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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이야기] 술집 깃발 – 주기(酒旗)

북송 휘종은 문예 군주로 유명하다. 글씨, 그림에 조예가 깊어 양쪽 모두 일가를 이뤘다는 말을 들을 정도다. 
글씨는 왕희지의 동글 부드러운 서체가 아니라 호리호리하고 길죽하면서 어딘가 뒤쪽으로 당겨지는 듯한 느낌의 수금체(瘦金體)를 창안했다. 그림 솜씨도 남달라 스스로 역사에 남는 명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왕희맹이란 18살 소년을 가르쳐 반년 만에 12미터나 되는 <천리강산도>라는 대작을 그리게 했다.(이 그림은 북송 시대 도달한 채색 그림의 최고 정점으로 손꼽힌다)

이런 실력의 소유자라서였는지 몰라도 그는 그림 못 그리는 화원을 그냥 보지 못하고 볶았는데 수시로 시험 문제를 내 실력향상을 채근했다. 화원에게 냈던 문제는 옆에서 보고 있던 신하가 정리해 놓은 것이 있어 지금도 전한다. ‘죽쇄교변매주가(竹鎖橋邊賣酒家)’도 그중 하나다. 이는 황실출신 시인 조령치(趙令畤 1061- 1134)의 시에 나오는 구절로 뜻은 ‘대나무 숲에 감 싸인 다리 곁 술집’ 정도이다. 황제의 문제는 시귀에 어울릴 듯한 그림을 그리라는 것이다. 여러 화원이 계곡을 그리거나 술집에서 술 마시는 사람 등을 그려 바쳤으나 휘종은 모두 ‘부쓰(不是)’라고 했다. 당시 이당만이 합격점을 받았는데 그의 그림은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집 하나를 그리고 그 위로 주렴(酒帘)이 길게 뻗어 있는 것을 그렸을 뿐이다. 

서론이 길어졌는데 어쨌든 북송 말에는 긴 장대 위에 깃발을 매단 주렴이 술 파는 집의 간판 구실을 한 것은 사실이다. 
술과 문학이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술과 그림도 찰떡이어서 그림에도 술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술을 파는 집의 간판 얘기가 되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조선시대 그림을 보면 짐을 든 사동(使童)을 하나 거느리고 삽다리를 건너는 고사(高士)를 그린 그림은 매우 흔하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그냥 물가 누각이거나 기껏해야 바자울이 쳐진 친구 집 정도다. 술집이 등장하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조선 중기의 화가라고 할 수 있는 이흥효(李興孝 1537-1593)가 그린 그림 속에 주렴이 보인다. 그는 중종 때 노비 신분에서 해방돼 화원이 된 이상좌의 아들이다. 그가 그린 산수화 화첩의 한 폭은 어촌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림 속에 보이는 집에는 긴 장대와 그 끝에서 펄럭이는 깃발이 있어 하루 일을 마친 어부들이 몰려가 한 잔 술을 걸치는 주점임을 말해주고 있다.  

장대에 매달린 깃발로 술집을 나타내는 것은 북송 때 처음 시작된 일은 아니다. 당나라 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당의 시인으로 술 좋아하고 여인 좋아했던 두목(杜牧 803-852)은  「강남춘(江南春)」에서 ‘꾀꼬리 울음 천리 멀리 이어지고 붉은 꽃 푸른 강에 비추는데 강마을 산동네마다 술집 깃발 펄럭이네(千里鶯啼緑映紅 水村山郭酒旗風)’라고 읊은 적이 있는데 이를 보면 이때 이미 술집 깃발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북송 때에는 주렴만이 술집을 표시한 것은 아닌 듯하다. 장택단(張擇端1085-1145)이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에는 좀 색다른 술집 표시가 보인다. 이 그림은 청명절을 맞은수도 변경(汴京)의 번화한 모습을 꼼꼼한 필치로 그린 것으로 지금도 중국화 최고의 풍속화로 손꼽히는 그림이다. 풍속을 그린 만큼 당연히 술집도 있다. 그중 하나가 이 그림의 하이라이트 부분인 큰 다리의 끝부분에 보이는 술집이다. 이 집은 나무를 얽어맨 누각 같은 구조물을 이고 있는데 뒤쪽으로 연결된 이층 방에 술 마시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면 술집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구조물은 채루환문(綵樓歡門)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술꾼들의 눈길을 끄는 장치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으로 치면 그냥 술집이 아니라 네온사인이 번쩍번쩍하도록 장식을 한 술집이 된다. 그런데 이 술집은 본점이 아니라 지점이다. 앞쪽에 보이는 ‘각점(脚店)’이라고 쓴 등롱은 그를 말해준다. 지점이니 당연히 본점이 있어야 하는데 두루마리 뒤쪽 편에 ‘정점(正店)’이라는 등이 내걸린 집이 있다. 지점까지 낸 이 유명 술집인 만큼 이름이 없을 수 없는데 상호명은 ‘천지미양(天之美樣)’이다. 들어가는 입구에 ‘천지’하고 ‘미양’이라고 쓴 막이 내걸려 있다. 


나무를 얽어맨 장식 구조물이 술집 간판 역할을 했다는 말은 흥미롭기 그지없는데 일본 그림에도 설마라고 할 정도의 것으로 술집 간판 역할을 한 것이 있다. 무로마치시대(1336-1573) 후기 들어 수도 교토(京都) 시가지 모습을 파노라믹한 시선으로 그린 「낙중낙외도」가 많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들 그림은 당시 지배 권력의 상호 관계를 암시하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도 해석된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대도시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과 사람 사는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어 그 자체가 한 폭의 대형 풍속화 역할을 하는 그림이다.

전해지는 「낙중낙외도」 병풍 가운데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이 소장한 두 틀 중 두 번째 것은 역박을본이라고 부른다. 역박을본에 이른바 이상한 것(?)으로 술집임을 알리는 이른바 술집 간판이 나온다. 역박을본 우측틀의 세 번째 폭에는 삼나무 가지를 묶어 처마 끝에 내건 술집이 두 군데나 나온다. 이렇게 삼나무 가지를 묶어 술집을 나타낸 것을 주추(酒箒)라고 한다. 





첫 번째 집에는 처마 위의 주추와 함께 항아리에 국자 같은 것을 가로지른 그림을 그린 막이 내걸려 있다. 이는 초(酢) 항아리를 그린 것으로 당시는 술이 쉽게 쉬어 술집이라면 으레 식초도 함께 팔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집도 파란 나뭇가지의 주추가 보이는데 지붕 위의 나뭇가지에 반쯤 가려있다. 이 집은 집안을 보이도록 그렸는데 초록으로 칠한 집안에는 횟대가 보이고 붉은 천 같은 것이 걸쳐져 있다. 이는 천이 아니고 전당 잡힌 옷으로 무로마치 시대에는 주로 옷을 전당 잡혔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전당포업은 수입이 쏠쏠해 이렇게 모은 자본으로 술집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또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주추는 달리 주림(酒林)이라고도 하나 삼나무 가지를 잎과 함께 묶어서 내거는 데에는 차이가 없다. 그림 속 술집 간판을 찾아 얘기가 장황해졌는데 마지막으로 요즘 술꾼들에게 들은 얘기를 전하자면 간판이 있건 없건 간판 때문에 술집을 못 찾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업데이트 2023.05.17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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