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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단원 삶의 주요 장면에 등장했던 화원 박유성

정조는 1790년 왕권 강화를 위해 군사부대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고 무예교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만들게 했다. 장교 백동수에게 명하고 규장각 검서관인 이덕무와 박제가가 편찬 책임을 맡았는데, 이들은 장용영에 파견 나가 교본을 만들면서 필요 인력으로 규장각 차비대령화원 세 사람과 도화서 화원 한 사람을 데려갔다. 




『무예도보통지』 중의 삽화들



『무예도보통지』는 삽화가 사실적이고 표현이 풍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린 이의 속화 실력이 돋보이는 화원의 솜씨. 이 때 갔던 네 명의 화원 중 도화서 소속의 화원 한 사람이 박유성(朴維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박유성은 역관이 많은 중인 집안 출신으로 화원이 되어서 정조와 순조 연간의 궁중 행사에 여러 차례 동원됐다. 그 시기의 많은 직업화가와 화원들이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을 테지만 이 사람의 그림에도 김홍도의 스타일이 물씬 드러나는데, 그밖에 김홍도의 인생에서 몇 주요 장면에 등장해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환갑을 맞은 동갑내기 친구들 이인문과 김홍도가 그리고 쓴 것으로 유명한 <송하담소도(또는 송하한담도)>의 관지에 “1805년 정월에...이인문과 김홍도가 서묵재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서 육일당주인에게 드린다.”고 되어 있다. 서묵재(瑞墨齋)는 박유성의 당호. 함께 화원으로 일하기도 했던 이인문과 김홍도가 그와 친밀하게 지냈다는 증거가 된다. 


이인문, 김홍도 <송하담소도(松下談笑圖)> 1805년, 종이에 수묵담채, 109.4x57.9cm,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을 그린 장소가 박유성의 집이다. 


김홍도의 〈지장기마도〉에도 단구가 서묵재에서 그렸다(丹邱寫宇瑞墨齎)고 명기돼 있다. 술을 마시며 어울렸던 화원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김홍도 〈지장기마도(知章騎馬圖)〉1804년, 종이에 수묵담채, 25.8x35.9cm, 국립중앙박물관


1804년(순조4년)은 김홍도와 박유성을 기록에서 여러 차례 볼 수 있는 해.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으로 함께 차정되면서 평가시험인 녹취재를 치러 좋은 성적을 낸 것을 볼 수 있다.(이하 규장각일기 '내각일력內閣日曆)' 인용) 

“화원 김홍도와 박유성은 본각의 화원 중에 결원이 있으면 그 자리에 발령을 내고 만약 결원이 없으면 정원 외로 늘려 근무케 하라고 하교하셨다. 자비대령화원 김홍도와 박유성의 후보 명단을 들어 여쭈었다.”(1804년 5월 5일)

“차비대령화원 내추등 녹취재의 삼차 시험은 그림 종류는 속화로 하고, 제목은 본인이 원하는 것을 그리게 하였다. 성적은 삼상에 김홍도, 김재공, 이명규이고, 삼중에 신한평, 허용, 박유성이고, 삼하에 김득신 박인수, 김명원이었다.”(1804년 6월 22일)

“차비대령화원 금동등 녹취재의 1차 시험은 그림 종류를 속화로 하고, 제목은 <활 쏘는 정자에서 기예를 견주다>로 하였다. 성적은 삼상일이 화원 김재공, 삼상이가 김홍도, 삼상삼이 박유성, 삼중일이 박인수, 삼중이가 김득신, 삼중삼이 이인문, 삼하일이 이명규, 삼하이가 김명원이었다.”(1804년 10월 10일)

“차비대령화원 금동등 녹취재의 2차시험은 그림 종류를 인물로 하고, 제목은 <큰 도끼로 용문을 뚫어내다>로 하였다. 성적은 삼상에 화원 김홍도, 삼중일에 김재공, 삼중이에 이명규, 삼중삼에 이인문, 삼중사에 김명원, 초삼중일에 박유성, 초삼중이에 김득신, 초삼중삼에 박인수였다.”(1804년 10월 12일)

“3차 시험은 그림 종류를 속화로 하고, 제목은 <벌여놓은 가게마다 기이한 물건 선전하네> <곳간에 쌀을 팔아 들이다>와 <부잣집 사위 맞기> 중에서 원하는 것을 그리게 하였다. 성적은 삼상에 화원 이인문, 김득신, 이명규, 박인수, 김재공, 김명원, 김홍도, 박유성이었다.”(1804년 10월 15일)

“금동등 녹취재 비교 시험은 그림 종류를 속화로 하고 제목은 <정전 건물에 대들보 올리기>와 <성 밖 마당에서 무예를 닦다> 중에서 원하는 것을 그리게 하였다. 성적은 삼상일에 화원 김재공, 삼상이에 박인수, 삼상삼에 김득신, 삼중일에 박유성, 삼중이에 김명원, 삼하일에 김홍도, 삼하이에 이인문, 삼하삼에 이명규였다.”
“종합성적 발표는 11분 화원 김재공이고 10분 박인수, 김득신, 박유성, 김홍도이고, 8분 김명원, 이인문이고, 7분은 이명규였다.”(1804년 10월 18일)

곧이어 1804년 12월 20일에는 박유성의 서묵재에서 지장기마도를 그린다. 

