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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여러 재상들의 노모 장수 축하 합동 잔치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경이물훼敬而勿毁』라는 이름의 화첩은 의령 남씨 집안의 가전화첩 모사본으로, 1767년에 제작된 것이지만 원래 그림은 15세기 초부터 18세기까지 의령 남씨 중 훌륭한 조상들 덕에 남긴 기록화를 모은 화첩이다. 총 다섯 건의 그림이 실려 있다. 


1. <중묘조서연관사연도> : 1535년 중종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세자[인종]의 교육을 담당하던 서연관들에게 베푼 연회 그림.
2.〈태조망우령가행도〉 : 태조가 능자리를 살피러 망우령에 행차한 그림. 원화는 14세기 말.
3.〈명묘조서총대시예도> : 명종 때 서총대에서 행해진 문무시예 행사 그림.
4.〈선묘조제재경수연도> : 선조 때 재상 노모들의 경수연 그림. 1605년.
5.〈영묘조구궐진작도> : 영조 때 경복궁 근정전 터에서 베푼 연회 그림. 1767년. 태종 때 태상왕(태조)를 위한 소작례와 같은 정해년에 재현한 것.

그 중 어버이날을 맞아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를 살펴본다.

<선묘조제재경수연도>를 풀어 쓰면 ‘선조 연간에 여러 재신들이 부모에게 올린 수연(생신잔치)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화첩 그림 중에서 가장 많이 이모된 작품이며, 의령 남씨로는 참판 남이신이 포함되었다. 화첩이나 화권 형식으로 홍대, 고대본을 포함, 여러 소장자에게 전해지고 있다. 열 개 넘는 집안이 관련되어 규모가 커서 집집마다 전해진 그림이 많았고, 그만큼 많이 주목받고 세간에 화제가 됐던 잔치였다는 방증이다.

일의 시작은 1602년 이거(1532-1608)가 자신의 모친이 내년에 100세가 됨을 임금께 알린 것에서였다. 임금은 몇 년 전까지 있었던 왜란으로 어지러운 가운데 노모가 살아계신다니 좋은 징조라 얘기하면서, 이거를 형조참판으로 임명, 돌아가신 아버지는 예조참의로 추증, 어머니는 정부인으로 칭하도록 했다. 다음해 9월, 이거 어머니의 100세 생일에 이거는 고위 관리들 수십 명을 초청해 잔치를 열어 생신을 축하했고, 인조의 장인 한준겸이 70세 이상 노모를 모시고 있는 13명의 고위관리들이 계를 결성해 노모들을 모시고 1605년 4월 9일 경수연을 개최하기로 한다. 

이 일이 선조에게 알려지자 임금은 잔치에 드는 물품과 경비를 돕고 삼청동에서 모일 수 있도록 하고, 난리로 금지되었던 풍악을 허가해 궁중 악공들을 동원할 수 있게 하는 등 어마어마한 특혜를 내려 주었다.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 《경이물훼敬而勿毁》 1767년, 48.5x33cm, 국립고궁박물관


총 다섯 폭으로 구성된 그림인데, 춤을 추며 분위기를 북돋는 사람들, 연주하는 악공들, 대문 밖에서 쉬고 있는 말들, 바깥 마당에 모인 하인들, 집안에서 음식을 장만하는 사람들, 집안에 들어가지 못해 큰 차일 아래 돗자리에서 주안상을 받는 하객들을 묘사해 큰 잔치의 다양한 군상과 분위기를 담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온 관리들은 분홍색 관복을 입고 붉은색 지화를 꽂은 관모를 쓰고 자리잡았고, 다른 폭에는 노모께 술잔을 올리는 관리의 모습도 보인다.  
 


대기조


절하고 춤추는 나이먹은 아들들


바쁜 주방



손님 접대


1605년에 그린 원화는 전쟁 통에 소실되어 전하지 않고 1655년(효종 6)에 다시 제작한 것이 원본이 된 것인데, 화첩의 서문에 따르면 당시 수연에 참석했던 이문헌(李文藼)이 화첩의 유실을 안타까워하여 아들 이관(李灌)에게 화수(畵手)를 데려다 다시 그림으로 그리고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일을 맡겼다고 한다. 화면 구성이 자유롭고, 풍속화적인 면모가 강하고 사실감이 있어 17세기 원본 그림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이거의 어머니는 백세를 훌쩍 넘겨 살았지만 이거 본인은 76세에 세상을 떴다. 당시로서는 그래도 장수한 셈.)
업데이트 2024.04.24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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