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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지우재 정수영의 얌전한 사계절 산수 병풍

김홍도와 비슷한 시기. 금수저로 태어나 관직같은 골치아픈 일은 하지 않고 평생 좋은 경치 구경 다니고 좋아하는 시서화에 힘써서 작품들을 남긴 사람이 있다.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이 바로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89세까지 산 것도 스트레스 없이, 그렇다고 놀기만 하지도 않고 적당히 열심히 살았기에 가능했지 않았을까도 싶다. 

지우재 정수영의 대표작은 한강과 임진강의 명승과 경치를 두루마리에 그려낸 <한강임강유람사경도권漢江臨江遊覽寫景圖卷>이나 금강산을 유람하고 나서 그린 『해산첩』의 그림 등이다. "유탄(柳炭 : 버드나무 숯)으로 초본을 그리고 거친 독필(禿筆 : 끝이 거의 닳은 붓)을 사용"해 대담하고 시원하게 그려내는 것이 그 그림의 특징이지만, 국립 박물관 소장품 중에 차분히 그려낸 정통 산수화 병풍도 한 점 있어서 가져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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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영 <사계산수도 8폭 병풍> 1814년, 각 72.3x44.6cm(그림), 전체 56.9x144.4cm, 국립중앙박물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2폭씩 차례로 그린 8폭 병풍으로 오른쪽부터 봄이 펼쳐진다. 1폭의 버드나무 가지에 연두색으로 물이 오른 것으로 봄을 알 수 있다. 2폭 쯤에 꽃나무가 보이지만 색을 아껴서 조금 아쉽다. 3~4폭의 짙게 물든 나무와 시원해 보이는 폭포 물줄기가 여름 산수를 대변한다. 마찬가지로 5~6폭은 붉은 단풍, 7~8폭은 먹을 거의 안 쓴 붓으로 앙상한 가지와 눈 내린 겨울 산을 담백하게 표현해 계절감을 표현했다. 각 면에는 계절에 맞는 시를 붙였는데 일흔이 넘은 나이 1814년에 그린 그림이기에 각 폭에 늙고 병든 자신의 처지를 아쉬워하는 자작시여서 문인의 면모를 보인다. 여행을 좋아하던 그였으니 나이 든 몸을 끌고 마음껏 돌아다니지 못함이 더욱 슬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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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로 남종화풍을 익히고 심사정, 이인상, 강세황 등의 선배들 화법을 배운 데다 진경산수화풍 또한 섭렵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좀더 발휘한 화풍을 만들어냈다. 이런 화풍은 진경의 경우에 더 잘 드러나서 대담하고 자유분방하게 화면을 펼치는 것, 솔직 간략한 필치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했다. 남종화의 준법을 쓰기도 하지만 그에 얽매이기보다는 거칠지만 자신의 준법으로 산과 절벽 등을 표현했다. 

나무랄 데 없는 보기 좋은 산수 병풍인데 조금 더 그의 개성을 보여주었으면 싶어 아쉽기는 하다. 이 사람은 조선 초기의 문신 정인지(鄭麟趾, 1397-1478)의 후손이고, 실학자 겸 지도 제작자 지리학자인 정상기(鄭尙驥, 1678-1752)의 증손자이기에 글도 잘 하고 여행도 좋아했다. 그러니 역시 개성을 발휘한 진경산수가 더 맞는다 싶다.
업데이트 2024.02.14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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