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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Zoom In] 경술국치 10년 후 그려진 봉황도

1910년 8월 29일, 창덕궁 대조전 부속 건물인 흥복헌에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고 우리의 주권은 일본에게 넘어갔다. 경술국치가 결정된 비극의 현장 대조전은 원래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1917년 창덕궁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고 그 자리에 경복궁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대조전을 지은 것이 현재까지 전해 내려온다. 

1920년 대조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전각 내부를 벽화로 장식하기로 하고 서화미술회에 의뢰가 들어갔다. 동쪽과 서쪽 벽에 화조화인 봉황도와 백학도를 그려 붙이기로 한다. 우여곡절 끝에 동쪽의 <봉황도>는 왕실이 후원하던 미술기관 서화미술회의 제1회 동기생 오일영(吳一英, 1890~1960, 당시 31세)과 이용우(李用雨, 1904~1952, 당시 17세)의 합작으로 그리게 됐고, 서쪽 벽의 <백학도>는 김은호(金殷鎬, 1892~1979, 당시 29세)가 십장생을 표현해 그렸다. 모두 안중식 문하의 신진화가들이었다. 
희정당에는 김규진의 <총석정절경도>와 <금강산만물초승도>, 경훈각에는 노수현의 <조일선관도>, 이상범의 <삼선관파도>가 장식됐다. 대한제국황실에서 벽화제작비로 당시 몇 채 집 값에 해당하는 3,000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그림값을 주었다고 하며, 분배 과정에서도 시끄러웠던 모양이다.


오일영, 이용우 <봉황도> 부분, 1920년 8월~9월, 비단에 채색, 197x579cm, 국립고궁박물관



<봉황도> 전체


오일영과 이용우의 합작 <봉황도>는 서쪽의 <백학도>와 마주보며 조화로운 공간을 창조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경물의 구성과 채색의 기술 등에서 고른 수준을 보여주며 당시 그들이 장식적인 진채의 기법과 구성에서 젊은 나이임에도 최고로 평가받기에 부끄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군왕의 덕치를 상징하는 상상의 새 봉황은 『산해경山海經』 속에서 “태양을 마주하는 골짜기에서 태어나”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 이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면서 주위에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 화려한 나리꽃, 청록화풍으로 과감하게 표현한 바위 등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정재(靜齋) 오일영은 오세창의 조카로, 서화미술회 1기생으로서 조석진과 안중식에게 배우면서 안중식의 스타일을 많이 따라갔다. 동기들이나 당대 화가들이 새로운 화법과 형식을 탐구해 탈출구를 모색한 반면, 그는 평생 ‘전통’ 서화만을 고집했고 특히 치밀하고 장식적인 화풍을 많이 그려 격이 있다는 평가를 듣지 못했다. 

그가 그 다음해인 1921년에 그린 오동봉황도 한 점이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 입수됐다. 무너진 황실에게도 자존심은 있고, 그것을 지키는 것에 최선을 다했던 화가의 꿈인 듯, 꼿꼿하게 군림하는 군왕-봉황의 모습을 화제로 적어 넣었다. 


오일영 <오동봉황도> 부분, 1921년, 비단에 먹, 채색, 193.8x77.8cm, 국립중앙박물관


 


<오동봉황도> 전체


棲跡依丹穴 尊爲百鳥王 九苞昭聖瑞 五色備文章 
屢向春臺側 頻過洛水陽 鳴岐今日見 阿閣佇來翔

辛酉 仲春 靜齋 吳—英

단혈에 깃들며, 존귀하게 뭇 새의 왕이 되었네. 구포는 상서로움을 밝히고, 오색은 문장을 갖추었네. 자주 춘대를 향하며, 곧잘 낙수 북쪽을 지나가네. 기산에서 우는 모습 오늘 나타나니, 아각에 내려앉아 춤을 춘다네. 신유년(1921) 중춘(음력 2월), 정재 오일영.



2022년 6월 한 미술품경매에 <봉황도>라는 이름으로 출품됐었고, 1억 3,500만원에 국립박물관이 사들였다. 
업데이트 2023.08.3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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