 <유민도>에서도 춤을 추거나 분장하고 있는 사람을 볼 수 있고, 보다 전문적인 기술, 즉 원숭이, 뱀, 다람쥐같은 동물을 데리고 재주를 부리는 사람도 보인다. 

그림의 사람들에게서 당시 사람들을 괴롭히던 질병의 흔적 또한 볼 수 있다. 다람쥐 부리는 사람의 입술은 명확하게 구순구개열(언청이) 증상을 볼 수 있고, 어린아이를 안고 양을 끄는 여인은 몹시 몸이 안 좋은 것이 분명하게 그려졌다. 그녀의 목에는 혹이 있어 늘어졌고 눈은 보이지 않는 듯하며, 한쪽 다리는 어딘가 다쳤는지 퉁퉁 부어올랐다. 이 여성은 일단 갑상샘 종양이 의심된다. 갑상선 질환은 여성에게서 발병률이 높아서인지 옛 이야기에 목 아래 혹이 자라는 여성을 조롱하는 내용이 종종 나온다고 한다. 나이가 많은 여자이므로, 안고 있는 아이는 자신이 낳은 것이라기보다는 효과적 구걸을 위한 수단으로 애를 데리고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배가 나온 한 남자는 성인병은 있을지 몰라도 지팡이가 꼭 필요해 보이지 않는데, 이 또한 장애인을 가장해 구걸을 하려는 사람일 것이다. 




동정심을 유발하게 하기 위해 신체 장애나 질병,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중국이나 한국이나 다름 없는 것 같다. 불쌍하지만 교활하거나 비루하기도 한, 멍하기도 한 개성적인 얼굴과 몸짓으로 캐릭터가 하나하나 살아난다. 주신이 유민도를 그린 의도는 적어도 백성의 삶의 참상을 황제께 직접 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주신보다 조금 앞서서 명대 화가 오위(吳偉, 1459~1508년)의 <유민도>는 배경까지 포함한 생생한 장면으로 떠돌이 거지 무리의 삶을 보여준다. 


오위 <유민도> 두루마리 (부분), 종이에 담채, 38.5×546.5cm, 영국박물관 


최근 연구에 따르면 오위와 주신의 <유민도>에 ‘유민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라고 한다. 즉 전통적 의미에서의 유민도와 거리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사람들의 시각의 변화와 회화에서의 발전, 전개에서 필연적으로 나온 풍속의 그림이라고 봐야 할 것같다. 

현재 한국에 남아 전해지는 유민도는 없다. 다만 연산군, 선조, 숙종 대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연산군 8년(1502년) 진사 이난손이 백성들이 가난 때문에 전곡을 차대하고 굶주림과 추위를 한탄하며 원망하는 모습과 관리들이 백성들에 대해 가렴주구하는 모습들을 그림으로 그려 올렸고 이 그림을 <안민도(安民圖)>라고 불렀다. 이난손은 『서경』에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다’는 구절을 인용하고, 구절의 실천을 위해 정협의 유민도처럼 유민도를 왕에게 올려서 백성들의 목숨을 보전코자 했다고 말했다.
- 임금(선조)이 화공에게 <유민도>를 베껴 그려서 10폭 병풍으로 만들 것을 명령했고, 이후백에게 폭마다 시를 지어 올리라고 했다.
- 선조 26년(1593년) 유민도를 그려 올린 사람이 있었는데, 이 그림에 죽은 어미의 젖을 물고 있는 아이, 자식을 버려 나무 뿌리에 묶어 놓은 어미, 마른 해골을 씹어먹는 자, 심지어 남의 하인이 되기를 구걸하는 사족을 그려 당시의 처참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병풍 제작에 그쳤다).
- 숙종 14년(1688년)에 고성의 진사인 신무가 왕에게 상소를 올리면서, 『보민편(保民篇)』이라는 책자와 함께 <보민도(保民圖)>를 그려 올렸다. 이때 신무는 정협이 유민도를 올리는 고사를 본받아 유민도를 바친다고 밝혔다.(신무는 변화나 정책으로 이어지지 않는 결과를 보고 왕이 내리고자 하는 보상조차 사양했다.)
- 숙종 32년(1706년) 관동 지역에 크게 기근이 들어 왕명으로 파견된 감진어사 오명준이 진휼을 감독하고 돌아오면서 곡식을 운반해 진휼하는 모습, 굶주린 백성이 엎드려 엉금엉금 기면서 진휼하는 장소로 나아가는 참혹한 모습, 사나운 관리가 田稅를 독촉하는 모습 등을 그린 <진민도(賑民圖)>를 바쳤다. 

임금에게 목숨을 걸고 바친 그림이니 대충 그렸을 리는 없는데, 이 그림들이 전해지지 않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 중국 고대 회화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 성과들을 조금 더 개인적인 시각으로 풀어낸 책 『고화신품록』(황샤오펑 저, 아트북스, 2023)에는 주신의 <유민도> 외에 30여 건의 수수께끼같은 중국 고대의 그림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업데이트 2025.03.10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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