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군 선도 등 남쪽의 수선화 축제 소식이 들려온다. 떼로 피어 있는 수선화는 고고한 수선화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지만 늘 볼 만한 광경일 것 같다. 집 앞 꽃집에서 내놓은, 구근에서 키워낸 수선화 화분을 만지작거린다.
지금은 이렇게 흔하지만 조선시대 수선화는 책가도나 기명절지도에서 아주 귀한 여러 물건들 사이에 놓여 귀한 대접을 받았다. 조선판 기명절지의 틀을 완성했다 할 수 있는 오원 장승업(1843-1897)은 수선화를 뿌리째 널어놓은 모습으로 기명절지도 내에 넣곤 했다. 장승업과 책가도 전성기에 앞서, 강세황(1713-1791)이 그린 <정물>에도 수선화가 등장한다.
장승업 <백물도권> 중 부분, 비단에 담채, 38.8x233cm, 국립중앙박물관
장승업 <기명절지도> 비단에 담채, 140x44cm, 선문대박물관
강세황 <정물> 종이에 담채, 65×26.8cm
수선화가 귀한 고동기들과 나란히 오브제로 선택될 수 있었던 것에는 수선화가 가진 의미 덕이기도 하지만, 따뜻한 나라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라 한양 뿐 아니라 베이징에서도 귀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옛 중국 시로나 대하게 되는 전설적 꽃이었고 조선 후기에 와서도 실물을 보지 못한 이가 많았던 것 같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시를 통해 당시 수선화에 대한 인지도를 알 수 있다.
신선의 풍채나 도인의 골격 같은 수선화가 仙風道骨水仙花
삼십 년을 지나서 나의 집에 이르렀네 三十年過到我家
복로*가 옛날 사신길에 휴대하고 왔었는데 茯老曾携使車至
추사가 이제 대동강가 아문으로 옮기었지 秋史今移浿水衙
궁벽한 산촌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라서 窮村絶峽少所見
없었던 것 얻었기에 서로 다투어 들레어라 得未曾有爭喧譁
어린 손자는 억센 부추잎에 비유하더니 穉孫初擬薤勁拔
어린 여종은 도리어 마늘 싹이라며 놀라네 小婢翻驚蒜早芽
흰 옷과 푸른 휘장 서로 마주해 섰노라면 縞衣靑相對立
옥골격 향살결의 향내음은 절로 풍기는데 玉骨香肌猶自浥
맑은 물 한 사발과 바둑알 두어 개뿐이라 淸水一盌棋數枚
먼지 하나 없으니 무엇을 흡수할 거나 微塵不雜何所吸
시진의 본초강목과 부옹**의 시구에서 時珍本草涪翁詩
너무나 더럽히어 글을 보매 울고 싶어라 厚誣直欲臨書泣
진흙에 뿌리내린 걸 더러운 데 처했다 하고 糞泥托根云處汚
건땅에 꽃 피운 걸 습한 곳 좋아한다 하였네 肥土開花稱好濕
이제야 알겠노라 대은은 때로 저자에 숨어도 始知大隱時隱市
검은 물도 들지 않고 닳지도 않는단 것을 猶自緇磷不相入
- 여유당전서 권6 / 詩 / 秋晚金友喜 香閣,寄水仙花一本,其盆高麗古器也
- 여유당전서 권6 / 詩 / 秋晚金友喜 香閣,寄水仙花一本,其盆高麗古器也
다산은 추사 김정희(1786-1856)에게 청자에 심은 수선화를 한 뿌리 선물 받았다고 한다. 신선의 풍채나 도인의 골격, 향내나는 살결로 칭송하고, 잎이 부춧잎 같다거나 마늘 순 같다거나 하는 수선화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와 그 식생에 관련한 잘못된 정보를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복로’는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수선화를 들고 왔다는 복암 이기양(1744-1802)을 말하고, ‘부옹’은 수선화에 대한 시를 선제적으로 남긴 북송의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을 가리킨다. 조선시대 초인기 레퍼런스인 『고문진보』에 황정견의 수선화 시가 실려 있다.