여러 기록과 사전에 김홍도와 박유성이 1745년생 동갑 친구라고 되어 있는데, 그와는 맞지 않는 기록도 있어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도 여겨진다. 다음 그림의 발문이 그중 하나 


박유성 <군조도> 1786년, 종이에 수묵담채, 25.0x19.5cm, 선문대학교박물관


평화로운 봄의 정경, 물가에 솟은 오랜 고목에 앉거나 주위를 날아다니는 새들을 그린 이 그림은 박유성의 작품이다. 원숙한 경지는 아니지만 김홍도의 필치와 비슷하면서 참하게 그려낸 화조도로 ‘병오년 여름(丙午夏) 서묵재’라고 관서가 되어 있어 시기와 그린 사람을 특정할 수 있다. 석농화원으로 묶여 전해지던 김광국의 수장품 중 한 폭인데 작품 옆에 붙은 김광국의 발문 내용이 다음과 같다. 

 “예전 무술년(1778) 여름날 나는 일장(日章)과 함께 김홍도 단원을 방문하였다. 당시 김홍도는 막 <만성화류도滿城花柳圖>를 초하고 있었다. 그 곁에 헌걸차고 명석해 보이는 소년이 손을 소매자락에 넣고 서서 정신을 집중하여 자세히 살펴보고 있어 마음속으로 그것을 특이하게 여겼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한 화첩을 보여 주었는데 그중에 <야압유영도野鴨遊泳圖>가 있었다. 처음에는 김홍도가 먹 장난을 한 것으로 알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서묵’이라 낙관되어 있었다. 누구인지 물어보았더니 박유성 덕재였고 예전에 만났던 그 헌걸차고 명석해 보이던 소년이었다. 이 <군조도> 역시 그가 그린 것으로 상당히 재기(才氣)가 있다.” 


이것으로
- 박유성은 김홍도에게 그림을 배웠다.(관찰식으로)
- 1778년 김홍도가 33세일 때 박유성은 ‘소년’이었다. 
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무리 동안이어도 서른 세 살의 남자를 소년으로 볼 리는 없고, 인물을 헷갈려서 잘못 기록하지 않았다면 박유성이 김홍도와 동년배일 가능성이 적다. 박유성은 김홍도 그림을 지켜보며 배울 당시 소년, 15-18세 정도가 아니었을까. 만약 김홍도-이인문-박유성 세 사람이 절친한 동갑내기 화원이었다면 <송하담소도>에 세 사람이 그려지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김응환 <강산승람도> 발문에는 흥미롭게도 김광국, 김홍도, 박유성 세 사람이 함께 등장한다. 
"...무신년(1788) 12월 상순에 유계연과 단원 김사능, 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 고졸 김광국, 의원 김가일, 서묵재 박유성, 온천 방효량 유능이 녹의원의 십우당에서 보았다. 그 때 매화가 활짝 피었었다." 

김홍도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고목한아도>와 박유성의 <군조도>가 매우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는데, 두 사람이 한 원본을 보고 그린 것이거나 둘 중 하나가 따라 그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 김홍도 <고목한아도枯木寒鴉圖> 비단에 담채, 29.5x39cm, 개인


박유성이 김홍도의 제자였다면 후에 김홍도가 나이 들고 몸이 아팠을 때 자신이 있던 전주로 김홍도를 불러내려 모시고자 했던 것을 통해 스승에 대한 그의 애정과 안타까운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서간이 있음). 전주로 내려가 머물렀던 김홍도는 그곳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광국 방문시 김홍도의 그림을 지켜보던 때(1778년) 박유성이 16세 정도의 소년이었다고 가정한다면 1762년생쯤 된다. 그러면 위의 <군조도>는 1786년 24세, 무예도보통지를 그린 1790년은 28세 무렵이 되고 <송하담소도>의 장소를 제공해 준 1805년은 43세 무렵이 된다. 

1793년 예조에서 박유성을 겸교수로 추천해 올렸을 때 정조가 '겸교수는 나랏일에 수고를 했거나 여러 해 오래 근무한 사람으로 임명했는데, 박유성은 근래에 와서야 들은 이름이라 합당치 않다'며 허락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 (박유성은 정조 때 의궤에 이름을 올린 적이 없다.) 당시로서는 정조에게 인정받을 만한 큰 활약은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 젊었기 때문이었을까?


박유성 <서금도> 1796년, 종이에 먹(선면), 25.5x73cm, 선문대학교박물관


이 <서금도> 또한 봄철의 정경으로, 목련이 핀 나뭇가지에 새들이 노닐고 있는 아름다운 부채 그림이다. 왼쪽에 병진년(1796) 서묵재가 그렸다는 관서가 없었다면 누군가는 김홍도의 그림이라 주장했을 수도 있을 만큼 김홍도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  

업데이트 2024.04.1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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