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9년, 영조 35년 초여름, 쉰 셋의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은 어떤 한 인물의 요청으로 이 산수도를 그렸다.
1번 심사정 <하경산수도> 1759, 종이에 먹과 담채, 134.5x64.2cm, 국립중앙박물관 (덕수 2826)
제일 먼 곳에는 높은 산봉우리가 희미하게 보이는 양쪽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보인다. 사이에 있는 건물들은 산사(山寺)인 듯하다. 계곡을 이루며 떨어지는 물줄기, 앞으로 다시 바위산 같은 봉우리가 펼쳐져 내려온다. 전경의 중앙에는 화보 풍의 나무가 두어 그루 있고, 오른쪽으로는 작은 집 안에서 열심히 글을 읽고 있는 한 선비의 모습이 보인다. 그 선비가 있는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래쪽의 다리를 통해 시냇물을 건너가야 할 것이다.
<하경산수도> 부분
관지를 통해 이 그림을 그린 시기 그리고 서강(西岡) 정영년(鄭永年)이라는 사람을 위해 그린 것이라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정영년은 정수연(鄭壽延, 1715~?)이라는 인물로 영년은 그의 자이다.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노론의 정계에서 소외된 남인 쪽 인물로 고위직에는 오르지 못했고, 40세 때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로 처음 출사한 뒤 이 그림이 그려진 1759년 무렵 한성 판관으로 재직했다. 환경 때문이었는지는 모르나 은일하는 처사로서 살아가고자 했던 인물이었던 듯 하다.
심사정은 한해 전인 1758년에도 정영년을 위해 그림을 한 점 그렸는데, 이 그림이 더 유명하다. <방심석전산수> 즉, 심주의 뜻을 따른 산수를 그를 위해 그렸다고 기록했다. 두 폭의 그림에서 여러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어서, 심사정은 정영년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의도에 맞게 그림을 그렸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이 그림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번 심사정 <방심석전산수도> 1758, 종이에 먹과 담채, 129.4x61.2cm, 국립중앙박물관 (덕수 2825)
<방심석전산수도> 부분
<방심석전산수도>와 <하경산수도>를 비교해 보면, 내용과 소재가 일치하고, 동일인이 의뢰한 그림이어서 주문자의 의도와 취향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바위산의 모습이나 Y자형 주름, 같은 표현상의 변화가 보인다. 심주의 그림과 닮지 않았음에도 ‘심주를 방했다’고 말할 만큼 남종화법에 그 뿌리를 두고자 했던 그였지만, 새로 유입된 양식, 즉 명말청초의 안휘파 양식 같은 청나라 풍에 대한 관심이 그러한 변화를 낳았을 수 있다.
같은 박물관에 소장된 그림 중에 작자미상의 산수도가 한 점 더 있는데, 첫 번째 그림과 비슷한 관지가 있다.
3번 미상 <산수도> 종이에 먹과 담채, 156.5x100.5cm, 국립중앙박물관 (본관 13264)
(위) 1번 하경산수도 부분 (아래) 3번 산수도 부분
1번과 같은 기묘년에 그려졌다고 써 있고, ‘현재’라고 쓰고 인장도 찍혀 있다. 심사정은 물론 다양한 기법의 그림을 마음대로 그릴 수 있던 사람이었지만, 기법적인 면과 분위기가 매우 달라서 비슷한 시기에 심사정이 그렸다고 하기에는 조금 의아하긴 하다.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을 누군가 후에 심사정의 것으로 둔갑시킬 목적으로 관지를 적고 인장을 찍었을까? 아니면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심사정이 예전에 그렸던 것 위에 대강 써서 팔 수 밖에 없었을까? 위작에 대한 판단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논의할 부분은 많은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