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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초록 댓잎에 쌓인 겨울눈 - 수운의 설죽도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 1708~1782)는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성호 이익의 조카이고 잘 알려진 학자 이가환의 아버지다. 진사시에는 일찍 합격했지만 평생 문인으로서 자신을 갈고 닦았다. 

그의 문집(『혜환잡저(惠寰雜著)』 권11)에는 「제수운착색설죽장題岫雲着色雪竹障」, 즉 ‘수운의 착색 설죽 병풍에 제하다’라는 글이 들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竹以雪爲難 而又以着色爲尤難
대나무는 설죽을 그리기가 어려운데, 또 색을 칠하기란 더욱 어렵다.
盖一涉染飾 天趣脧損故也
대개 한 번 색을 입히고 나면 천연의 정취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惟其粉綠淍溜 神爽飛溢
(이 그림에는) 다만 그 초록 분가루를 칠했을 뿐인데, 정신의 상쾌함이 날아 넘친다. 

조선시대 3대 묵죽 화가인 수운(岫雲) 유덕장(柳德章, 1675-1756)의 대나무 그림 병풍에 제한 글인데, 그 원래 병풍의 모습이 어땠을까 상상하게 된다. 대나무에 눈이 쌓인 모습에 초록을 더했으나 묵죽의 정취를 잃지 않고 상쾌함이 오히려 더한 병풍. 

수운의 설죽 중에 녹색으로 채색을 한 그림은 간송미술관 소장의 설죽 정도만이 전해질 뿐이다. 


유덕장 <설죽>1753년, 종이에 먹과 담채, 139.7×92cm, 간송미술관


세로 140cm 가까이 되는 큰 그림. 과거에 병풍의 한 폭을 장식했을지는 알 수 없으나 독폭으로 그려졌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보통 8폭 중 한 폭으로 설죽도가 그려질 때는 맨 마지막 폭에 자리하면서 두어 그루의 대가 왼쪽에 치우쳐 배치되는 경우가 많은데, 화폭이 가로로 넓어 가운데에 주된 대 그룹이 있고 왼쪽에 두 그루의 대가 더 있으며, 바위들로 이 대를 받치게 해서 구성의 심심함을 덜도록 했다. 

관지로 '歲癸酉夏 峀雲八耋翁作‘이라고 써서 1753년, 만 78세의 여름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평생을 대나무 그림에 바친 화가가 남긴 그림이다. 먹의 농담을 살리듯 초록의 농담으로 원근을 표현하고, 눈이 쌓인 댓잎의 표현도 자연스럽고 생기가 넘친다. 
인장은 '岫雲居士'와 '令作无俗'이다. 

이와 유사한 그림이 한 점 있는데, 이 설죽은 평범한 수묵 그림이다. 신미년 여름, 즉 녹색의 설죽을 그리기 2년 전에 그렸던 것이다. 



유덕장 <설죽> 1751년, 141.5×91.5cm 국립중앙박물관



이용휴는 유덕장의 조카사위였기 때문인지 대 그림에 꽤 많은 제발을 남겼다. 이용휴는 유덕장의 그림에 대해 “이정의 대나무 그림은 호방하고 빼어나며, 무성하고 장대하여 기세가 뛰어나다. 반면 유덕장의 대나무 그림은 맑고 윤택하며, 흩어지고 비어서 운치가 뛰어나다”고 평한 적도 있고, 「수운 난초첩 발(峀雲蘭草帖跋)」에서는 “수운의 그림은 그 전파가 남으로는 탐라까지 달하였고 북으로는 옛날 여진과 야인이 살던 곳까지 미쳤으며, 북경 저자에서까지 팔리는 것도 있었다”라고 쓰기도 했다.

올 초겨울, 댓잎 뿐 아니라 보라빛의 국화, 아직 노란 잎이 떨어지지 않은 은행나무 위에 수북히 내려앉은 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됐다. 수묵만이 가진 정취도 좋으나, 흑백으로 덮인 세상에서 작게 드러내는 색도 아름답다. 

업데이트 2024.12.26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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