물결을 능멸하는 신선 버선에서 먼지 일어나듯 凌波仙子生塵襪
희미한 달빛 아래 물 위를 사뿐사뿐 걷는 듯하다 水上盈盈步微月
누가 이 애끓는 혼백을 불러 是誰招此斷腸魂
겨울 꽃 심어 꽃피워 애절한 슬픔 보이나 種作寒花寄愁絶
향기 머금은 몸의 깨끗함은 성안의 경국지색 含香體素欲傾城
산반꽃은 동생, 매화꽃은 형이라오 山礬是弟梅是兄
앉아서 보노라니 꽃이 너무 좋아 미칠 지경이네 坐待眞成被花惱
문을 나와 크게 웃어보니, 큰 강물이 비껴 흐르누나 出門一笑大江橫
-古文眞寶 前集 제4권 七言古風 短篇 - 水仙花
-古文眞寶 前集 제4권 七言古風 短篇 - 水仙花
애절하면서도 깨끗한 모습에 향기를 지닌 수선화를 매화의 동생으로 여겼다.
조선의 수선화 인지도를 제고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기여를 한 이가 추사임을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제주에서 수선화를 처음 알아봤다는 기록도 있긴 하지만 꼭 그랬던 것 같지는 않고, 여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귀한 줄 모르다가 추사로 인해 제주-대정 지역의 수선화를 알게 된 듯하다.
제주산 수선화는 추사가 처음으로 알아봤다. 올바르게 키울 수 있다면 강남의 품종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고 자란 땅에서는 오색영롱하던 꽃이 바다를 건너면 색깔이 달라진다.
濟州産水仙花 秋史始知之 取長如法 不下江南種 而本土有五色花 渡海色變)
- 이유원 『임하필기(林下筆記)』
추사는 유배지 제주에서 그 귀한 수선화가 잡초 취급받는 것에 놀라기도 하고, 소중히 거둬 창가에 모셔두고 감상하기도 했다.
濟州産水仙花 秋史始知之 取長如法 不下江南種 而本土有五色花 渡海色變)
- 이유원 『임하필기(林下筆記)』
추사는 유배지 제주에서 그 귀한 수선화가 잡초 취급받는 것에 놀라기도 하고, 소중히 거둬 창가에 모셔두고 감상하기도 했다.
수선화(水仙花)는 과연 천하에 큰 구경거리입니다. 강절(江浙) 이남 지역에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곳에는 촌리(村里)마다 한 치, 한 자쯤의 땅에도 이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는데, 화품(花品)이 대단히 커서 한 송이가 많게는 십수화(十數花) 팔구악(八九萼) 오륙악(五六萼)에 이르되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꽃은 정월 그믐, 2월 초에 피어서 3월에 이르러서는 산과 들, 밭두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또는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듯 합니다. 이 죄인이 거주하고 있는 집의 문 동쪽ㆍ서쪽이 모두 그러하건만, 돌아보건대 굴속에 처박힌 초췌한 이 몸이야 어떻게 이것을 언급할 수 있겠습니까. 눈을 감아버리면 그만이거니와, 눈을 뜨면 눈에 가득 들어오니, 어떻게 해야 눈을 차단하여 보이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토착민들은 이것이 귀한 줄을 몰라서 우마(牛馬)에게 먹이고 또 따라서 짓밟아 버리며, 또한 그것이 보리밭에 많이 난 때문에 촌리(村里)의 장정이나 아이들이 한결같이 호미로 파내어 버리는데, 호미로 파내도 다시 나곤 하기 때문에 또는 이것을 원수 보듯 하고 있으니, 물(物)이 제자리를 얻지 못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水仙花果 是天下大觀 江浙以南 未知如何 此中之里里村村 寸土尺地 無非此水仙花 花品絶大 一朶多至十數花 八九萼五六萼 無不皆然 其開在正晦二初 至於三月 山野田壠之際 漫漫如白雲 浩浩如白雪 累居之門東門西 無不皆然 顧玆坎窞憔悴 何可及此 若閉眼則已 開眼則便滿眼而來 何以遮眼截住耶 土人則不知貴焉 牛馬食齕 又從以踐踏之 又其多生於麥田之故 村丁里童 一以鋤去 鋤而猶生之故 又仇視之 物之不得其所 有如是矣
- 『완당전집』 제3권 5번째 편지(권돈인에게) 중 일부
