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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현재 노인을 찾아간 이덕무가 본 그림은

1764년 음력 9월 18일, 가을이 깊어질 무렵, 스물 세 살의 청년 이덕무(1741~1793)는 현재 심사정(1707~1769)을 찾아간 때의 일을 일기로 적었다. 그의 집은 지금의 독립문 근처, 반송지 북쪽 골짜기에 있었다.

반송지 북쪽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 현재 심사정의 처소를 방문했다. 초가가 쓸쓸한데 동산의 단풍나무와 뜰 앞의 국화는 무르익고 아담한 그 경색이 마치 그려놓은 듯하고, 비단에 방금 네 폭의 그림을 마쳤는데 도사가 하늘로 오르는 용을 구경하고 있는 것과, 두 손님이 짙푸른 나무 그늘과 하얀 폭포 사이에 마주 앉아 있는 것과, 약초를 캐느라고 광주리와 도끼를 땅 위에 내려놓은 것과, 야윈 노새를 탄 사람 뒤에는 초라한 시동이 책을 메고 따르는 것인데, 모두 고상하여 속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림들이었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린 이 시대의 철장(哲匠)이다. 관아재 조영석, 겸재 정선과 비슷한 명성을 가졌는데 초충과 묵룡의 그림 솜씨는 아무도 견줄 수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관아재, 겸재 두 사람은 다 늙어서 죽어버렸으니, 지금의 대가라고 한다면 그 한 사람뿐이다. 그 역시 수발이 이미 희끗했다. 그러나 그는 물정에 어두워 내가 “우리나라 유명한 산수를 구경 다니지 않으셨는지요?”하고 물었더니, “금강산과 대흥산성을 구경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또 “왜 많이 다니지 못하셨나요?”하고 물었더니 “가까이 있는 북한산도 미처 구경하지 못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벽에만 치우쳐 돌아설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때 묻고 조잡한 사람들에 비하면 그 취지의 탁연함이 하늘과 못의 격차와 같을 것이다.


이덕무 「관독일기」, 『청장관전서』 권6 중, 버클리대 동아시아도서관



심사정 <운룡도>


그가 몰락한 집안 사정으로 어렵게 살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지금으로 치자면 완전 노인네인 50대 후반에 네 폭을 펼쳐놓고 한꺼번에 그리고 있었다는 것은 경제활동을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그의 처지를 보여준다. 여행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에 집 가까운 북한산조차 가 보지 못했다고 하니 그 여유없음이 서글프다. 

그가 그리고 있던 그림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59세 때 그린 <파교심매> 같은 그림이었을까? 아니면 54세 때 그린 <장림운산> 같은 것이었을까?


심사정 <파교심매> 1766년, 비단에 담채, 115.0×50.5 cm, 국립중앙박물관



심사정 <산수도>(장림운산長林雲山), 《표현양선생연화첩(豹玄兩先生聯畵帖)》 중, 1761년, 종이에 수묵담채, 27.4x38.4cm, 간송문화재단 


겸재의 진경산수화 등 진경문화가 절정에 이르던 때,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명의 남종문인화풍을 수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심사정과 표암 강세황(1713-1791)이 그 중심에 있었고 두 사람은 산수화, 화조, 사군자 등을 그려 함께 장첩한 《표현양선생연화첩》을 만들었다. 이 그림들은 그 안에 있는 것.

실경을 그리지 않고 화보와 그림의 본질에 몰두했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 여행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후, 이덕무 방문 몇 년 후의 그림 하나를 더 찾아본다. 


심사정 〈산수도〉, 《경구팔경첩(京口八景帖)》 중, 1768년, 비단에 엷은 색, 40.0×51.0㎝


이 그림은 조금은 분위기가 다르다. 표암 강세황의 화평이 붙어 있다. 

未知寫得何處眞景 어느 곳의 실제 풍경을 그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其似與不似姑不暇論 그 같고 같지 않고는 논할 것이 못 된다.
第煙雲脆靄大有幽深靜寂之趣’ 연기와 구름이 자욱이 피어올라 유심하고 정적인 멋이 있으니
是玄齋得意筆 바로 현재(심사정)의 득의필이다. 

분위기만 봐서는 남종문인화보다는 진경산수에 가까워보이지만, 실제와 비슷하게 그리려 한 것이 아님을 옆에서 변명해 주는 것만 같다. (사실 강세황은 심사정에 대해 ‘ 화훼와 초충을 가장 잘 그렸고 영모, 산수 순으로 잘 그렸다’고 평한 바 있다.) 

심사정의 30대 산수도는 어땠을까?


심사정 <주유관폭> 1740년, 비단에 담채, 131x70.8cm, 간송문화재단


배를 타고 폭포를 구경하는 그림으로 산의 봉우리마다 준법을 달리해서 깊이감을 주었다. 『개자원화전』에 관동의 산 그리는 법을 응용한 것으로 얘기되기도 한다. 필묘에 방점이 찍힌 테크닉을 보여주지만 뭔가 정형화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자필로 적은 관서에 “경신년(1740년, 39세) 가을에 계거재季巨齋의 필법으로 그린다”고 쓰여 있다. 
업데이트 2023.09.26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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