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의 행렬을 죽 따라가 보면 이들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한 무리의 관리들이 건물 안에서 안마당을 내려다보며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다. 도착한 인물들은 안마당에 늘어서 인사를 하는 일본에서 온 손님들, 사신(倭使) 무리이다.
이들은 현재의 부산, 동래의 초량왜관에 온 일본의 사신들과 그들을 접대하는 동래부사 일행이다. 동래부사가 일본 사신을 맞이하는 그림, <동래부사접왜사도> 10폭 병풍 중 8번째 폭에 초량객사에 도착한 사신들과 동래부사 일행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 앞으로 죽 연결된 행렬 그림 중 6폭에 여성들의 모습이 있다.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 10폭 병풍, 종이에 먹과 채색, 각폭 85x46cm, 국립중앙박물관(본관 836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이 <동래부사접왜사도> 열 폭 병풍은 조선에 온 일본 사절을 대접하기 위하여 동래부사가 초량의 왜관으로 길을 나서는 장면, 왜관 객사에서 사절 일행이 절하는 광경 등을 시간에 따라 구성한 것이다.
첫째 폭에서 일곱째 폭까지는 윤산(輪山) 아래 자리한 동래성으로부터 동래부사가 관원들을 앞세우고 초량왜관 설문(設門)으로 들어가는 행렬 장면, 여덟째 폭은 일본사절이 초량객사(草梁客舍) 뜰 아래에서 왕의 전패에 예를 올리는 장면, 아홉째 폭에는 조선 역관(譯官)들의 숙소인 성신당(誠信堂)과 빈일헌(賓日軒) 정도가 그려진 빈 폭, 마지막 폭은 연대청(宴大廳)에서의 연회 장면이다.
전체적으로 부감(俯瞰)의 내려다보는 시각이며, 당시의 주요 건물이나 지형을 꽤 사실에 근거해 그리고 있다. 지도와 산수의 특성을 모두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병풍과 함께 전해진 유물카드에는 원제목이 <東萊府使與日本諸侯宴會圖> 즉 동래부사와 일본제후의 연회 장면 그림이라고 되어 있고(오류) 1922년 塚原龍太郞이라는 인물에게서 구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병풍 앞면에 ‘畵師謙齋元伯寫'(화사 겸재 원백 그림)의 제첨(題簽)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예전에는 정선 작품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화풍상 겸재 정선의 분위기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지금은 일반적으로 작자미상으로 분류된다.
말을 타고 가는 여인들은 연회에서 춤을 추기 위해 소집된 기녀들이다. 6폭의 말타던 기녀들이 10폭 연대청(宴大廳)에서 개최된 연회에 참석해 춤추는 정경으로 재등장한다. 붉은 치마에 노랑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따내린 어린 기녀 2명과 뒤로 가체를 한 어른 기녀 6명을 볼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단절됐다가 1609년 6월 기유약조(己酉約條)로 다시 회복되긴 했지만, 이때부터 조선에 오는 일본 사절단 일행은 이전처럼 상경하여 임금을 보는 일은 금지당했다. 다만 동래에 있는 초량왜관에서 밖에 나갈 수 없도록 엄격히 제재당하고 왕의 전패(殿牌: ′전′자를 새겨 세운 나무패)에 절을 하는 것이 임금을 배알하는 일을 대신했다. 조선 내에서 일본과 교류할 수 있는 곳은 왜관이 있던 동래 뿐이었다.
일본 사신을 영접하는 외교적 행사는 동래부사의 책임하에 이뤄졌다. 일본 사신들은 이중 삼중의 문과 담벼락으로 철저히 갇혀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했다. 원래 잔치에서 이들을 맞는 춤을 (남자)어린이들이 췄으나 왜인들이 여인이 춤추는 것으로 바꾸어달라고 졸라서 기희들을 불러 하는 것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어 흥미롭다.
왜관에 도착한 일본 사신을 맞이하는 대표적인 그럼 3점 중 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래부사접왜사도>가 가장 유명하다고 볼 수 있다. 국립박물관에 또 다른 동래부사접왜사도가 한 점 더 있고 그것은 임진왜란에 특화된 국립진주박물관 상설전시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그밖에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오구라(小倉)기증품 중 한 점으로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