- 『완당전집』 제3권 5번째 편지(권돈인에게) 중 일부
김정희의 칠언시 <수선화> 碧海
푸른 바다 파란 하늘 웃음이 절로 난다/선연은 아무래도 맺어지기 마련인가
호미끝에 팽개쳐진 평범한 이 물건을/햇볕드는 창문 옆의 책상 위에 모셔둔다
김정희의 칠언시 <수선화> 一點
날씨는 차가워도 꽃봉오리 동글동글/그윽하고 담백하여 감상하기 그만이다
매화나무 고고해도 뜰 밖 나기 어렵지만/맑은 물에 수선화 해탈 신선 너로구나
추사가 수선화를 칭송했던 만큼, 추사가 보았던 수선화의 아름다움을 언어 외에 그림으로도 남겨주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지은 수선화부(水仙花賦)를 추사가 옮겨 쓴 글씨들을 소치 허련이 모아 판각했다는 탁묵첩 내에는 다소 간략하지만 수선화 그림이 한 점 포함되어 있다. 다만 이 수선화 그림과 화제 원본은 추사의 솜씨인지는 확실치 않다. 관지에 써 있는 감옹(憨翁)이라는 호는 추사의 제자격인 조희룡(1797-1866)의 것이기에, 혹 소치가 수선화부 등등을 옮겨 묶으면서 조희룡의 그림을 앞쪽에 얹어 분위기를 돋우려 했을지 모르겠다. 화제는 다음과 같다.
조맹견이 쌍구(雙鉤)로 수선화를 그렸는데 지금 모지랑 붓으로 바꿔 되는 대로 그렸으나 법도는 한가지다.
趙彛翁以雙鉤作水仙 今乃易之以秃潁亂抹橫塗 其揆一也
화제에서 언급한 남송말-원나라 때 사람 조맹견(趙孟堅, 1199-1264)의 그림은 아마도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이 소장한, 구륵법(쌍구)으로 그린 수선도 두루마리일 듯하다.
조맹견 <수선> 부분, 종이에 먹과 담채, 32.7x1021.6cm, 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원
두 그림을 비교하는 것은 사실상 어불성설에 가깝다. 누가 탁묵첩의 수선을 그렸는지 모르지만 직접 조맹견의 그림을 보았을 리는 없다. 화보나 임모된 그림 등 여러 형태로 수선화가 전해져 사람들에게 희미하게나마 이미지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청에서 건너온 그닥 유명하지 않은 인물의 수선화 그림 한 점이 추사와 그 후대에 의해 소중하게 보관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당성(唐晟) <수선화> 청(19c), 종이에 먹과 담채, 16.6x23.7cm, 개인
청나라 사람 당성은 자가 채강(采江), 장쑤성 사람으로 현감, 현령 등의 작은 벼슬을 한 관리다. 이 사람이 그린 수선화가 조선으로 흘러들어와 소중하게 전해지게 된 데는 역시 추사 지분이 상당하다. 당성은 옹방강의 문인인 조강(曹江, 1781~?)의 스승이기도 했는데 그림의 화제를 보면 내력을 알 수 있다.
이는 나의 스승 당채강 선생의 꽃 그림이다. 선생은 지금 하남성 범현령인데 추사가 그 필묵을 많이 보았으므로 이를 그에게 부친다.
此我師唐采江先生畫芸 先生今爲范縣令 秋史多見其筆墨故寄之
추사 때문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청나라에서 수선화 구근을 수입해 방안에서 수선을 떨면서 키우는 양반들이 늘어나 수입을 금지시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추사가 옮겨 쓴 「수선화부」의 저자 청나라 사람 호경(1769-1845)과 생몰년이 같은 자하 신위 또한 수선화에 대한 시도 남기고 수선화를 즐겼다고 하는데, 그의 아들 신명연(1808-1886)도 수선화 그림을 그렸다.
신명연, 산수화훼도 화첩 중 수선화와 붉은 꽃, 견에 담채, 30x17.9cm, 국립중앙박물관
같은 화첩,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생각되는 나비 그림에 ‘갑자년 봄’에 그린 것으로 되어 있으니 그가 56세인 1864년경 그려진 그림이다. 수선화와 함께 작약이나 동백같이 생긴 붉은 꽃을 그렸다. 아마도 화보를 참고한 그림인 듯, 실제 식물의 외견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